닉 부이치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팔다리가 없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도 처음엔 팔다리가 없는 탓에 스스로 한계를 지어 놓았습니다. 저도 제 스스로를 보면서 "이건 할 수 없어, 저것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던 적이 있어요. 우리가 계속해서 있었으면 하는 것들이나 없었으면 하는 것들만 바라보다 보면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 잊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팔다리가 있었으면.. 팔 다리가 있었으면.." 되뇌는 것은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죠.
내가 인생에서 깨달은 두 가지 원리가 있어요. 그중 첫째는 "감사하라"는 거예요. 감사하다는 건 참 힘든 거예요.내가 8살 때 내 인생을 한 번 상상해본 적이 있어요. "나는 절대 결혼할 수 없을 거야." "나는 직장도 못 구할 거야." "내게는 제대로 된 인생이나 목적이 없어." "나는 아내 손도 못 잡아주는데 남편 구실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야." 여러분이 능력이 안된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여러분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생각은 거짓이에요.
닉 부이치치가 태생적으로 긍정적인 사람이라서 사람들 앞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강의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도 우리들처럼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한계를 없애고 더 나아갔습니다. 팔, 다리가 없어서 한계를 정하고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가 과연 사회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달할 수 있었을까요? 마지막으로 닉 부이치치의 마지막 연설 내용으로 포스팅 마치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생각하면 슬픕니다. 여러분은 아름답습니다.
모세가 어느날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고 있었는데 타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겨 가까이 갔습니다. 아더 핑크는 “가시떨기 나무는 실상 모세 자신의 모습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막에 아무렇게나 버림받은 그 흔하고 흔한 가시떨기 나무, 이 보잘 것 없는 가시 떨기 나무가 바로 모세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젊었을 때 모세는 자기 힘으로 불을 붙여서 뭔가 하려고 했지만 연기만 풍기고 꺼저버렸습니다. 그러나 방금 목격한 가시 떨기 나무에는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1.내가 누구이기에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이 애굽사람들로부터 학대당함을 들었노라. 내가 너를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1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우리는 내가 누구이기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누가 나와 함께 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넌 할 수 있어”,”너는 잘할꺼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라고 하실 때에 모세는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출애굽기 3장 18절에서 모세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이는 주께서 출애굽기 3장 18절에 말씀하셨지만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동족으로부터 배신당하여 쫓겨난 초라한 양치기가 어떻게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부끄러운 과거와 하찮은 현재를 살고 있는 모세에게 자신을 바라보기보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에 대한 신뢰심도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도 부족했습니다. 모세가 도주하며 미디안 이드로의 집에 양을 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해 자포자기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인들로부터 거절당하고, 자기 동족에 의해서도 배신당하였습니다. 40년동안 학습된 무력감을 철저하게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루아침에서 왕자에서 목동의 신분으로 전략했지만 40년 동안 시간을 허비한 것은 아닙니다. 미디안 족속들은 사막의 거주자들이었습니다. 모세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 여정과 관련하여 이 유목생활보다 더 좋은 준비는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상처는 애굽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기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로 당한 실망과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동족을 생각할 때마다 배신감, 분노감, 두려움, 절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인 사건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없이 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아무리 좋은 동기로 주의 일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게 됩니다.
2.주께서 말씀하셔도 안된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신다고 전해도 백성들이 믿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꺼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동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주의 말씀보다 더욱 강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두 가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손에 있는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되었습니다.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 표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뱀처럼 교활한 애굽의 세력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을 그에게 주셨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난 것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믿지 못할까봐 하나님께서 또 다른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네 손을 품에 넣었다고 내어보니 나병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다시 품에 넣었다고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돌아왔습니다. 첫번째 표징은 그들이 믿지 않아도 두번째 표징은 믿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첫번째 표징은 믿지 않고 두번째 표징은 믿는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두번째 표징에서 나병에 걸린 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의 상태를 말하고, 다시 깨끗해진 것은 애굽에서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표징은 모세의 사명과 관련된 것이라면 두번째 표징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연관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고 모세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을 대비해 나일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물이 피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일강이 피가 되는 것은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무서운 재앙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을 통해서 풍요로운 농작물을 생산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한계에 사로잡혀 있는 모세는 주의 말씀과 기적을 목격하면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본문 10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지만 자신은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핑계를 댑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서 안됩니다. 자신이 무능하다고 변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십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나는 그 일을 감당할 인물이 아니라고 모세는 계속 거절합니다. 모세의 문제는 무능의 문제가 아니라 불순종의 문제입니다.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모세에게 붙여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기어코 인도하여 내게 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냐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 앞에 내 놓을 때 주님이 사용해주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한계나 핑계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당신을 쓰고 싶어하시는데 안된다고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능력있는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과 임재하심에 있습니다. 나는 부족하여 도저히 할 수 없지만 주님이 쓰시겠다면 주님 앞에 자신을 내놓을 때 당신은 주님의 놀라운 일꾼이 될 것입니다. 빈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 관건입니다.
모세가 본래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을까요? 사도행전 7장 22절입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모세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문화를 체득하였고 말과 행사에 탁월하였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을 죽이고 자기 동족의 고발로 인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떼를 치는 목자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모세는 자기 동족에 대한 상처와 아픔이 엄청 컸던 것입니다. 이때 한번 꺾인 이후에 자기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모세가 이제는 주께서 말씀하신 이후에도 역시 자기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1, 12절입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치리라.” 이 정도가 되면 모세가 아멘하고 순종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모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13절입니다.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시면서 말 잘 하는 모세의 형 아론을 붙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못한다고 해도 만들어 가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난 못한다는 사람을 들어쓰시는 경우가 이외로 많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만만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지만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쓰십니다. 세상은 이미 된 사람들을 쓰시지만 주님은 만드셔서 쓰십니다.
“모세는 과거의 여러 아픔과 좌절과 마음의 상처들을 딛고 일어서서 위기를 극복하며 성숙한 단계로 나아갔던 것입니다”(성경 인물과 심리분석). 내가 생각할 때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주님이 나를 쓰시겠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그래도 안되겠다고 하십니까? 그러면 하겠다고 반응하십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된다는 믿음을 갖고 반응하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셔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모세가 출애굽기 39장 43절에는 이렇게 변했습니다.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우리도 이렇게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신앙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멀리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한계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저자는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 세 가지 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통해서입니다. 두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다른 말롷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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