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왜 죄를 짓지 말아야 할까요? 구원은 믿음으로 단번에 받되 주님의 형상을 닮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만 됩니다. 마귀는 죄의 유혹을 갖고 성결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이란 일평생 죄와 죄를 짓게 하는 마귀와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죄는 불법이요 형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가차 없이 형벌이 다가왔습니다. 아담은 죄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죄를 짓고도 평안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죄의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서 아담과 하와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 그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수치를 느꼈습니다. 그동안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벌거벗은 수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광채와 영광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자마자 영광이 떠나가 버리자 순식간에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들은 빨리 무화과나무를 엮어서 앞치마를 해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 3: 10절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다정하게 지내던 그들이 죄를 짓자마자 벌거벗은 수치를 피할 수가 없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반갑고 즐겁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소망차고 기뻤는데 죄를 짓자 하나님이 두려워지고 무서워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숨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당장 그들 생활 속에 수고와 가난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 3:17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저주는 수고와 고생의 삶을 가져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말할 수 없이 수고롭고 고생스러운 것은 저주의 결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자 하나님은 가차 없이 그 죄의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육체적인 죽음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질병과 노쇠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즐겁게 지내며 죽음이란 그림자도 없던 그들에게 갑자기 죽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들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을 때 그 비극적인 심정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 것입니다. 죄의 값은 죽음으로써 보응이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는 우리 육신의 옷을 벗기지는 않지만 양심을 벌거벗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벌거벗게 되면 마음에 고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양심이 벌거벗어서 마음에 개인적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번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 32:3에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입을 열어 죄를 고백하기 전에는 종일 마음에 고통이 있어 뼈가 쇠하여질 지경이 되었다 하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많은 육신의 병이 다가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양심에 고통으로 뼈가 쇠하여질 정도니까 오장육부가 성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 고침 받기 위해서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 3: 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죄는 반드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죄가 들어왔는데 평안할 리가 없습니다. 용서와 의가 들어오면 평안하지만은 죄는 마음에 불안, 초조, 절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는 것은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렘45:3,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죄의 탄식이 있는데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행복의 가장 조건이 평안입니다. 돈 많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권력 많다고 행복하지 안구요.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자동차 타고, 좋은 옷 입고 산다고 평안하지 않습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죄를 지은 사람은 바깥의 문풍지 소리만 나도 간이 덜컹 내려앉는 것입니다. 다리를 펴고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전화벨만 울려도 간이 덜컹 내려앉는 것입니다. 언제 내 죄가 폭로되고 내가 사정당국에 조사를 받고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가운데 떨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4: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죄의 결과로 형벌을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늘 두려워하지 죄가 없고 하나님이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으면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값인 저주와 질병이 떠나지를 않지요. 죄가 들어오면 언제나 우리의 삶에 저주가 다가오고 우리의 삶속에 질병이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시107:10~12,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죄를 짓고 반역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스럽게 살도록 내버려 놓으면 그 영혼은 영원이 버림받을 수밖에 없지요. 죄의 대가를 받고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워지면 통회하고 자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고통을 가져오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안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삶을 가시방석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롭기 때문에 복음을 듣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죄는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해야 우리가 축복을 받고 행복하지요. 가정에 부모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자녀들이 다 평안하게 자라고 가정에 행복이 넘치지요. 부모의 마음속에 슬픔 있으면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고 자녀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상처를 입히는 것이 죄입니다. 누가 우리를 가장 사랑합니까? 부모, 형제도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니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하나님이 우리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몸 찢고 피 흘려 대가를 지불하고 값 주고 사셨으니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하나님 앞에 눈동자와 같이 귀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눈동자에 상처를 입히고 마음에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사랑은 배신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치 않으신다면 우리에 대하여 무관심 할 수밖에 없지요. 내가 뭡니까? ‘60억 인구 중에 한사람인데 내가 잘했다고 뭐 하나님이 기뻐 할 것이 있으며 내가 죄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슨 상처를 입겠는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내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든 하나님이 내던져 버리고 무관심할 것 아닌 것입니까?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 거수 일 투족에 대해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사 1:2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 말씀을 순종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집안에 일찍이 들어오고 착하게 살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기뻐하는 것입니까? 자식이 잘된다고 해서 당장 부모에게 무슨 큰 이득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공부도 안하고 깡패하고 돌아다니고 폭력배에 속하게 되고 게임이나 하고 돌아다니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입습니까? 부모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 부모가 고통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근심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창 6:5~7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한탄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고해도 듣지 아니하고 채찍을 때려도 대답하지 아니하고 방탕의 길로 달려갈 때 오죽해야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은 인생을 파멸하시고 지상에서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 관심이 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째왕인 사울은 하나님이 택해서 임금으로 삼았지만 사울 왕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 중심으로 살 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삼상 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 이니라 하신지라."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시면 내게 올 자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 아무도 알려지지 않은 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리지 않고는 예수께로 올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시고 보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께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자녀를 많이 길러 보십시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의 사랑을 짓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고난 받아 죄를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주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 공로 없는 우리들에게 평생에 죄를 다 사하시고 용서와 의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로 받고 주님 안에서 우리 사는데 자꾸 죄를 지으면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짊어진 것을 탄식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짓밟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상처위에 또 상처를 가하게 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죄에 끌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배신하면 얼마나 괴로운 것입니까? 죄는 마귀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지 주님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를 사죄해서 주님을 거역하도록 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을 따라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마귀는 춤을 추고, 손바닥을 치고 잘한다고 발을 동동 구룹니다만 그만큼 예수님은 마음에 고통을 당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마다 당신의 못자국난 손을 들여다 보고 옆구리를 만져 봅니다. ‘내가 과연 쟤를 위해서 못 박히고 창을 받았는데 이것이 효과가 있는가. 너무나 나의 고통을 무용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주님이 탄식할 것입니다.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주님께서 우리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성찬 때 살을 찢어서 우리를 주시고 피를 흘려서 마시게 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고 영혼이 구원받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 하라. 천국까지 올라오라고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우리에게 살을 찢어주고 피를 흘려 주신분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이외에 그런 사랑을 베푼 이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짓밟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죄를 거부하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호한 마음으로 죄와 싸워서 죄를 물리쳐야 합니다. 우유부단하여 좌로 우로 치우치면 안됩니다.
요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엘리야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멜 산에 다 모아놓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 아세라의 선지자들을 다 모아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왕상 18:21에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고후 6:15~16,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두리 뭉실하게 섞어서 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도 모시고 살고, 마귀하고도 함께 평화롭게 지내고. 의도 행하고 죄도 행하고 거룩도 행하고 불법도 행하면서 그저 세상을 둥글둥글하게 살아야 된다. 너처럼 그렇게 모나게 살아서 되느냐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 많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보고 이래도 욕을 하고 저래도 욕을 합니다. 세상과 타협해서 두리 뭉실하게 살면 “저것도 예수 믿는다고 가짜다.” 나이롱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독하게 주님을 따르면 미쳤다고 저것 완전히 미쳤어. 세상에 살지 못할 사람이라고 이래도 욕을 하고 저래도 욕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욕을 하더라도 예수님이 칭찬하고 인정해 주시면 우리는 그 길을 택해야 합니다. 마귀에게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종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마귀가 주인이 되던 예수님이 주인이 되던 어느 주인이든지 주인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를 주인으로 섬기면 죄의 종이 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롬 6: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의 종이 되면 지옥에 가고 의의 종이 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롬 6:19절,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육체의 정욕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이상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했기 때문에 마귀와 귀신들이 매일같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이상 육체를 통한 육신의 정욕이 우리에게 항상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싸우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세상의 마귀와 귀신들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우리의 육체가 항상 가시노릇을 합니다.
롬 8:5~8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돈, 지위, 명예, 권세, 쾌락, 이생의 유혹 이 모든 것이 우리 육신을 따라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경성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한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과 말씀에 서서 끊임없이 마귀와 귀신과 세상과 육체의 유혹을 대적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가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롬 8: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았고, 끊임없이 해방되고 있는 이유는 성령이 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이 우리를 괴롭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가운데서 성령으로 해방을 얻었습니다. 마귀를 바라보지 말고 성령을 바라보고 귀신을 바라보지 말고 성령을 바라보고 육신의 정욕을 바라보지 말고, 나와 함께 계신 성령을 바라보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성령이 능력 주는 자로써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롬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연약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연약하지 않은 자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스로 죄악을 이기고 스스로 거룩하고 성결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유혹을 받고 있는데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원수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이기게 하시는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성령이 보내 주셨기 때문에 우리보고 깨끗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못하지만 성령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깨끗하게 살게 됩니다. 00그러므로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항상 성령이 같이 계신 것을 의식하십시오. 성령께 기대십시오. 성령께 손을 내미십시오. 성령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 없이는 우리가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 없이 우리가 거룩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보혈과 성령의 도우심은 끊임없이 우리가 추구해야 되고 의지해야 될 것입니다.
결론
죄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부패하게 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합니다.
요일 3:7~8절,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단번에 믿음으로 용서와 의롭다함을 얻은 우리들은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매일매일 싸워서 육체의 정욕과 마귀를 이기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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