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요를 누리는 신자(시 112:1-3)
오늘날 크리스찬들이 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한 가지 견해는 세상적인 부요의 법칙을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적인 부요의 법칙을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1.세상적인 부요의 법칙
이들은 “이거야말로 내가 찾고 찾던 바로 그것이야. 나는 좋은 물건들을 갖고 싶어. 나는 돈도 더 많이 벌고 싶고, 나는 좋은 차를 타야 하고, 나는 더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해.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이 법칙들이 제대로 통할 것인지 한번 시도해 보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들은 너무 많이 “나는...나는..."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부요에 대한 세상적인 접근 방법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을 경건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물질적 풍요는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질적 부요에 대한 이러한 거부감은 사실은 세상적인 물질적 부요에 대한 거부인 것입니다. 이런 식의 부요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거듭거듭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2.성경적인 부요의 법칙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부요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법칙대로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부요해질 것이며, 이러한 부요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죄악이고, 돈을 섬기며 하나님보다 돈을 첫 자리에 두는 것이 죄악인 것입니다.
3.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부요케 됨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갈 3:14)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만약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재산을 모으고 늘려간다면 부요하고 성공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시 112:1-3).
예수님께서는 그의 모든 형제, 자매들이 부요할 수 있도록 자신이 완전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예수님으로 인하여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2-14).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부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의 자녀들이 부요하기를 원하십니다.
“그(악인)가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준비할지라도 그가 준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의 은은
죄 없는 자가 차지할 것이며”(욥 27:16-17).
하나님의 부요와 처방은 언제나 하나님을 최우선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가 삶의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놓으면 하나님 또한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서 어떤 필요든 채워 주실 것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속적으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드림으로써 이런 것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요 법칙은 하나님을 우리 삶에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세상의 어떤 것보다 최우선에 두는 한에서만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관찰질문 1. 세상적인 부요의 법칙은 무엇인가?
관찰질문 2. 성경적인 부요의 법칙은 무엇인가?
관찰질문 3. 신자가 부요함을 누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2. 족장시대의 재물관(출 22:21-22)
족장시대는 부족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가장 작은 단위를 이루고 있는 ‘가족’, 그리고 가족들이 모인 ‘씨족’, 그보다 더 큰
단위인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의 사회는 공동재산의 개념을 바탕으로 생활하였고 사유재산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씨족 내에서는
빈부의 심한 격차는 있을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과부, 고아, 이민자, 등 가족과 유대가 끊어진 이방인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들은 사회적 공동책임 하에 보호되었습니다.
족장시대의 재물관은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족장시대에 재산은 개인에게 속한 사유 재산이 아니고 부족 혈연 공동체에 속한 공동소유 재산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부족이 사막에서 유목인을 하던 때이므로, 재산이란 소나 양떼 같은 가축 뿐이고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였기 때문에 부동산은 없었습니다. 사막에서는 생존의 조건이 재산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혈연공동체의 결속에 있었습니다.
족장 시대의 재물관은 다른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사유재산이 없었으므로 최소한 부족 내에는 재산의
불균형이나 불평등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빈익빈이나 부익부라는 갈등 구조도 없었습니다. 혈연 공동 운명사회이므로
모두가 형제자매요, 한 조상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족장 시대에 재산은 부족 모두의 공동소유 재산이므로 재산상의 갈등 문제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족장시대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열 두 지파 등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축복과 언약의 개념이 매우 중요합니다.
윌터 카이저는 족장시대의 축복과 언약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축복의 개념은 모험적 성공이나 혹은 하나님에 의해서 부유해진 것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번성케 하다, 성공을 가져오다는 동사 salah(hisliah)는 축복하다(to bless, 창 24:1,40,52,56)는 동사 barak과 병행하여 창세기 24:21,40,42,56에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족장들 위에 있는 것-그들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축복과 언약의 성취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을, 그리고 4-9절은 아브람의 순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개의 명령과 약속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의 명령은 떠나는 것(너의 본토…을 떠나…땅으로 가라, 1절)이었고,
두 번째의 명령은 “너는 복이 될지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아브람을 부르셨는데, 그것은 그의 순종이 커다란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세 가지 약속은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큰 민족이요, 둘째는 아브람을 위한 복이요, 셋째는 창대한 이름입니다(2절).
이 약속들은 그를 ‘복이 되게’(2절의 두 번째 명령) 해줄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에 입각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세 가지 약속은
첫째로 그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고,
둘째로 그를 멸시하는 자들을 저주하며,
셋째로 그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3절).
아브람을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것은 곧 아브람의 하나님을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백성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다른 민족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백성들이 세상에서 복이 되기는 커녕 항상 불순종하기를 즐겨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복이 미치게 함으로써 (갈 3:8,16; 롬 9;5 참조)
완전한 성취를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부자는 언약의 율법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보장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람은 대표적인 사례 중에 생생한
예입니다. 그의 재산은 순수한 축복입니다. 의로운 자는 번성합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복종하면 잘 된다는 모델 중에 하나입니다.
아브람은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소돔 왕이 아브람을 치부케 하였다고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소돔에게 속한 것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대승리를 거둔 아브람의 믿음을 시험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소돔 왕 베라는 대단히 호감이 가는 협상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소돔 왕에 관하여 무엇을 했는지를 알고 있는 아브람은 소돔에게 속한 전리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을
베라에게 예속시킬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재물보다 더 지속적인 어떤 것, 곧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항구적인 약속의
성취를 원했습니다.
신앙은 이 세상의 부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신 보다 높은 차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족장시대의 재물관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얻는 것에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예속되지 아니하고 오직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딤전 6:17), 하나님의 방법으로 재물을 얻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은 단순한 재물의 축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일한 약속의 유업(히 11:9)을 사모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동일한 약속의 유업이란 일차적으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의미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또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입니다(히 11:10).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은 더 나은 본향(히 11:16), 곧 천국을 예표합니다.
따라서 족장시대의 축복의 개념은 언약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단순한 재물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의 차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관찰질문 1. 족장시대의 재물관의 두 가지 특징은 무엇입니까?
관찰질문 2. 족장시대의 재물관에서 축복은 어떤 것에 근거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가?
관찰질문 3. 족장들은 단순한 재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모하였고 그것은 곧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가?
3. 출애굽 과정의 재물관(출 12:35-36)
애굽에 임한 마지막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5, 36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은금패물과 의복을 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4절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빈손으로 떠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주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아마 이것은 400년 노예 생활에 대한 부분적인 보상이었을 것입니다. 금과 은은 후에 성막을 세우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5장 22절입니다.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들에게 구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로 된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져 나온 예물들은 성소(성막) 건축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소(성막) 건축을 명하십니다. 성소(성막)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1-2절을 보면 성막을 짓기 위해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성막 건축을 위한 특별헌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헌금하는 자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예물을 바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7절에 의하면 그들이 드릴 예물의 종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막을 짓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금, 은, 놋 등은 비싼 것으로서 부자들이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베실이나 염소털 등은 가난한 사람들이 내었습니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지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재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 재물을 얻지만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신명기 8장 18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어떤 우선순위에 따라서 사용해야 할까요?
출애굽기 25장 8절에 보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듣기 위하여 필요한 곳에 교회를 세워서 많은 영혼이 구원받고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로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출애굽기 28장 1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의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제사장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즉 복음 사역에 필요한 부분을 협력하는 일에 우리의 재물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15장 11절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즉 교회 안에 믿음의 가정을 돌아보고 주위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돌아보는 일에 재물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외국인들을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22절에 보면 “과부와 고아들을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3절에 의하면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5절에 보면”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면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26, 27절에 의하면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이러한 규정은 자선을 유도하는 동기를 부여하지만,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입니다.
즉 가난한 자들이 무시당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실 터인데, 이는 부자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마지막으로 안식년에 관한 규정입니다.
출애굽기 23장 10, 11절입니다. 그때 밭들은 경작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며 가난한 자들의 소득원이 될 것입니다.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하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사회 복지를 구현해 내는 일은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압박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물질과 따뜻한 배려를 해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관찰질문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시 은금 패물과 의복을 애굽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취할 수 있었을까요?
관찰질문 2. 재물은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할까요?
관찰질문 3.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할까요?
4.왕정시대의 재물관(암 5:11-12)
족장시대나 출애굽 시대와 달리 가나안 정착시대에는 가나안 땅을 지파의 가족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하였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전에는 족장시대와 같이 공동소유 재산제도인데 반해, 가나안 정착이후에는 각 지파별로 땅이 공평하게
분배되었고, 자신들의 노력과 지혜로 재산을 더욱 증식시키는 데 힘썼습니다.
사유재산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토지매매와 과세, 그리고 부역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들은 사유재산을 인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대지주의 출현으로 이어집니다.
대지주들 가운데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농토를 탈취하거나 고리대금업을 일삼게 되고, 이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농노로 전략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울 왕이 다윗에게 자기의 딸을 주겠다고 하자, 다윗은 이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8장 23절입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의 귀에 전하매 대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
다윗이 자신을 “가난한 자”라고 표현한 것은 왕이 요구하는 신부의 몸값을 갚을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에게 돈을 요구하기 보다는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여서 그의 의무를 행할 것을 요구합니다(삼상 18:25). 사울은 다윗이 그 일을 행하는 동안 블레셋 사람에게 죽기를 기대합니다(25절).
이 이야기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취급받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울은 그의 권력을 사용하여 가난한 자,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윗 왕은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아내로 데려옵니다(삼하 12:14-25).
그러자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가 “어린 암양에 대한 비유”(삼하 12:3, 4)를 하면서 다윗의 은밀한 죄를 폭로합니다.
이 비유는 부자에 의해 자신의 권익을 박탈당한 한 가난한 자의 이야기입니다.
나단은 다윗이 사울 앞에서 사용했던 말, 즉 자기는 사울의 가족과 결혼하기에는 너무 가난하다고 할 때의 바로 그 ‘가난’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혹사당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윗에게 전합니다. 이는 절대적인 왕권에 대항하여 항거한 가장 강력한 고발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두 왕, 즉 사울과 다윗은 사무엘이 미리 경고했던 권력 남용의 죄를 그대로 범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왕의 종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다른 어떠한 계층보다도 가난한 자들은 왕이 휘두르는 폭정에 시달리는 계층이 되었습니다.
성서 자료들과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볼 때, 오므리 왕조의 통치 기간 동안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사이의 틈은 더 많이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기가 되면,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자들에게 비싼 이자를 지불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저당 잡히고, 심지어 그 자신과 처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저당물로 내놓아야
했습니다(왕하 4:1).
아합의 통치 때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이 때 많은 농민이 파산하였습니다(왕상 17-18장). 그들은 부유한 자, 그들의
채권자들에게 토지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그 부유한 자들은 거대한 토지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지주들은 약 100년 후 아모스와 같은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게 됩니다.
아합 왕과 나봇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좋은 예인데, 당시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
아모스 5장 11, 12절입니다. “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가나안 정착 이후 왕정시대의 재물관은 이전에 재물관과는 달리 공동소유 재산이 사유재산 형태로 변모하게 됩니다.
약속의 땅은 매매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땅의 분배 균형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각 지파에 속하지 않은 땅, 즉 가나안
원주민이 사는 땅은 매매와 개인 소유가 가능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군주의 출현으로 권력에 의한 재산의 편중이 심화되어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구조가 나타났습니다.
또한 자급자족 경제에서 도시화로 인해 물물교환의 시장경제가 나타나면서 부의 사유화 편중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 생활이 유목이동 생활이었다면 왕정 시대는 도시 정착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빈부의 차이가 심하고 가난한 자들이 속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예언자들은 빈부격차를 해결하고 사회정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왕정 말기에 시드기야 왕은 재산의
원상회복을 위해 50년에 한 번씩 실시되는 희년(jubilee year)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렘 34:8). 그러나 이런 국가적
조치도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은 이스라엘 왕정이 막을 내리는 비운을 맞게 되었습니다(BC 586년).
가나안 정착과 더불어 왕정시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재물관의 특징은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제도가 강화되면 될수록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가 더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왕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경우에는 백성들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오히려 왕이 백성들에게
폭정을 가하므로 고통과 불행을 안겨줍니다. 세계가 점점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편리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가난하고
힘이 없는 개인이나 나라는 그만큼 많은 불행과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재물관에 근거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관찰질문 1.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현상은 무엇일까요?
관찰진문 2. 왕정시대의 재물관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관찰질문 3. 법이나 제도가 강화될 때 그리스도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5. 예언자들의 재물관(미가 3:9-11)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이후 왕정시대가 도래하면서 경제는 성장하였지만 빈부의 격차는 심해졌습니다.
예언자들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당시의 왕정과 정치 제도에 대해, 특히 재판 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질타하였습니다.
아모스 5장 7절입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이사야 5장 23절입니다.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고 하고 의인에게서 공의를 빼앗는도다.”
미가서 3장 9-11절입니다.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몇몇 대지주들이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많은 농부들이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기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미가서 2장 1-2절입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뿐만 아니라 상인들은 속임수를 일삼았습니다.
아모스 8장 5절입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파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
선지자들은 가난의 원인을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소유를 탈취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예레미야 5장 27절입니다.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에스겔 45장 9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부자들이 그들의 탐욕으로 인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저버린 결과라고
진단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공동체의 유익이 아니라 사욕을 채우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파괴했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습니다.
대천덕 신부는 그의 저서 「토지와 경제정의」라는 책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들에 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로 뒷받침되었던 상류 계급의 모든 생활 방식-상아 궁전, 주연(酒宴), 과식, 향락과 음악에 대한 탐닉은 농부 출신 선지자 아모스에 의해 신랄하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아모스에 이어 호세아, 미가,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 같은 뛰어난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의 죄악을
폭로했습니다.
아모스는 땅에 굶주린 투기꾼들을 가리켜 땅을 너무나 탐내어 “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저 속에 발로 밟는”
사람들이라고 규탄했습니다(암 2:7).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땅을 빼앗아 발붙일 곳조차 없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머리에 묻은 티끌까지 탐내었습니다. 아모스는 토지개혁을 하든지 외국의 침략을 감수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아모스 5장 11-12절입니다. “너희가 힘 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여호와의 율법은 가난한 자들에게서 세 가지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토지를 무를 권리이며,
둘째는 무르지 못한 경우 희년에 토지를 돌려받을 권리이며,
셋째는 안식년에 빚을 탕감 받을 권리입니다.
사마리아가 사치스런 생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세 가지 권리를 거부한 데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모스 8장 4절은 부자들의 이러한 착취에 대해 신랄하게 폭로합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 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이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빈부의 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나라가 망할 때까지 그 격차는 계속 증가했습니다. 그 어떤 선지자들도 지주와 상인, 부패한 관리들을 회개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주전 6세기의 바벨론의 지배 이후 유대 공동체는 계속해서 외부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바벨론 포로가 된 후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무소유자로서 바벨론에서 70년간 보내야 했습니다.
포로 귀환과 함께 돌아온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본토에 남아있던 자들도 황폐한 농촌과 도시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 온 유대 공동체는 빈자의 삶을 영위하였습니다.
따라서 왕정시대의 부익부 빈익빈 구조가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빈자이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예언자들의 재물관의 특징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회 전체의 부패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부패, 즉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
거래상의 사기, 집과 토지의 축척을 고발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이 멸망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조적으로 조직적인 죄악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대기업이 할 수 있는 것과 중소기업이 해야 할 영역들을 구분하여 상생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난한 자들이 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해 희생과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관찰질문 1. 예언자들은 당시에 어떤 것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을까요?
관찰질문 2. 선지자들은 가난의 원인을 어떻게 진단했을까요?
관찰질문 3. 율법에 보장된 가난한 자들의 세 가지 기본권은 무엇일까요?
6.지혜서의 재물관
1.욥기에 나타난 재물관(욥 24:1-2)
24장은 부유한 자들이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기록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빼앗는 부자들에
대해 욥은 고발합니다.
욥기에는 경제적인 범죄들의 목록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경계표를 옮기고 양떼를 빼앗는 사람들(2절), 고아와 과부의 가축들을 빼앗는 사람들(3절), 가난한 사람들을 길에서
몰아내고 세상에서 학대 받는 사람들(4절), 또한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들에 나가 사냥하며, 떨어진 이삭들을 줍는
가난한 사람들(5-6절), 그들은 입을 옷과 살 집이 없습니다(7-8절, 10절),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자녀들을 볼모로 삼았습니다(9절).
욥은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에 의해 고통당하는 것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놔두는가에 대해
궁금해합니다(12절).
이어서 욥은 자신이 가난한 자들을 도움을 베풀었던 일에 대해 언급합니다.
29장에 보면 욥은 정말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져주었습니다(12절). 지체 부자유자들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15절), 과부들을 위로하기를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13절). 사람들은 욥을 “빈궁한 자의 아버지”라고 불렀고(16절). 욥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습니다(16절). 그는 불의한 자들로부터 빼앗은 물건들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17절).
욥은 당시의 빈곤의 원인이 부유한 자들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폭로합니다.
잠언에서는 빈곤의 원인이 게으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잠언 10장 4절입니다. “손을 게을리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그러나 욥은 빈곤이 부유한 자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려고 해도 힘이 없습니다.
욥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29장에 의하면 욥은 결코 자신의 부와 권세를 남용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지배와 종속’, ‘풍부와 빈곤’, ‘편안과 고통’사이에 나타나는 현실적 차이를 불공평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부와 권세는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에 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부와 권세는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를 이루기 위하여 쓰이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가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관찰질문 1. 욥은 빈곤의 원인이 무엇이며, 부유한 자들의 책임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전도서에 나타난 재물관(전 5:10-12)
전도서 5장 10-12절입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않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10절은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거의 고전이 되다시피 한 구절로서 돈의 도덕적, 영적 결과에 대한 유명한 말씀인
디모데전서 6장 9-10절과 좋은 짝이 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전도서 5장 10절에 “이것도 헛되도다’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돈에 대한 중독 증세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돈이 남기고 가는 공허감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잊혀지는 것에 대해 전도서 9장 14-1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어떤 가난한 사람이 탁월하게 일을 처리하였을지라도 잊혀지고 마는 것은 그들의 가난함으로 인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가난과 지혜가 부유함과 어떤 높은 왕보다도 낫다고 평가합니다.
전도서 4장 13절입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더 나으니.”
전도자는 어떤 악은 부에 대한 탐욕으로 생겨나는가를 보았습니다. 전도서 4장 1절입니다. “내가 다시 해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방지일은 그의 저서 「전도서」에서 나눔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는 것은 먹을 것을 뿌리듯이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던지라는것은 버리는 심정으로 결과를 생각하기 전에 할 일을 하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1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는 ‘여럿에게’한 말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로 받아야 합니다.
나눠주는 것을 힘껏 하라는 것입니다.
관찰질문 2.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3. 잠언에 나타난 재물관 (잠 30:7-9)
오늘은 잠언에 나타난 재물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당시에 지혜자들은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빈곤이나 부로 인한 유혹으로부터 지켜달라고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잠언 30장 7-9절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빈곤으로 인해 나타나는 가난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멀어지게 합니다. 부유함은 여유가 있어서 하나님을 가까이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빈곤과 부유함은 모두 위험한 양극단의 현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가난의 원인이 부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혜자들은 빈곤의 근원에
대해 다른 각도로 보고 있습니다. 가난은 술 취함과 게으름과, 태만의 결과라고 진단했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잠 10:4).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잠 20:13).”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잠 21:17).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6:10-11).
지혜자들은 젊은이들이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을 피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들은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교훈합니다.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잠 13:18).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잠 19:7).
지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고 있습니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
가난한 자들에게 공의를 행하는 것이 왕의 기본 임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잠 29:14).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의무를 모든 국민들에게 확대하여 적용하였습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모든 국민들의 책무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보이는 호위를 하나님께 보이는 호의로 여겼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이란 여호와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돌보아야 할 대상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는 것은 신성모독과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 17:5).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22:2).
이와는 대조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잠 14:21은“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반면에 잠 28:27에 의하면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앳킨슨은 그의 저서, 「잠언 강해」에서 부에 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부’ 또는 ‘재물’은 ‘가난’과 대조되고 있으며, 사치가 아니라 충분함을 의미합니다. 부는 인간의 노동,
‘부지런한 손’,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그리고 ‘여호와의 축복’,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니니라”(잠 10:22)의
결과입니다.
부는 친구를 사귀거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잠 14:20),
가난한 자를 지배하는데,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잠 18:23) 사용될 수 있습니다.
불의하게 모은 재물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잠 10:2).
가진 것이 없으면서 부유한 것처럼 가장하거나 자신의 부를 숨기기 위해 가난한 척 꾸미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부한 체 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잠 13:7).
충분한 부는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잠 10:15, 18:11),
자자손손에게 유산을 남겨 줄 수도 있습니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잠 13:22).
하나님이 베푸시는 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며 자기에게도 더 늘어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 11:24).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
케네디 T 에켄은, 바클레이 패턴 구약주석에서 부자의 유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는 사람에게 안정을 제공합니다(잠 10:15, 18:11).
부자들은 먹는 것에 구애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적인 문제들에 쉽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그와 같은 여유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매우 취약하여 생존의 기반이 불확실합니다.
둘째, 부는 친구를 갖게 합니다.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잠 19:4).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잠 14:20).
가난한 자와는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이웃에 대하여도 인내해야 하며 심지어
자기 형제와 친척들로부터 냉대를 감내해야 한다. 가난한 자와 벗이 되려면 실로 많은 것이 요구된다.
셋째, 부는 사람에게 권력을 줍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잠 22:7).
권력과 경제적 힘은 부자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운영해 나가며 시장의 가격을 결정하며 노임을 지불하고 돈을 빌려줍니다.
넷째, 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 할 수 있게 해줍니다.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잠 18:23).
가난한 사람은 특히 자비를 얻고자 할 때 말을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환심을 살 수 있는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부자는 실로 무례하게 행동할 수도 있으며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쫓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한 자는 가난한 자 보다 훨씬 많은 사회적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부자가 자신들의 유리한 점들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지혜롭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 어리석다는 표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생활의 중요 영역에 있어서 부한 자들은 지혜롭게도 혹은 어리석게도 행동할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지혜자들은 부가 지혜의 결실이지만, 모든 부가 지혜의 결과는 아님을 또한 분명히 알았습니다. 진정한 부는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피나는 노역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축적된 부입니다.
“망령되이 얻는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 가느니라(잠 13:11).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잠 12:11, 28:19).
정직하게 열심히 일을 해서 얻은 부와 하룻밤 사이에 성취한 부는 대조적입니다.
“망령되이 얻은 재물”이란 불의한 방법이나 투기를 통하여 얻은 재물을 말합니다.
'급히 얻음'(망령되이 얻음)이란 말은 투기꾼이 부정직한 방법이나 부정한 거래를 통하여 돈을 버는 것을 말합니다.
잠언 23장 4절에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부자를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 지 모릅니다.
물론 사업가나 기업인들은 큰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업을 잘 운영해서 번성하게 한다는 것은 많은 일 자리를 창출하여 국가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무원이나 회사원이나 교사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 되기에 애쓰면 어떻게 될까요? 봉급은 일정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자가 되기 위해 무리한 방법으로 공무원이 부정하고 회사원이
횡령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이 부자가 되려고 하면 부작용이 생기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받는 것을 족한 줄로 알고 잘 관리하고 선용해야 합니다.
관찰질문 1. 잠언에서는 지혜자가 가난의 원인을 어떻게 진단했을까요?
관찰질문 2.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은 어떤 대상이었을까요?
7.예수님의 재물관
조해수 목사는 “신 구약 성경은 매 25절마다 한번 꼴로 물질과 돈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스테반 아터번은 “성경은 돈에 대해서는 무려 2,000 번을 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프랭크 비올라는 “신약 성경의 38개의 비유 중에서 12개가 물질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신약 성경 안에 믿음에 대한 구절은 215개이며, 구원에 관한 것은 218개인데, 금전과 재정의 청지기직과 책임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은 2,084나 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돈을 보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찾으십니다. 돈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의 내적상태를 보여줍니다. 먼저 마태복음 6장 19-24절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재물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마태복음 6:19-2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19절).
” 부(富)를 사랑하는 것은 무서운 악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10절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천국을 상속할 신자들이 말세에 재물을 쌓는 것은 너무나 근시안적인 행동입니다.
야고보서 5장 2, 3절입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부(富) 자체가 죄악인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부의 긍정적인 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잠언 6장 6-8절입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고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성경은 장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준비할 것을 권면합니다.
예수님이 금하시는 것은 돈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 이기적인 욕심을 경계합니다.
신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땅에 보물’을 쌓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를 솔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0, 21절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따라서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은 “장래를 위해 지혜롭게 물질을 예비하는 것”, 즉 장래를 위해 절약하며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 맥아더는 ‘보물’에 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보물’로 번역된 헬라어 ‘데사우리죠’는 ‘보배에 보배를 더하여 쌓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수평적인 개념(즉 평평하게 누여져 쌓인)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수직적인 개념은 목적이 있고 용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대의와 목적을 이루는 일에 투자하기 위해 돈과 재산을 모으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거룩한 대의와 목적이란 자신의 가족, 교회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유용하게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탐욕과 탐심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재물을 쌓아 두는 것은 주님이 금하시는 것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부나 노동력을 소모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6장 27절입니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용조 목사는 보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6장 19절의 “보물”의 의미를 좀 더 깊이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이나 돈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돈을 포함해서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 보물은 지식일 수 있습니다. 지위나 명예나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 보물은 신앙적인 행위나 업적일 수도 있습니다.”
존 스타트는 “보물”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금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소유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둘째, 만약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저축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개미가 겨울에 필요하게 될 양식을 여름 동안에 준비하는 것을 칭찬했으며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들을 멸시하기 보다는 즐겨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따라서 세상에 보물을 쌓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나 장래를 위해 예비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선물을
즐기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재물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것은 이기적인 재산의 축적, 욕심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관찰질문 1. 예수님이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는 말씀에서 금하는 것, 금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관찰질문 2. 존 스타트의 보물에 대한 해석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9-24절에서 보물을 어디에 쌓아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1.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십니까?
먼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존 맥아더는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다 보물을 쌓아 둘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특성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특성입니다.
재물을 이 땅에 쌓아 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땅에다 보물을 쌓아 두지 않습니다.”
대천덕 신부는 ‘네 보물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영적인 것들에 대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문제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 사람의 재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면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영적인 얘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재물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네 보물이 땅에 있다면 네 마음이 하늘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친히 물질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물질이 악하다고 하면서 영적인 문제만 취급합니다. 이런 불교 사상이 교회에 많이 스며 들어왔습니다. 영적인 것이 중요하지만 물질적인
것은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물질적인 본문을 비유적으로, 즉 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물질적인 것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보물을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곧 장래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8, 19절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박형용 교수는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일시적인 보물을 영구적인 보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가지고 있는 보물은 어느 것이건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시적인 것이
영원성을 갖게 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의 예를 드십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신속하게 행동했고 현명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일시적인 재물을 가지고 영원한 가치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고 하셨습니다.”
하용조 목사는 이 본문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고,
둘째는 재물을 쓰되 하나님이 기억할만한 일에 쓰라는 뜻입니다.
4절의 재물(mammon)이란 뜻은 원래 ‘위탁한다’, ‘어떤 사람의 감독 하에 둔다’ 라고 하는 수동적인 의미가 있었는데 그것이 돈의 속성상 능동적으로 변해서 ‘의지한다’는 뜻으로 바꾸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재물과 보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재물을 쌓아둔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기억할 수 있는 재물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언젠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되면 그 나라에서 발견될 수 있는 재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불에 타서 없어지는 재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3절입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서도 견딜 수 있는 재물, 그것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 보물에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바클레이는 “재물”(Mammon)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물(맘몬)이란 단어는 어떤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안전하게 보관하려고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서 ‘맡겨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믿어 버리는 것’(trust)이 되었습니다.
얼 피츠, 크레그 힐은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맘몬은 정반대며 그렇기에 동시에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한쪽을 섬기면 다른 한쪽을 섬길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고대 아람어인 ‘맘몬’(Mamm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실 때, 그것은 재정의 신으로 섬기던, 하늘에 존재하는
한 실체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맘몬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는 말씀을 통해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맘몬은 이러한 영역들 가운데 권세에 속하는데, 돈을 사랑하며 섬기도록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런 신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뿐 아니라, 그들이 머무는 땅에 사는 사람들의 신들을 함께 섬기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아모리 족속의 거짓 신들과 여호와를 함께 섬기는 것을 버리라고 외치며, 양쪽을 섬기는 것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이므로 이제는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정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여호수아 24장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면서 두 가지 영적인 실체를 대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것같이, 맘몬도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맘몬을 주인으로 삼아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돈은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권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재정의 권세는 우리가 누구를 섬기기로 작정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거나 맘몬의 영이 되는 것이다.
리차드 포스터는 재물 곧 “맘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부를 지칭할 때 아람어인” 맘몬”(mammon)을 사용하실 때는 그 단어에 인격적이고 영적인 속성을 부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고 하실 때에는 “맘몬”을
인격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돈은 도덕적으로 증립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단지 그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좋거나 나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자원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맘몬은 우리를 지배하려고 추구해 오는 하나의 힘인 것입니다.』
맥닐(McNeile)은 “사람은 두 고용주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예는 두 소유주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는 한 사람의 주인에게 소유되어야 하고, 전 시간을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 그의 충성을 나누는 사람은 이미 재물에게 충성을 바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온전하고 독점적인 헌신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2장 8절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8장 11절입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과 다른 것들과 함께 섬기려 하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하나님과 같이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우상숭배로 간주하십니다.
조지 거스리는 “돈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영역입니다.
뒷주머니에 지나치게 쏠려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과 양식을 받기에 부적절하며 거기에 둔감해집니다.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 방법은 중대한 영적인 활력이 자라나고 드러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합니다.
마음이 세상과 멀어지고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만 우리는 돈을 예배와 섬김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관찰질문 1.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의미와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관찰질문 2.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얼 피츠, 크레그 힐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2.마태복음 6:34
오늘은 마태복음 6장 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재물에 대한 교훈이 염려에 대한 교훈으로 끝난다는 것은 이외입니다. 부를 얻고자 하는 마음, 재물을 섬기고자 하는
유혹은 탐심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 심연에는 우리의 위상과 안전과 생존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까지는 우리에게는 안식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내일에 대한 염려로 쉬지 못한다면 우리 마음이 참된 고향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내일 일을 전혀 준비없이 맞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하나님은 내일도 해가 뜨게 하실 것이고, 또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천국 백성들은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소매를 걷어 붙이고 오늘 당할 문제들을 대면합니다.
A. 슬라터는 근심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전욕 속에 부(맘몬)로부터
우상을 받들게 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과 근심 속에 하나님을 부정하는 태도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신앙 상실을 죄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곧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와 거의 동등시 하였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 61:1-2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 여기서 “가난한 자”는 곧 마음이 가난한 자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의와 부정이 지배했던 당시 유대사회에서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의와 부패의 때가 묻은 재물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돈과 재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해야 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재물을 모음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재물을 소유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재물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획득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돈의 문제에 대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너희가 둘 다를 섬기지 않기를 권한다”가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둘 다를 섬길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과 돈을 위해 사는 것은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대치할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실 때에는
돈이 우리를 섬기지만,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될 때에는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됩니다.
부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를 쓰지 않을 때는 죄가 됩니다.
따라서 진실한 종은 돈보다 주의 일에 마음을 쏟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으로서의 우리의 신실함을 돈의 문제를 가지고 시험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세상의 부를 다루는데 신뢰할 만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부요함에 대해 누가 너희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눅 16:11, NIV)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복 주시느냐, 안 주시느냐에 영향을 미칩니다.
존 맥아더는 돈을 사랑하면 어떤 결과에 이를까?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잊습니다.
솔로몬은 더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해서 지참금을 많이 가진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이끌었으며 그의 가정 또한 파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잠언 30장 8, 9절입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둘째, 하나님 믿기를 중단합니다.
돈을 소유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위험은 돈을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돈이 충분히 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걱정이 안 되지.’
만약 내가 돈을 의지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욥기 31장 24, 25, 28절입니다.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니라.”
셋째,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할 때 사탄은 우리를 속이기 위해 갖은 수법을 씁니다.
마가복음 4장 19절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돈이 있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을 가진 것으로 착각합니다.
넷째, 성경의 가르침과 타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판 것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다섯째, 불안전한 토대를 의지합니다.
여러분이 돈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여러분이 빨리 사라져 없어질 것을 믿게 됩니다. 돈이라는 불안전한 토대를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잠언 23장 5절입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여섯째, 은혜를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부하게 될 때에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8장 14절입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일곱째,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합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할 때 자신을 위하여 간직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것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8절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입조와 헌물이라.”
여덟째, 다른 사람의 것을 도둑질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입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결국은 형제들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 됩니다.
유동준은 돈을 섬긴다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몇 가지 들고 있습니다. 『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전제를 망각할 때 부한 신자나 가난한 신자가 공히 빠지기 쉬운 올무는 돈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재물, 즉 돈 자체는 맘몬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돈이 맘몬이 되는 것은 신자가 돈을 사랑하고 돈에 집착하고 돈을 섬기게 될 때입니다.』
그러면 돈을 섬긴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돈을 섬기다’는 말은 돈을 ‘기준 삼다’, ‘판단의 근거를 삼다’ 라는 뜻입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그 일을 하고 안 하고의 판단 기준을 돈, 즉 경제적 이득, 또는 세상적 안락에다 두고 가부를
결정한다면 그것이 돈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사례 1, 신자가 땅을 산다고 합시다. 신자가 땅을 산다고 그 자체가 죄 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땅을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 그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문제가 됩니다. 이번에 땅을 사두면 나중에 땅값이 올라가기 때문에 사는 것은 땅을 사는 목적과 기준이 금전적 이득을 남기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행동입니다.
사례 2, 내게 경제적 이득을 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돈이 기준이 된
행위입니다.
사례 3, 신자는 주일에 경제적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일하면 안 됩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는 말씀은 주일에는 돈이나 경제적 이득이나 세상적 안락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이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에 가게 문을 안 열면 수입에 지장이 많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하시니까 돈을 좀 못 벌어도 나는 가게 문을 열지 않겠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하셨을 때에는 나를 향하신 더 좋은 대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례 4. 믿는 사람에게 돈을 꾸어 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돈을 꾸어 주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우로 나뉠 수 있습니다. 사업 자금이 모자라는 신자가 돈을 꾸어 달라고 하는 경우, 생활이 어려운 신자가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꾸어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꾸어 줄 수 있으면 꾸어 주되 이자를 받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즉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경우에는 꾸어 주되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호구지책이 막막해서 돈을 빌리려는 사람에게 이자를 보고 돈을 꾸어 주는 것은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5절입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내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변리는 이자를 말합니다.
레위기 25장 35-37절에서도 생활이 곤란한 자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할 때 이자를 받고 꾸어 주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관찰질문 1.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관찰질문 2. 존 맥아더가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에 대해 나누어 보세요?
3.누가복음 16:1-13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종종 불리워 집니다.
이 청지기는 자신의 해고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주인의 채무자들에게 가서 빚을 줄여 주며 환심을 삽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고용계약이 끝날 것을 대비해 채무자들이 자기를 돌봐 줄 친구로 만드는 이 청지기의
선견지명을 칭찬합니다.
주인이 부정직하게 보이는 청지기의 행동을 칭찬하는 이 비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 이 청지기는 장기간 갚지 못하는 채무를 줄여 줌으로 주인이 아예 못 받을 수도 있는 돈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 이 청지기는 종종 융자금에 대해 부과하는 이자에서 임금을 받았고 자기에게 지불할 몫에서 빚을 줄여 주었으므로,
언젠가 받을 것을 지금 정리한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 이 청지기는 애당초 채무자에게 실제보다 많이 부과하고 남는 부분을 챙길 계획이었는데, 이제는 그들에게 부풀리지
않은 정확한 금액을 부과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것이 정확한 해석인지에 관계없이 예수님은 돈과 사람의 관계를 위해 투자함으로,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되게 한
청지기의 지혜로움을 칭찬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8, 9절입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예수께서는 이 청지기의 지혜를 본받아 주님의 자원을 영원한 미래를 위해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이 사람을 해고한다는 것은 청지기의 일이 어느 날 끝이 날 것이고, 언제가는 그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 사람이 해고되는 것처럼 끝날 것이고, 예상하지 못한 때에 우리에게 닥칠 것입니다.
이 청지기의 주인이 임무를 끝내기 전에 결산한 것처럼 우리 인생이 끝났을 때에도 우리가 청지기직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결산할 날이 반드시 옵니다.
로마서 14장 12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청지기가 했던 그대로 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청지기로서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재물을 우리는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1.불의한 재물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16장 8-9절에 보면 이 옳지 않은 청지기로부터 ‘불의한 맘몬’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불의한’이란 단어가 9, 10, 11절에 사람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청지기는 빚진 자들에게가 아니라 그의 주인에게 불의했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재물(mammon)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한명수 목사는 ‘불의한 재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부정한 일을 하여 얻은 재물이란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의 재물로 사람을 속여 부정하게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손경구 목사는 ‘불의한 재물’은 세상의 재물입니다. 재물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덜 중요한 것에 재물이
사용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A. 슬라터는 ‘불의한 재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금전을 소유하고 숭상하며 금전에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금전이 불의한 것이 됩니다. 금전은 우리에게 그릇된 희망을 갖게 하고, 자기에게 결박하고, 공허한 채로 내버려 두고
결국에는 망하게 합니다.
2.불의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청지기직이 끝나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 후안까를로스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9절이 그 해답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여기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재물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재물은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이러한 종류의 투자는 영원히 유효한 것입니다.
랜드 알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는 작은 것으로 계속해서 테스트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적은 시간, 적은 재능, 적은 돈으로
하는 일들을 하나님은 크게 보십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눅 16:11).
무엇이 ‘참된 재물’일까요? ‘참된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물을 가치 있게 여겨 주시는 것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 보다 더 참된 재물이 있을까요?
우리가 돈과 소유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달아보십니다.
더 나아가 영원한 직책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재물을 다루는 것에 충실하면 장차 직책을 부여받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7-19절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누가복음 16장 1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이 구절은 현재는 청지기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관리할 책임이 있지만, 어느 날 우리가 소유주가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 자신을 위해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시며 이 사실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현재 다른 사람의 재산을 다루는 것과 미래에 우리 자신의 재산을 가질 것에 대한 전망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의 돈으로 좋은 청지지가 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서도 재산을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재산을 잘 관리하면,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에게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후안 카를로스는 누가복음 16장 10-11절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재물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재물이며, 또 하나는 영원한 재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0절은“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느니라” 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현재의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이고, ‘큰 것’은 영원한 재물을 뜻합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맡기겠느냐”(11절). 이 구절에서 현재의 재물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재물은 참된 재물입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2절).
여기서 ‘남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너희의 것’은 영원한 재물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재물, 즉 이 세상에서의 재물은 매우 작고 불의하며 남의 것이나 영원한 재물은 많고 참되며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물관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의한 재물’ 이라고 하신 이유는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대 마치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인 양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에 충성된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충성된 자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고 있는가? 를 점검해야 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었는가? 땅에 쌓아 두었는가? 구분하는 기준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을 구하는가? 아니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으로 염려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직도 두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 그리고 사랑하며 섬기는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3.부와 소유에 대한 예수님의 두 가지 주제
누가복음에는 부와 소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많이 나타납니다.
두 가지 주제가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한 가지는 재물의 영적위험에 관한 것을 다룹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상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누가복음 6장 24-25절입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로다.”
이 구절들은 누가복음 6장 20, 21절과 대조하여 읽어야 합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예수님께서는 장래의 안정과 안일을 위해 부를 축척하는 부자들은 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하십니다(눅 12:16-21).
누가복음 18장 24, 25절입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다른 한 가지는 더욱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자유함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젊은 관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2절입니다. “네게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누가복음 6장 30절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누가복음 12장 33절입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누가복음 6장 35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심판을 받게 된 유일한 이유는 그가 문간에 있는 거지를 돌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눅 16:19-31).
삭개오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 그의 회개의 즉각적인 결과는 속였던 자들에게 후하게 보상하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입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마태복음 25:31-46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배고픈 자, 나그네,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를 도우려는 의지가,
최후의 심판에서 사람들을 분리해 세우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목마른 자를 먹이는 것,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벗은 자를 입히는 것, 병자와 죄수를 방문하는 것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관찰질문 1. 우리는 청지기 직이 끝나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후안까를로스의 대답을 적어 보세요?
관찰질문 2. 앞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관찰질문 3. 누가복음에서 부와 소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두 가지 주제는 무엇일까요?
8.사도 바울의 재물관(딤전 6:10 )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물질주의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리스도인이 경건해지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을 때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6장 9절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이런 사람은 자족하는 마음을 잃게 됩니다. 부가 그들의 관심의 초점이 될 때, 그들은 유혹에 빠지고 덫에 걸리게 됩니다. 그들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 곧 침륜과 멸망에 떨어집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하고 자족하는 것을 삶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더하여 주십니다.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면 우리는 재물의 유혹들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 18절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경제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불신자들로부터 게으르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 12절입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합이 없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선교 사역에서 이 원리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복음의 일꾼으로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2절입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9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그가 이렇게 열심히 일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는 애써 일했지만, 선교 사역에 있어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재정적으로 바울을
후원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에 스데바냐와 브도나도와 아가이고는 선교 헌금으로 바울을
지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7, 18절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에바브로디도 역시 빌립보 교회로부터 받은 선교 헌금을 바울에게 가져다 준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6절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사도 바울은 또한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할 이유에 관해 고린도후서 8장 13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의 이 말은 모든 사람이 모두 똑같이 나누어 갖는 사회주의 제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돕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려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단순히 고린도인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돕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도 가난하면서 연보 모금에 참여했던 마게도니아 교회를 칭찬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가 가난하게 된 것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인들을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면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연보 모금에 참여하라고 권유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받았던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교회로부터 지속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요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6절입니다. “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가 짐 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라.”
①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먼저 가족과 친척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② 영적 지도자들은 경제적 지원을 하기에 앞서 교회 밖의 지원 가능성들을 모두 검토해야 합니다.
③ 교회로부터 지속적인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나이 들고 성숙한 신자(신약의 과부는 60세 이상이 되어야 함)로
도덕적으로 정결하고, 자손의 존경을 받으며, 손 대접을 받으며, 교회 내의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자신의 성숙함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재물관의 특징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족의 원리입니다.
서문강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원하는 일은 뭐든지 다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면 다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는 그런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믿음을 지키고 어떠한 환경과 처지 속에서도 소망과 기쁨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내개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상황에서 자족할 수 있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는 말입니다.
관찰질문 1. 사도 바울은 물질주의의 위험이 무엇인지, 그 유혹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권면합니까?
관찰질문 2. 사도 바울의 재물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권면합니까?
9.초대교회의 재물관(행 4:32)
초대교회의 재물관의 특징은 ‘자발적 이웃 사랑의 차원의 구제’ 였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모든 소유와 재산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자발적인 행위이지 강압적인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당시의 성도들이 모두 재산을 다 팔았던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가 생길 때마다 그 소유를 팔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재물관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일까요? 초대교회의 재물관을 오늘날 어디까지 적용해야 할까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사회주의적 재산공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은 물질의 공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사랑에 입각해서 물질이 없어서 고생하는 자들에게 물질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박형용 교수는 초대교회 당시에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본문을(행 2:44-45, 4:32-37)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왕국의 권능으로 생활하는 기쁨, 그리고 필요에 처한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 간에 교제의 정신이 너무나 팽배했기 때문에 그들은 재산과 물건을 주 안에서 통용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모든 소유가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따라 물건을 자유스럽게 분배했습니다. 이는 자발적이고 자유스러운 행위였지,
지도자들의 요구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재산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령으로 하나 되는 탁월한 일체감이
유지될 때만 가능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그들의 집과 직업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이사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최초의 기독교회 내에는 물질이 필요했으며 이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 성도들은 그들이 소유한 물건을 나누어 쓰게 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감동적인 특징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며,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나누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5절입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도행전 4장 34, 35절입니다. “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이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평가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범하는 두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사건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날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구체적으로 따라야 할 모델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당시의 독특한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당시에 유월절 기간에는 약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것입니다. 이 도시는 사람으로 터져 나갈 듯이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돌아온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은혜를 사모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사회적 경제적 추방과 정통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하고, 심한 경우에는 신앙 때문에 호적을 파야 했습니다.
그들이 경영하는 사업을 정리해야 했고, 가족 간의 관계는 가슴 아프게 헤어져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이 집을 잃고 직장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독특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비상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돈과 소유에 대한 태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시대를 초월하여 좋은 모델이 됩니다.
2세기의 교회 지도자 저스틴 마터는 “전에는 돈과 소유를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던 우리들이 이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공동 금고에 모아 누구든지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본문을 근거로 초대 교회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밭과 집을 팔았습니다.
사도행전 4장 34절입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값을 가져다가.”
그것은 또한 자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헬라 출신과 히브리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음식 분배의 불공정성을 이유로 서로 다투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절입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사도행전 6장의‘식료품의 무료배급을 받는 빈민들의 줄’은 교회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니고, 새로 시작하는 교회에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당시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있어서 효율적인 운영이 필요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 2-4절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결론적으로 초대교회의 재물관을 사회주의의 모델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나누었던
초대교회의 모범을 무시하는 것은 역시 지향해야 합니다.
관찰질문 1. 초대교회 재물관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관찰질문 2. 초대교회의 재물관을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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