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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지성소 기도

by liefd 2024.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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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기도의 응답은 소양감 댐처럼 댐의 물이 가득 찰 때까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돠면 댐의 물은 큰 낙차를 그리며 발전기를 돌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진행형입니다.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차라리 10분을 기도하는 편이 훨씬 낫다(찰스 스펄젼)

죠지 물러는 "기도할 때 기도의 시간 보다, 기도 끝나고 난 다음의 15분 후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끝나고 15분쯤 지나면 다시 주변 환경이 더 크게 보이며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고라 자손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받을 때에 그들은 기도의 상황에 도전했습니다(42;5). 전천후적인 신앙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상황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밤낮으로 더욱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입니다(42:5).

 

* 인간의 생각과 사상 속에는 하나님의 개입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 전전후적인 신앙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상황을 이기는 사람이다. 위기 때에도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이다.

 

* 이제 그만 육체의 소욕을 거절하고 성령을 따르기로 결단하자.

 

* 하나님은 지금 큰 부흥의 불을 지필 기도의 불씨를 사방에서 모으고 계시다. 어둠의 시대이지만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지성소로 나아갈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요엘서는 죄악에 대한 참담한 심판이 임할 "여호와의 날"에 가장 충격적인 오순절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 하나님이 이 땅에 기도의 영을 부으신 것은 산제사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 하나님께서는 극한 어둠 가운데서도 그분을 찾는 자를 찾으신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죄악 중에서도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다.

 

*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제일 먼저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난다.

 

* 영적인 큰 부흥이 있기 전에는 항상 극심한 타락이 있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36:37-38)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때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기도없이 어떤 일이 성취되는 것은 불행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확신이 없는 성취는 그 자아에 자신의 의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성취되어야 하나님이 행하신 줄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후 3시 저녁 소제 드릴 때에 드려졌던 엘리야의 기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그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루 세 번 기도했던 다니엘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도 전 이스라엘 전체의 기도 타임에 동승했습니다. 결국 공공체 기도가 바벨론의 우상세력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도 계속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33).

기도 시간에 눈물을 보인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모습의 절박한 상황에 처한 많은 이웃들이 중보자를 찾고 있다. 우리가 고난당하는 지체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또 해야 할 한 가지 태도는 중보하는 것뿐이다.

 

* 중보의 싸움은 이미 승리를 담보해 놓은 싸움이다. 이기게 되어 있는 게임에서 이길 때까지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승리의 노하우다.

 

* 하나님이 역시 이 시대를 위해 중보할 기도의 사람을 간절히 찾고 계시다.

 

*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일을 이루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원하신다.

 

* 복의 근원, 복의 통로는 우리가 누릴 가장 큰 복된 영광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다.

 

*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영적예배는 중보기도와도 통한다. 기도 자체가 본질적으로 예배이기 때문이다(5:8).

 

* 역사적으로 경력한 어둠의 세력이 덮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어두움을 뚫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신다.

 

* 지금 우리는 자신을 영적인 '산제물'로 바친 조상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 이 땅에서 삶을 송두리째 드릴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

 

*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산제사로 드려져야 한다.

 

'기독교는 기도교다'라는 정의가 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 여기서 간구란 중보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중보란 영어로 INTERCESSION이란 뜻입니다. 라틴어 어원을 따르면 "하나님과 죄인이 우리 사이에(INTER), 하나님께로 나아가서(CEDERE), 하나님께 짐을 맡기고(CEDERE), 하나님께로 좌로 옮기는 것(CEDERE)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와 공동체의 죄와 짐을 벗기는 것은 중보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믿음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 속에 믿음이 있고, 믿음 속에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붙드는 기도 밖에 없습니다.

 

* 십자가 앞으로 나와 공동체의 죄와 짐을 옮기는 것이 중보기도이다.

 

* 믿음을 보이려면 기도해야 한다. 내가 기도한 시간 만큼이 바로 내 믿음의 분량이다.

 

* 기도는 땅의 분향단과 하늘의 분향단이 연결되는 것이다.

 

* 하나님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씀을 붙들고 드리는 기도밖에 없다.

 

하나님 보좌에는 '사람, 송아지, 사자, 독수리, 이 네가지 생물이 있는데 이는 피조물의 대표 상징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24장로와 천서들도 보좌 옆에 있습니다.

 

분향의 기도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인도대로 살면 하나님이 받으실 향이 나옵니다. 따라서 기도의 향을 드리려 할 때 인간의 어떤 것도 섞여져서는 안된다. 염려의 소리, 소욕을 체우려는 소리, 탐욕의 소리, 인간 중심의 교만의 소리를 올리면 결국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성막은 우리의 신앙과 기도를 세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 단계는 성소의 뜰 기도-어린아이의 기도입니다.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자신이 원할 때만 달려가 칭얼대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소 기도-자기를 벗어난 중보기도입니다.

 

번제단이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는 것을 상징하는 피흘린 제단이라면, 분향단은 온전한 예배로 올려지는 중보의 자리라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지성소 기도-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기도입니다.

 

*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애굽에서 나와야 한다.

 

* 성경은 탈출과 목적지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하고 있다.

 

* 하나님과 만난 자리에서 비로서 우리는 사명적인 존재로 세워진다. 영적으로 구원받은 백성은 동시에 사명에 부름받은 자로 거듭나야 한다.

 

* 우리가 기도의 향을 피워 올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온 이방인까지 복을 받게 하신다.

 

*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집인 성소로 돌아와 영원히 함께 거하길 간잘히 원하신다.

 

* 우리는 자신만을 위한 기도에서 벗어나 기도의 지경을 넓혀야 한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이다.

 

*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면 영적통치권이 확대되어 나를 괴롭히던 열등감, 좌절감,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유의 기도자로 서게 된다.

 

*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삶 자체는 기도가 된다.

 

*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면 따로 구할 필요도 없이 그분이 내 필요를 채워주시는 관계가 된다.

 

구약 시대에 광야 행진을 하는 도중 수많은 과실들, 범죄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죄악들이 수시로 저질러졌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별로 제사장들은 수시로 성막에 들어와 짐승의 가죽을 불태웠습니다. 그때는 각을 뜬 짐승을 번제단에서 처음 태울 때 사람이 직접 불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번제단 위에 처음 태울 때 사람이 직접 불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번제단 위에 짐승의 고기를 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짐승을 태웠습니다(924). 모세가 성막을 완성하고 나서 8일이 지난 후에 불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한번 내린 불은 꺼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두 종류의 불을 허락하셨습니다.

 

첫째가 번제단의 불입니다. 이때의 불은 소멸의 불입니다.

 

둘째가 분향단에서 향을 태우는 불입니다. 이 불은 제사의 불, 예배의 불입니다.

 

하늘에서 직접 이 두 가지 불을 번제단으로 쏟으셨습니다. 번제단의 불은 제사가 없는 저녁과 인식일에도 피워져 있어야 합니다. 번제단의 불로 분향단의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임의로 불을 켜다가 죽은 것은 이 이유 때문입니다(10:1-2).

 

물두멍은 자범죄를 씻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전 뜰은 회개의 마당입니다. 분향단까지 와서 피워야 하는 향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45). 예수님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발을 씻기신 것은 그들의 삶을 분향단의 제사로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소는 네 개의 덮개로 덮여 있다(26:1-14).

첫째 덮개는 세마포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복음서에 표현된 인자, 하나님의 아들, , 왕의 오습을 성징합니다.

 

둘째 덮개는 염소털로 짠 것입니다. 이는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셋째 덮개는 수양의 가죽입니다. 이는 피흘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넷째 덮개는 해달의 가죽입니다. 이는 전능한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소는 우리를 위해 보혈로 덮고 덮은 긍휼의 장소입니다.

 

성소의 일곱 촛대는 예수님의 빛을 비추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세마포와 가죽을 네 곂으로 캄캄하게 덮인 성소에는 그 촛대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 빛의 조명으로 떡상에서 떡을 먹습니다.

이 떡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6:35, 48).

 

회개의 마당에서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풍성한 말씀을 내 마음에 애워 넣는 자리가 성소입니다.

분향단의 기름은 제일 좋은 것인 성령을 뜻합니다. 이렇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드리는 기도가 분향단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주님의 말씀을 내 심령 안에 가득 채워 넣어야 나옵니다.

 

분향단의 불은 24시간 지속되어야 한다.

이 향은 하루에 500g, 대속죄일에는 1.4kg, 그래서 지성소와 성소를 완전히 향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 향은 아침과 저녁으로 태워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는 아침과 저녁으로 태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24시간 이 향을 내는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은 "아침기도는 옆쇠요, 저녁기도는 자물쇠다. 아침에 드리는 기도는 새아침부터 헌신의 문을 열고, 밤에 드리는 기도는 내가 모든 것을 무장해체하고 잠들 때 나의 헌신된 삶을 지켜주는 자물쇠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의 불이 소멸하는 불이라면, 분향단의 불은 24시간 타올라야 할 헌신의 불입니다. 삶을 움직이는 능력의 불인 셈입니다.

 

번제단이 나의 죄를 태우는 구원의 문이라면, 분향단은 내 형제와 민족을 위해 기도의 향을 올리는 중보의 문입니다. 번제단의 불이 나를 위한 속죄의 의미를 갖는다면, 분향단의 향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위한 헌신의 불입니다(30:37-38).

 

번제단이 구원의 시작이라면, 분향단은 구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제단이 성령의 인침이라면, 분향단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번제단이 칭의를 받는 길이라면, 분향단은 영화의 자리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온전한 하나님의 뜻만이 운행하는 곳입니다. 그 자리는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온전한 연합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세상을 다스리는 자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어명입니다.

 

뜰에서 지성소까지는 신앙 성숙의 좌표입니다. 성소뜰은 어린아이의 자리이고, 성소는 장성한 자의 자리이며, 지성소는 완전한 자의 자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자신의 뜻을 꺽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나의 엣적 자아와 아전투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성과 싸움에 나의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죄는 자기 고집, 자기 주장, 자기 사욕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육적자아입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으로의 중심이동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의지를 '그러나"로 뒤집은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모든 기도에는 내 뜻이 꺾이는 분기점이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 '그러나"가 가득차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그러나'의 순종이 있는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라인올드 니버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바뀌어질 수 없는 것을 평안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소서. 바뀌어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 바뀌어질 수 없는 것과 바뀌어야만 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겟세마네의 기도는 주님을 위대한 순종의 길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전에는 환경을 통해 필요를 채우려 했지만, 충만함 속에서 들어간 뒤로는 자신이 환경을 바구는 자가 됩니다.

온전한 향이 되신 순종으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권세를 가지시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 필요를 위해서 몸부림치기 전에 그분의 흠향할 향을 올려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의도까지도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체질까지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사상까지도 아신다.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인격이시기에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면 엄청난 창조적 파워가 생겨 납니다.

하나님은 성전인 우리 몸이 삶의 분향이 되길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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