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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R.C 스프로울

by liefd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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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정 : 구원은 예정되어 있는가?

예정은 성경에 명백하게 제시된 교리다(1:4-5, 11, 8:29)

너는 네가 성경이 진리라고 말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을 믿고,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개혁주의의 견해 반대견해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알미니우스
마르틴 루터 필립 멜란히톤
존 칼빈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2.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과 악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예정론은 우리의 궁극적 운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영원 전 곧 우리가 생존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멸망에 버려두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셔서 구원받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축복에 이르도록 하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죄의 결괴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도록 버려두기로 하셨다.

 

\하나님이 작정하실 때, 우리에 관해 미리 알고 계시는 지식을 고려하는가?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개혁주의인지 아닌지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에 대한 것이다.

사탄은 확실히 악하지만 그의 악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장차 될 일을 미리 정하셨다는 사실은 주권의 필연적 결과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허락하셨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분이 미리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의 주권자가 되신다는 말이다.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의 서두,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그분의 마음의 원대로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뜻을 따라 자유롭게, 장차 될 일을 불변하게 정하셨다. 그렇다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자가 되는 것도 아니요, 또한 자유나 둘째 원인의 가능성이 제거된 것도 아니요, 오히려 확립되었다.

 

하나님이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에 죄가 들어올 것을 미리 정하셨음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죄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이 결정이 선한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선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악한 죄를 범하도록 허용하신 것 자체가 선한 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범하도록 허용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면 애당초 왜 창조하셨다는 반발을 자주 듣는다. 우리가 죄를 범할 것을 알고도 그것을 막으실 수 없었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도 않으며 주권자도 아니시다. 또 우리가 범죄하는 것을 중지시킬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사랑이 많은 분도, 자비로운 분도 아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긍휼을 입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공의로운 대우를 받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공의를 받았고, 어떤 사람들은 긍휼을 입었다. 어떤 사람이 긍휼을 입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긍휼을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두 가지 유추로 설명할 수 있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영원에서 만나는 평행선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우물 속에 있는 밧줄들과 같은 것이다. 밖에서는 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두운 우물 바닥에서는 하나로 합쳐져 있다.

 

자유의지 : 예정은 자유의지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가장 일반적인 정의에는 자유의지란 사전의 편견이나 성향, 기질없이 선택하는 능력일 것이다. 이 정의 안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강제의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숨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평가하실 때 우리의 동기에 관심을 가지신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을 때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하고 있었다. 50:20절에 보면 동기가 그 행위의 선악을 판정하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요셉이 처한 곤경에서 하나님의 간섭은 선하지만 형들의 간섭은 악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의지를 선택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내 성향과 동기는 실제 내 선택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을 통해 형성된다.

자유의지의 두 번째 정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데 자유로울 뿐 아니라 적어도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원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욕망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스도인은 범죄하려는 욕망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는 욕망을 강화하면서 성장한다. 성경은 우리가 욕망에 따라 선택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의로운 욕심은 의로운 선택을 낳으며 악한 욕망은 악한 선택을 낳는다.

 

에드워즈는 선천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구분했다. 선천적 능력이란 자연적 인간으로서 부여받은 능력들과 관계가 있다. 에드워즈는 죄와 관련된 인간의 문제가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나 그 결핍에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를 선택하려는 소원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소원은 인간이 내부에 이미 가지고 있거나,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지만 자유가 없다고 설명하면서 문제에 접근한다. 타락한 인간이라 해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욕망들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마음대로 의를 선택할 수 있는 당당한 자유가 없다. 타락한 인간은 심각한 도덕적 속박상태에 놓여 있다. 그 속박의 상태를 원죄라고 부른다.

 

원죄의 개념과 범위에 대해서는 전혀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 원죄가 아닌 것을 설명하는 데서부터 출발해 보자.

원죄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의 결과를 가리킨다.

원죄란 어떤 특정한 죄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죄의 상태이다. 원죄란 구체적인 죄악 행위가 흘러나오는 죄의 본성을 가리킨다.

 

개혁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따른다. 타락 전 아담의 상태와 타락 후 아담의 상태를 상세히 설명한다. 타락 전에 아담은 두 가지 가능성을 부여 받았다. 즉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무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도덕적 무능이 원죄의 본질이다. 타락 후에 인간은 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 눙력을 상실했다. 거듭난 인간도 죄를 범할 수 있다.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거듭 날 때 회복되며 하늘나라에서도 계속된다.

 

타락 전에는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타락 후에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원죄다. 이러한 도덕적 무능력은 영적으로 거듭나야 극복된다. 거듭난 사람도 여전히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러한 능력은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영화롭게 되기 전에는 제거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죄를 범할 능력이 있으나 더 이상 원죄의 속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해방되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그리스도에게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을 마시려면 물속에서 바가지를 넣어 퍼 올려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려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일이 필요하다. 예정에 대한 개혁주의의 견해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기 전에 그의 마음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거듭나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핵심은 중생이 믿음보다 앞선다는 명제다. 우리의 본성이 매우 부패하고 죄의 능력이 매우 강하므로 하나님이 우리 영혼 속에서 초저연적으로 역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못한다.

 

개혁주의자와 비개혁주의자 모두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으리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누가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견해가 다르다.

 

타락한 인간은 육신이다(8:7-8). 그러면 육신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육신에 있는 자들과 육신에 있지 않은 자들을 구분해 주는 것은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지 않는다. 육신에 있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다. 먼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다.

타락 : 아담의 타락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어지는가?

 

우리가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죄 가운데서 도덕적 무능의 상태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원죄란 첫 번째 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죄의 결과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성경은 죄와 사망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다고 거듭 말한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이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아담의 타락과 인류의 관계를 설명해 보려는 세 가지 이론이 있다.

첫째, 타락신화론은 역사적 또는 실제적 타락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아담과 하와는 인간 타락의 문제를 설명하거나 묘사하기 위해 등장된 신화적 상징이라는 뜻이다.

 

둘째, 타락실재론은 우리 모두가 타락을 기억하고 있을만큼 오래 살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거기에 실재로 있었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핵심개념은 다른 사람이 범한 죄에 우리가 도덕적으로 책임을 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타락실재론의 견해는 인간영혼의 선재개념을 요구한다.

 

타락연합론(대표론)은 예정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 견해는 아담이 온 인류의 대표자로 행동했다고 가르친디. 연합이라는 개념의 핵심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범죄했다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은 우리의 타락이었다. 인간이 범죄했을 때 그 죄는 인간이 지배하는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8:20-22, 12, 15, 18, 19).

나는 타락한 피조물이다. 내가 죄인된 것이 하나님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은 내 죄에서 나를 구속하셨다.

 

절대예정론, 제롬 짱키우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사건들은 마치 거대한 미로, 그러나 게획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과도 같다. 그 중대한 원인들의 연결고리 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맨 첫 번째 연결부이며, 그의 변할 수 없는 작정이 두 번째, 그리고 전적으로 능동적인 그의 섭리가 세 번째 고리가 된다.

 

하나님의 의지

죄를 허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향인 것이다. 허락하심, 막지 않으심은 확실히 하나님의 의지의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감추인 것과 드러낸 것으로 정당하게 구별된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 자손을 놓아 보내야만 했던 것,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쳐야만 했던 것,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해서는 안되었던 것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드러난 의지였다. 이에 비하여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가도록 해서는 안되는 것(4:21),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서는 안되었던 것(22:120, 베드로가 자기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되었던 것(26;34) 등은 바로 하나님의 감추인 의지였던 것이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46;10, 33:11, 23:13-14, 1:11). 홉니와 비느하스가 자신들의 사악함을 꾸짖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들을 죽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며(삼상 2:25), 헤스본 왕 시혼이 모세가 사자를 보내 평화의 말로 이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기 때문이다(2:26,30).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의 눈은 감기시고, 또 어떤 이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시는 일들이 전에도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게 될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6:9, 12:39-40).

 

만일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거나 그 작정하신 바를 준행하지 않을 경우, 그 잘못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있게 된다.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주입해 넣으신 그 어떤 악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갖는 악과 그들 자신의 의지가 갖는 사악함으로 인한 부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가롯 유다는 비록 그의 배반과 사악함이 하나님의 작정과 말씀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불성실하고 사악하게 배반한 것에 대해 마땅한 처벌을 받는다.

비밀한 일들은 하나님께 속하고 나타난 일들은 우리에게 속한다.

피조물의 어떠한 자유의지도 하나님의 의지를 저항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위해 그의 아들을 주셨다.

부처는 그의 저서 모든 곳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택하신 자들만을 위하여 제한적으로, 그러나 그들을 위하여는 보편적으로 죽으셨다.

하나님의 의지는 확실하고 불변하며,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를 다스리신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성

하나님 자신은 본질적으로 불변하신다(3:6, 1:17, 102:27).

하나님은 그의 목적과 약속들에 있어 절대적으로 불변하시다(23;19, 삼상 15:29, 24:14, 23:13, 11:29, 딤후2:13).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정에서는 결단코 이탈하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그래도 하나님의 선포에 있어서는 종종 변화를 주신다. 요나를 통한 니느웨 성읍의 멸망, 히스기야 왕의 죽음 선고.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은 가장 광대하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전능하시다(32:17, 19:26).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더욱 경건치 않게 나가도록 하시는 일이 종종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소극적으로는 저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되는 그 은혜를 주시지 않음으로 하신다. 2원인들은 버림받은 인간들의 완고한 본성이 지닌 타락함과 만나고 협력하여 활동함으로써 죄가 되는 결과를 낳는다(삼하 16;10, 대상 2:1, 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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