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지나가면 다시 붙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나가기 전에 붙잡아야 합니다.
지나간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을 때 받아야 합니다.
은혜의 때를 놓치면 후회합니다. 축복의 기회도 그렇습니다. 또한 헌신과 충성의 기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잃어버린, 아니 빼앗기고 긴 후회의 삶을 살게 되는 장면입니다. 한 때, 겸손하였던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어느새 교만의 배가 불러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사를 핑계로 하나님이 멸하라고 하신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승리한 후엔 자기 승전기념비를 세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울에게 주셨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결국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그는 악령에 사로잡혀 남은 일생을 불행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선용하지 못함으로 빼앗긴 것입니다.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났습니다. 사울에게 가장 나쁜 상황이 임한 것입니다. 그의 본래의 성품은 소심하고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사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예언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으로 감동된 사울이 암몬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탄식을 듣고
의분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암몬 사람들을 전멸시키던 강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이렇게 강하고 당당하던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였습니다.
여기서 ‘번뇌케 한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바아트’는 “두렵게 하다” “공포를 느끼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18장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건은 사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사울의 인생은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기는 가난이 아닙니다. 사업에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기는 하나님의 신이 떠나는 것입니다. 영적 빈곤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항상 머물러 계시고, 성령이 인도함을 받으며 살 때,
삶의 희망이 보이고 능력도 나타나고 간증거리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으며 살 때,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
14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권세에 대적하던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났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악신이 그에게 임하여 한없이 부끄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집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였다고 했습니다.
사울을 번뇌케 한 악신을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본래 사탄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도록 지어진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천사 루시퍼는 하나님 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하나님께 반역하였다가(겔 28:12-15, 사 14:13-14)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사탄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세상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할지라도 결국 그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능력 외에 전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당신의 권세에 대적하는 사탄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탄을 사용하십니까? 우선 성도들을 정결케 하시는데 사용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에게는 한 가지 육체의 가시가 있었는데, 그것을 위해 여러 번 간구했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바울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사단의 사자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사탄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종들을 정결케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욥에게도 똑같은 방법을 통해 그의 믿음을 단련하시고 결국에는 그의 삶을 정금같이 빛나게 하셨습니다.
결국 아무리 발악을 할지라도 사탄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도구로 사용될 뿐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왜 사울에게 악신을 보내셔서 그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고, 정신착란에 빠져서 자신의 충복이며, 동시에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포악한 사람이 되게 하셨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어떤 유익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 때문입니다. 다윗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사울이 정신착란에 빠질 때를 위해 수금을 잘 타는 다윗을 왕궁에 들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이 떠난 후에 변해버린 사울이 모습을 다윗으로 목격하게 하심으로 다윗에게
무언의 경고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는 다윗에게 “너도 내가 떠나면 저렇게 될 수 있다”라고 하나님은 조용히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51장을 지어 부르면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면서 11절에 보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기도가 나왔습니까? 사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하나님이 보내신 악신이 역사할 때마다 비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사울을 보면서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떠난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왕이든, 그가 목사이든, 그가 장로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부자였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것 우리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절대로 자고하지 맙시다.
교만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내 생명도 헛됩니다. 내가 누리는 영광도 헛됩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내가 지금 쥐고 있는 것, 자랑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 다윗으로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이제 다함께 23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하나님의 신이 떠난 후에 두려움과 고통에 신음하는 사울을 보다 못한 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불러서 연주하게 함으로 사울 왕의 마음을 위로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추천되어 사울 왕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한 다윗은 한 눈에 보기에 참으로 준수한 소년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자마자 자신의 부관으로 삼고, 악령과 싸울 때마다 수금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왜 왕궁에 부르셨을까요? 사울 왕을 왜 만나게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습니다. 왕궁에서 사울 왕을 섬기면서 국정을 배우고, 전쟁을 배우고, 정치를 배우게 하려는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왕이 몰락하는 왕을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13절과 14절 사이를 보십시오. 이 두절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은혜가
있는지 모릅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한 다윗으로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을 돌보게 하시는 것은,
사울을 위협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사울을 향한 사랑을 놓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 심판을 받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몸과 살을 찢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대속의 은혜로 인하여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생의 길, 축복의 길, 행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인생들인데도 버리지 않고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한 것입니다.
다윗을 불러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신 그 은혜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엄청난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다윗을 부르신 하나님을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은혜주시고 구원하신 것은 우리들만의 축복으로 간직하고 기뻐할 일이 아니라 구원받고 능력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사울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두려움에 빠진 사울 왕,
이제 그에게는 희망도 없고, 삶의 자신감도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절망과 한숨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를 위로할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베드로전서 2장 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윗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로 타락한 사울을 섬기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타락한 세상을 섬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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