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

계산에 밝은 사회에서 은혜로 살기(마 20:9, 10),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4. 5.
반응형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든 것이 있다면 가치관의 충돌이 생길 때입니다. 신앙 양심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들을 강요당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피할 수가 있는 경우면 그래도 괜찮은데 피치 못하는 경우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신자가 볼 때에는 이상한데 주위의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길 때입니다. 그런 경우 내가 이상한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후반기에 요단강 동쪽, 여리고 맞은 편에 있는 베뢰아 지역에서 사역하실 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표제가 포도원 품꾼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은 집 주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구해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는 집 주인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잘 정리된 계단식 포도원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산지는 계단 형태로 정리해 포도를 재배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포도원을 유지하는데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손으로 돌을 가져다가 계단을 쌓아야 하고, 계단 위의 토양도 산비탈에서 사람들이 어께로 져 나르거나 짐승의 힘을 빌려야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봄에 심고 여름에 가치를 쳐야 했습니다. 수확은 9월말에 짧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때가 지나면 즉시 우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수확기가 되면 일손이 필요했기 때문에 장터에 나가 삯꾼을 고용했습니다(존 맥아더, 하나님 나라의 비유).

 

1.불러 주신 은혜에 끝까지 감사하자 

이른 아침에 하루 일당을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하고 품꾼과 약속하여 자기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였습니다.당시에 일용직 노동자의 품삯은 일반 정규 노동자나 가정의 하인이 받는 기본금(한 데나리온, 로마의 은전)에 턱없이 못 비쳤습니다. 하루 노동은 12시간이었는데 이때 일을 시작한 사람은 아마 오전 여섯 시 경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이례적이었습니다. 이런 조건에 깊이 만족하고 포도원으로 항했던 것입니다.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제 삼시란 우리 시간으로는 6를 더하면 제 9시입니다. 그들에게 내가 품삯을 잘 쳐줄 테니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집 주인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거리를 찾지 못한 그들이 필요를 채워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 육시(12시)와 제 9시(오후 3시)에도 나가보니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일당을 잘 쳐줄 테니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제 십일 시(오후 5시)에도 나가보니 아무 일도 하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술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한 데나리온도 채 못되는 품삯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그날 하루를 굶고 지내야 했습니다.

 

집 주인이 그들에게 여러분들은 어찌하여 하루 종일 놀고만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를 품꾼으로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주인이 그들에게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기회를 줍니다. 아마도 그들은 나이가 많거나 몸이 허약하거나 밭에서 힘든 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을 마치고 돌아갈 시간인데 주인이 일을 시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집 주인이 그래도 불러주시니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2. 공로의 잣대로 원망하지 맙시다

날이 저물어서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품꾼들에게 일당을 주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선착순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 온 사람들부터 일당을 주라고 합니다. 제 십일 시에 온 사람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당시에 노동자를 하루를 일하면 받는 일당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이 사람들은 몇 시간 일하지 않고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 오너들은 이런 사람들은 고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은 미리 스카우트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고용한다 하더라도 시간 당 계산해서 일당을 쳐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중간에 온 사람들은 몇 데나리온을 받았을까요? 기록된 것은 없지만 아마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것이라고 익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주인이 자신을 불러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늦게 온 사람들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열받았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들여서 일했기 때문에 집 주인이 더 많은 돈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을까요? 본문 11, 12절입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분명히 공정한 처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나중에 온 사람들과 비교할 때 이렇게 나오는 것이 무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같아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집 주인을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이 몇 시간 일했는지 밝히고 있지 않은데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더위를 무릅쓰고 그들보다 10배나 더 열심히 일했는데 너무 하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집 주인에 대해 조게 생각하고 기쁘게 일했을 것입니다그런데 갑자기 기분이 상한 것은 그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관대한 품삯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신들은 푸대접을 받고 무시당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집 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 정말 그랬을까요? 본문 1, 2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들여보내고.저 같으면 이런 불만을 없애기 위해 먼저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씩 주었더라면 되었을 텐데.   

 

집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주고, 늦게 온 사람들은 시간에 비례해서 일당을 주는 것이 현명했을 것입니다. 계산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 맞지만 영적세계에 있어서 또 다른 윈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공정한 노동법, 최저 임금, 공정한 거래와 같은 세상의 법칙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기껏 열심히 일하고 시험에 드는 경우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꽤 오래전에 역삼동에서 목회할 때일입니다. 겨울에 교회에서 김장을 담그는데 어떤 성도들은 아침 일찍 오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늦게 오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일찍 오신 분 가운데 한 분이 누구는 시간이 남아서 일찍 오는지 아느냐가 늦게 오는 분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이해를 못하는 것 아니지만 집사님 이렇게 늦게라도 와서 섬겨주지 너무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집 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어떤 사람은 자신이 수고한 것에 대해서 받으면서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해주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원망을 터트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공로의 원리가 작용해서 그렇습니다. 비교의 원리를 적용해서 그렇습니다. 신자는 은혜의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대가의 원리입니다. 

3.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면 안됩니다 

. 예수님은 16절에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은 집 주인이 자신을 불러 준 것 만도 감사한데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된 것에 너무 감동입니다. 일찍 온 사람들은 더운 일기에 그렇게 많은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원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써주시니 그저 감사한 것 뿐입니다. 세상에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나를 놰 나를 불러주시는 지 감격해야 되는 게 아닙니까? 오히려 더위를 견디면서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었음에 더 보람을 느끼면 안되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일한 것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은혜의 원리를 작동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더 많이 수고하고도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더 인정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의 뜻대로 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집 주인이 먼저 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 뜻대로 하시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내 뜻을 앞세우다 보면 주님의 뜻이 악하게 보여집니다. 아무리 잘 해주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별로 뛰어난 사람 같지 같은데 많은 것을 주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사람이 나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입니다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대접을 받고, 첫째 아들은 그렇게 잘 했는데 오히려 책망을 받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신앙생활에 그렇게 열심이었는데 책망을 받고 오히려 세리와 창기들은 더 낫다고 하신 말씀이 이해가 잘 안됩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에서는 일을 많이 하고 실적을 많이 올린 사람이 인정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러 주신 분도 계시고, 청소년 때 불러 주신 분도 계시고, 결혼해서 불러 주신 분도 계시고, 노인이 되어서 불러 주신 분들도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상황에서 불러 주셨던지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이 빠지기 쉬운 딜레마는 열심히 봉사한 후에 은혜의 원리에 감사하지 않고 공로의 원리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귀한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마태복음 19장 30절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많으니라. 이 세상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가 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경우도 요즈음은 많이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이러한 경우가 많다는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결정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교만하여 자신이 잘 나서 그런 줄 알고 착각했던 유대인들은 배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은혜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된 사람들이 많게 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경우는 최선을 다하여 성공한 이후에 자신이 잘 해서 그런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은 최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밀물처럼 밀려와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는 신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이유로 그분을 불의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아직 은혜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천국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공로를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먼저 온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나중 온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보통 주인은 자신이 손해 볼 일은 하지 않기 때문에 제 시간에 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한 만큼만 보상합니다. 그러나 이 주인은 일 거리가 없어서 놀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와서 자격이나 능력을 따지지 않고 일을 시킵니다. 늦게 포도원에서 일을 시작한 사람은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했습니다. 일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일하는가를 주인은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주인은 한 사람이라도 포도원에 들여보내 일을 시키기를 원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주인은 일에 대한 자세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맨 나중에 온 품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정당한 대가로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이런 품삯을 받아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했을 것입니다. 한편 일찍 온 사람은 자신이 일한 대가로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이 나왔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아 보십니다. 

 

얼마나 똑똑하고 세상적으로 성공했는 가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느 냐를 보십니다. 주인이 자신을 써주신 것만도 감사하고 뒤늦게 온 사람에게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마음이 상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지 하나님은 달아보십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보고 실망하는 사람은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든지 내 역할을 잘 감당하면 됩니다. 

 

이 비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입니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천국의 가치관은 더 많이 수고했다고 해서 특권과 지위를 누리는 것입니다. 먼저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섬기는 데 있습니다. 처음 온 사람은 나중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간까지 우리를 기다리시고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비유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 다른 예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저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해주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 된 그 자체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에서 대해야 합니다. 

 

주인은 모든 품꾼들에게 은혜로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은혜를 생각하느냐, 대가로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열심히 일했다는 그 자체가 공로나 자격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스스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보상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서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만을 보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고 그 가운데 나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은헤를 많이 받는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예람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를 받은 이후에 교만으로 빠지거나 계산의 원리에 빠지면 안됩니다. 은혜를 주신 것은 은혜를 베풀라고 주신 것이지 은혜를 쌓아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경쟁하거나 비교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흘려 보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께 더 받아내려 하는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이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어떠한 상황에서서도 평생 은혜를 기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원리로 사는 사람과 계산의 원리로 사는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요? 은혜의 원리로 사는 사람은 웬지 푸근합니다. 은혜의 원리로 사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을 안겨줍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하나님의 은혜를)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