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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사도행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

by liefd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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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연구

 

1. 복음을 따라서

 

지역적 구조에 따라 간략하게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서론(1:1-26)

2. 예루살렘에서 복음전파(2:1-7:60)

3. 유대, 사마리아, 팔레스틴에서의 복음전파(8:1-12:25)

4. 터키 지역에서 복음전파(13:11-15:35)

5. 그리스 지역에서의 복음전파(15:36-21:26)

6. 로마에서의 복음전파(21:27-28:31)

 

2. 사도행전을 엮는 몇 가지 주제들

 

1. 예루살렘 중심성

사도행전의 서두에서 나타난다(1:4). 복음전파는 예루살렘 교회의 폭발적 성장을 통해 나타난다. 사마리아에 전파된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음. 1차 전도를 마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방전도에 관한 그들의 입장을 공의회 앞에서 공인받게 된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역에 많은 분량의 지면을 할애함(21-26).

 

2. 선교를 주도하는 성령님의 사역

성령님의 오심에 대한 예언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전도(1-7)

사마리아와 유대 전도를 주도하신 성령님(8-10)

땅 끝 전도의 사역을 주도하신 성령님(13:2, 4)

유럽 전도의 사역을 주도하신 성령님(16:6-19:20)

예루살렘으로 경유하여 로마로 가는 것을 주도하신 성령님(20-27)

 

3.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전도

안디옥 교회의 성장의 근원에는 보음이 유대인과 이방에게 차별없이 전해졌던 비밀이 있었다. 고린도, 에베소 사역을 하면서 바울은 아마도 안디옥 교회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교회를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후 먼저 복음을 전한다. 다음 전략으로 이방인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한다. 선교에 있어서 헬라파 유대인의 역할을 강조한다(11:19-21)

 

4. 복음이 거침없는 전진

베드로와 요한의 기탄없는 증거(2-4), 교회의 내외적 문제에도 굴하지 않은 교회의 성장(5-7). 박수 엘리마의 해와 복음의 전진(13:6-12). 예루살렘에서 매인 것이 복이 됨. 로마로 향한 길과 2년 동안 로마에서의 거침없는 복음 전진

 

3. 설교자를 위한 사도행전 읽기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확산하고, 복음을 증거하시는 일이다.

성령의 능력은 고난을 당하는 능력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는 능력이다. 물론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즉 성령이 임하심으로 받은 능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복음 증거의 사역을 포기하지 않는 능력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4. 설교자를 위한 사도행전의 성령이해

 

성령이 구원의 역사를 주도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하나 되게 하신다.

성령세례는 구원사의 전환점인 동시에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1:6) 메시야의 표징으로서 새 이스라엘의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성령 충만은 성령에 사로잡혀 성령에 지배당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5. 사도회의와 바울의 로마 시민권 문제

 

사도회의의 역사적 의의

이방인들을 향한 이러한 힘찬 전진은 초대교회에 하나의 해석학적 문제를 제기했다. 율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방인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과 그들이 율법을 필수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15:1, 2:4).

사도행전 15:1-2에서 추론할 수 있는 문제의 발단은 할례 없는 구원은 없다는 주장 때문이다.

사도회의의 결론적인 입장은 사도행전 15:22-29절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방인들에게 하례를 부과하지 않는 대신 유대교의 전통적인 의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손대지 않는 선에서 그들의 타협책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시민권

그의 로마 시민권은 바울의 재판 기능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켄시퍼는 고린도전서 9:19-23을 인용하면서 법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로마 시민이며, 다소의 시민이고, 유대인이다.

뤼데만의 결론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였으며, 그의 바울이란 이름은 그의 출신이 상류 계층이었음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로마 시민권은 복음전파를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 본문연구

 

1.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1)

 

예수님은 때와 기한 대신에 제자들이 해야 할 사명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했다.

예루살렘(1-7)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8-12), 땅 끝(13-28)이다.

 

첫째,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살전 1:10, 4:16, 3:20).

둘째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사실이다(24:30, 26:64, 13:26, 14:61, 1:7 ).

셋째, 예수님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오신다(1:7, 24:30, 26:64 ).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은 초자연적이고, 공개적며, 범세계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2. 오순절 성령 강림과 베드로의 기독론적 설교(2)

 

베드로가 인용한 구약 본문들은 첫째, 사도행전 2:17-21에서의 요엘 3:1-5,

둘째, 사도행전 2:34-35에서의 시편 15:8-11,

그리고 셋째, 사도행전 2:34-35에서의 시편 109:1

 

3.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모습

 

사도행전 3-4장은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전 중심, 기도의 중요성

초대교회에 나타난 설교

예수에 대한 이해, 부활에 대한 강조, 핍박의 필연성, 공동채로의 복귀, 경제 공동체, 부흥의 과정

 

4. 복음의 거침없는 전진(사도행전 4:32-5:42)

 

사도들의 발아래 둔다는 것은 사도들이 자유롭게 드려진 재물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은 바르지 못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사단이 마음에 가득한 행동이란 시기와 질투, 그리고 교회에서 높아지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사도행전 15:12-16은 아나니아 사건 이후에 교회가 거침없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보여준다.

 

5. 순교자 스데반과 그의 설교(사도행전 6-7)

 

1.역사 설명(7:2-50)

사도행전 6-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세계로 나아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유대인으로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활약을 한다.

 

초대교회가 일꾼을 바르게 세웠을 때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다.

첫째, 말씀이 왕성하게 되었다. 둘째,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다. 셋째, 세상이 항복하게 되었다.

 

스데반의 설교(7:1-53)에서 이스라엘 역사 설명은 전체적으로 유대인의 완악함의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모으고 있다. 그의 설교는 요셉, 모세, 성막/성전(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에 집중된다.

 

아브라함(2-8)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성소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에 지나지 않는다. 성소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

 

요셉(9-16)

스데반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그의 형제들에게 관심을 보인다. 스데반이 요셉의 형제들에게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완악성이다. 스데반은 요셉 형들의 사악함과 요셉의 의로움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스데반은 자기 시대의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의로운 사람을 핍박하는 악한 자들이었음을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첫째,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

둘째, 하나님께서 요셉을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셨다.

셋째,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셨다.

넷째,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과 바로의 온 집을 위한 치리자로 세우셨다.

 

모세(17-43)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시기가 다가왔을 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번성하게 된 것이며,

둘째, 애굽에 새로운 왕이 통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 현상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모세의 둘째 사십 년 기간에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고 항의를 받았던 모세는 셋째 기간에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관리와 속량하는 자가 되었다(30-35)

 

성막, 성전(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44-50)

변론자들은 스데반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6:13)라고 고소하였고, 스데반이 믿는 나사렛 예수도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6:14)고 말한 것으로 제소하였다.

 

그래서 스데반은 성막/성전에 관련된 네 인물을 열거한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가 본 양식대로(44) 증거의 장막을 만들었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 장막을 가지고 들어갔으며, 다윗은 성전을 지을 것을 간구했고, 결국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였다.

 

여기에서 스데반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첫째, 성막/성전의 발전상이다.

 

스데반은 성막과 성전을 구분한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성막에 관련되어 있다면(44-45), 다윗과 솔로몬은 성전에 관련되어 있다(46-47).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 가변적인 것을 의미한다.

 

둘째, 스데반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성막/성전을 만들게 된 동기이다.

 

성막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이 본 그 양식대로 만든 것이다. 성전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모세와 여호수아의 성막은 계시의 산물이며,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은 기도의 선물이다. 성막이든지, 성전이든지 그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막을 계시하시고 성전을 선물하신 하나님께서 성막과 성전에 매일 수 없다.

 

셋째, 스데반이 증거하려고 하는 것은 성막/성전의 인간성이다.

 

성막은 모세가 만들고 여호수아가 옮겼으며, 성전은 다윗의 준비 후에 솔로몬이 지었다. 그리므로 성막/성전은 사람의 작품이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성막/성전에 제한받으실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아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명확하게 증거하였다(49-50, 66:1-2). 바로 이런 여러 가지 이유에서 스데반은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 하신다(48)고 결론짓게 된 것이다.

 

2. 현실적용(7:51-53)

스데반은 유대인을 향하여 대단히 가혹한 호칭을 사용하였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스데반이 유대인을 이렇게 규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유대인들은 항상 성령을 거스르기 때문이며, 둘째, 조상과 똑 같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먼저 유대인들이 그 조상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핍박과 살해라는 카테고리로 설명한다. 핍박에 관하여는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52). 살해에 관하여는 의인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자를 죽였다(52).

 

스데반은 항상 성령을 거스리는 유대인의 모습을 두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유대인들은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에게 넘겨주어 죽이게 하였다. 둘째, 유대인들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다(53). 여기에서 율법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는 율법을 거절한 것이다.

 

3. 스데반 설교의 결과(7:54-60)

스데반은 자신의 설교로 말미암아 순교의 자리에 임하게 된다. 여기에서 유대인의 모습과 스데반의 모습이 각각 두 번씩 반복된다. 첫째로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54). 둘째로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다(57-58).

 

스데반은 죽음의 자리에서 두 가지 기도를 드렸다. 자신의 영혼을 주 예수께 맡기고, 유대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기도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스데반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철저하게 따랐던 것이다.

 

6. 사마리아에서의 복음전파(8)

 

스데반의 순교와 더불어 일어난 핍박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1-3). 이러한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도들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들을 통해 유대와 사마리아 여러 마을에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역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인물은 초대 교회의 일곱 사람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었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4-8)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또 행하는 표적도 보고서 주목하였다(6). 이로 인해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 기쁨은 칼빈이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이다.

 

마술쟁이 시몬의 거짓 회심(9-13)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였다(11). 그들은 마술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았다. 마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만들뿐이지 기쁨과 자유를 주지 않는다.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14-17)

이들이 받은 성령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칼빈은 이들이 전에 중생하였다고 보면서 이들이 후에 성령을 받은 것은 성령의 특별한 선물들로 이해한다.

하지만 15, 17절에 보면 여기서 성령은 오순절 날 임하셨던 보혜사 성령을 가리킨다.

 

마술쟁이 시몬의 악행(18-25)

오늘날에도 성령의 은사를 준다면서 헌금을 강요하거나 그 대가로 돈을 받는 사례가 있는데, 이것은 마술쟁이 시몬과 같이 중대한 죄를 짓는 것이다.

 

에디오피아 내시에 대한 전도(26-40)

먼저 주의 사자가 이렇게 말하였다(26). 에디오피아는 이집트 바로 남쪽에 있는 나라를 말하며, 오늘날 수단에 해당한다. 오늘날 에디오피아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구약 성경에는 구스라고 불렸으며, 에디오피아 왕은 태양의 아들로 숭배되었으며 너무나 신성시되었기 때문에 세상사는 그의 어머니인 여왕, 간다게가 맡아 보았습니다.

 

빌립이 만난 내시는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사람이었다. 오늘날 재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성령이 빌립에게 이 병거로 가까이 나가라고 말씀하셨다(29). 빌립이 달려가서 읽는 것을 깨닫느뇨(30). 내시가 제일 궁급하게 여겼던 것이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다.

 

둘이 물에서 올라올 때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빌립은 다시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다(40).

 

성령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을 하나로 묶는 띠로서 모든 미족과 문화를 초월하여 역사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는 또한 빌립과 사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7. 다시 보게 되는 은총(9:1-31) : 바울의 회심, 소명, 증거

 

존 스토트는 그의 사도행전 강해주석에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체험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이다라고 진술했다.

다메섹 지역에서는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 들어온 성도들이 가세함으로 더욱 신앙 공동체가 단결되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 크리스찬들을 대상으로 모진 핍박을 강행했던 사울이 이 사실을 알고 다메섹 지역으로까지 올라가도록 결심한다.

 

1. 9:1-9(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

사울이 다메섹 도시에 거의 다 도달할 때쯤(예루살렘에서부터 다메섹까지는 약 242킬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울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목적적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홀연히 하늘로서 비추는 빛과 부활하신 예수의 소리를 통해 사울 자신이 시각과 청각에 의해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사건임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

 

2. 9:10-19(아나니아의 환상과 다메섹에서의 사울)-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와의 만남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다메섹이서 살고 있는 그의 제자 아나니아에게도 환상 가운데 나타나셨다.

다메섹 유다의 집에 있던 사울을 방문한 아나니아는 예수께서 사울에게 보여주신 환상대로 사울을 위해 안수하면서 기도하였다. 이 때 삼일 동안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금했던 사술이 아나니아로부터 처음 들은 말은 형제 사울아였다.

이제 비로소 다시 보게 된 사울은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털고 일어나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3. 9:19-25(다메섹 회당에서의 사울)-다메섹 교회/성도들과 유대인들의 만남

사울은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를 통해 다시 보게 된 사울은 세례와 함께 곧 이어 성령충만을 받게 된다. 이어서 사울은 다메섹에 있던 다른 제자들과 며칠을 교제한 후, 바로 다메섹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게 된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 소명 이후, 아라비아로 갔다가 3년 후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오자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을 사울을 죽이고자 계획하였다.

 

4. 9:26-30(예루살렘에서의 사울)-바나바와 사도들 및 유대인들과의 만남

밤에 다메섹에서 빠져 나온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옮겼다. 3년 전 주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잡아오기 위해 3년 전 예루살렘을 떠났던 사울이 이제는 주 예수 이름을 선전하는 자로 변화되어 동료 유대인들로부터의 핍박과 죽임 당할 위험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다메섹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사울을 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 아나니아가 큰 역할을 하였다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나바의 통찰력과 인격을 통하여 사울을 기꺼이 한 형제로 영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울은 이제 예루살렘에서도 주의 제자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디아스퍼러 출신의 유대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증거하였다(13:46, 28:31). 사울은 이곳 예루살렘에서도 핍박과 비난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예루살렘에 속한 주의 제자들은 사울을 피신시키기로 계획함으로써, 사울은 다시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로, 그리고 더욱 안전한다고 판단된 자신의 출생지인 길리기아의 다소로 인도되었다(9:11, 21:39, 22:3)

 

5. 9:31(온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 지역의 교회 부흥)

누가는 사도행전 9:31을 통해 스데반의 순교 이후, 그리고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소로 피신을 한 상황 가운데도 여전히 교회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 속에서 영적, 수적으로 성장해 나감을, 즉 하나님의 복음이 계속 지리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8. 장벽을 깨고 이방인을 향하는 복음(9:32-11:18)

 

베드로의 순방(9:32-42)

베드로는 성도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사방을 두루 순방하였다. 중풍병자 애니아를 일으키고, 즉은 다비댜를 살린 것이 베드로 자신의 능력이로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진군을 위한 새로운 빛(9:43-10:48)

이방인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고넬료가 복음의 은총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 피장의 집에 머무는 유대인 사도(9:43)

 

죽은 짐승을 다루는 피장이란 직업은 부정한 것이요 경멸스러운 것이었다. 피장은 사람들이 사는 성읍에서 격리되어야 했고, 한 여자가 상대방이 피장인지 모르고 약혼을 했으면 무효선언을 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지금 베드로가 이 피장의 집에 머무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 고넬료는 누구인가?(10:1-2, 22)

 

그는 헤롯 아그립바 왕 밑에서 로마 군인들로 구성된 가이사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고넬료가 구원에 이르는 사건은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깨끗케 하심으로 말미암은 결과임을 선언하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다.

 

3. 고넬료에게 임한 환상(10:3-8)

 

천사가 고넬료에게 전해 준 말의 내용은 두 가지였다. 고낼료의 현재의 경건생활을 인정해 주는 말과 베드로를 청하라는 것이었다.

 

4. 피장 집의 사도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10:9-17)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과 고정관념과 전통이 이방인의 구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결정적인 거침이 될 것이다.

 

5. 이방인의 초청을 받은 유대인 사도(10:17-22)

 

이 사건에서 단순히 개인 차원이 아니라 유대인의 대표라는 상징적 성격을 가지듯이, 베드로는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대표라는 상징적 성격을 가지고 이 사건에 등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 한 지붕 밑 세 가족(23)

 

부정한 사람 피장, 거룩한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 깨끗지 못한 이방인이 한 지붕 밑에서 여러 날을 머무른다. 피장의 집에서 고넬료의 집까지 50킬로가 되는 먼 길을 걸어가고 있다.

 

7.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역사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과 유대인 형제 여섯(11:12)을 데리고 총 열 사람이 50킬로 되는 길을 떠나 이튿날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다(24). 아직도 베드로는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인 줄을 너희는 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그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넬료의 환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베드로가 설교하는 동안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44). 안수를 한 것도 아니고, 세례를 베푼 것도 아니었지만 방언과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증거로 동반한 성령 부어 주심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이다.

 

8. 장벽을 깨고 이방인을 향하는 복음(11:1-18)

 

복음의 진군에 장애물이 된 복음의 증인들(1-3)

할례자들의 베드로 비난의 이유(3). 자신의 전통과 관습을 깨고 왜 무할례자들의 집에 가서 함께 먹었느냐?

베드로가 전하는 사건의 전말(4-17). 베드로의 이야기 진행은 누가 이 사건을 일으켰느냐(하나님), 나의 확신이 어디로 왔는가? 하나님.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

깨어지는 장애물(18): 편견으로부터의 자유

 

9. 베드로-바울 사이클 : 이방인 복음전파의 필연성(11:19-12:25)

 

누가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전파되기 시작해서(1-5), 헬라파 유대인의 교회운동에의 참여(6), 유대교적 관습거부(7), 핍박을 통한 사마리아에의 복음전파(8),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울의 회심(9),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10-11:18),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11:19-28)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12장에는 베드로의 사역에 대한 기술이 눈에 띄게 많은 반면, 사도행전 13장 이하에서는 바울의 선교 사역이 지배적이다.

 

역사적 정황: 안디옥 교회와 바나바와 사울(11:19-30)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 구제 방문했을 때는 사울이 예루살렘의 사도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확신 있게 피력할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바나바가 사울보다 유력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13:42).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을 구제 방문했을 때 사울의 입지가 유아기에 있은 반면 예루살렘 교회 지도력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에게 있었다.

 

바울이 이방인 복음전파를 위한 기초: 베드로의 역할(12:1-11)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회심 사건과 사도행전 11장의 베드로의 이방인 구원에 대한 열린 비전의 제시가 사도행전 13장의 사울이 이방인 복음전파를 위해 1전도 여행을 떠나는 배경이 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였던 반면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다.

 

구속사에 있어서 복음전파와 중보기도(12:12-19)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기도를 복음전파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제시한다. 칼빈은 환난 중에도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은 평화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11:19-12:25에서도 복음전파와 교회운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도되고 진행되었음이 나타난다.

 

10. 이방인 선교의 시작(사도행전 13-14)

 

따로 세움을 입음(13:1-3)

 

선교적 과점에서 볼 때 사도행전 13장은 그동안의 예루살렘 교회 중심의 사역이 안디옥 중심의 사역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의 3대 도시-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 가운데 하나였다. 이때 안디옥은 예루살렘보다 훨씬 크고 모든 면에서(정치, 경제, 문화 등)예루살렘을 능가하는 도시였다.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1절 말씀에 의하면 그곳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출신성분과 인종적인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안디옥 교회는 주를 섬겨 금식하며 기도하는 교회였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예배드린다는 단어이다. 더 나아가서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다. 그들은 성련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안수하여 따로 세웠다.

 

구브로에서의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13:4-12)

바울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바 예수가 더 이상 장난치고 공격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총독은 그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닥고,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선교사역(13:13-52)

1. 처음부터 끝까지(13:13-14)

 

마가는 나중에 바울도 인정하는 귀중한 사역자가 되었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적극적이고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2. 바울의 설교와 그 결과(13:15-52)

 

이 설교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13:15-23).

 

여기서 바울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그 역사의 초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힌다.

 

2) 성경에 기록된 대로(13:26-41)

 

그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이것이 바로 바울의 설교의 핵심이자 결론이다. 이는 우리를 위한 복음이다.

 

3). 설교의 결과: 갖가지 반응(13:42-52)

 

바울의 설교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것은 용납과 거부였다. 유대인들은 비방하였지만, 이방인들은 환영하고 복음을 영접했다.

 

주를 힘입어: 이고니온에서의 전도사역(14:1-7)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또 핍박을 받게 되고, 다시 그곳을 떠나 루스드라로 이동한다.

복음은 계속해서 전진하고 확장되어 간다. 복음이 가는 곳에는 항상 소란이 일어났다.

 

루스드라에서의 사건(14:8-18)

1,구원을 얻을만한 믿음(14:8-10)

 

바울은 그 앉은뱅이 속에 구원을 얻을만한 믿음, 치료될 수 잇는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결국 바울은 그를 향해서 일어설 것을 명령하였고, 그는 치유함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말씀과 능력이 함께 역사하는 모습이다.

 

2. 잘못된 숭배(14:8-18)

 

한 앉은뱅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으켜 세우자, 그 모습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그들이 섬기는 신인 쓰스(제우스)와 허메(머큐리)가 다시 강림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 앞에 제물을 가져와 섬기려 하였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우상 숭배의 유혹이다. 자기우상화의 유혹이다. 자연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안디옥으로의 귀환(14:19-28)

첫째, 거의 죽게 되었던 바울을 일으키신 부활의 능력에 관한 말씀이다.

 

둘째, 우리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목표,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영적인 탈곡기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환난을 당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런 믿음이 있기에 자신이 지금까지 고난과 핍박을 받던 지역으로 되돌아간다. 우리의 고난은 의미 있는 고난이요, 우리의 환난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고 있는 환난이요 우리의 고생은 환희로 끝나게 약속되어 있는 고생이라는 사실이다.

 

11. 예루살렘 교회의 회의와 그 현대적 의의(사도행전 15)

 

예루살렘 교회 회의(15:6-22)

1. 베드로의 주장(7-11)

 

할례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증거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을 주셨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으로 강요되거나 첨가되어서는 안된다.

 

2. 바나바와 바울의 증언(12)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그들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는가에 관하여 증언했다.

 

3. 야고보의 결론적 제안(13-21)

 

베드로가 주장했던 것처럼 야고보는 현재 성령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도리임을 강조한 것이다.

 

야고보의 첫 번째 제안은 믿음의 형제들에게 할례란 쓸데없는 멍에요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의 관습에 거슬리는 이방인들의 관습인,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 졸라 죽인 것, 피를 먹는 것 등을 포기하도록 요구하였다.

 

후속 조치(15:22-33)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대표들, 유다와 실라.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 편지를 전달했다. 그들이 읽고 위로한 말을 기뻐하였다(31).

 

예루살렘 교회 회의의 결과(15:36-41)

세계선교를 향한 위대하고 확실한 기초는 작성되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했다.

 

결론 : 예루살렘 교회 회의의 현대적 의의

사도행전 15장은 바울의 제 1차 선교와 제2차 선교 중간에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회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개종 초기에는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고 열정적으로 주님을 의지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처음 열정은 식어지고 신앙은 점점 형식과 관습과 문자적인 규율에 매이게 되고, 그리하여 역동적인 신앙과 삶을 상실한다.

열심히 믿으려는 신앙생활은 율법주의적인 성향을 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이 주장하는 구속의 삶이 아니라 예수가 주장하는 지유의 삶이다.

 

12.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 빌립보 전도(사도행전 16)

 

사도행전 16장은 서쪽으로 전진하는 사도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첫 걸음을 묘사하고 있다. 빌립보 이전 활동과 빌립보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빌립보 이전 활동은 루스드라와 드로아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루스드라 활동(16:1-5)

루스드라는 더베와 이고니온을 연결하는 위치에 잇다. 이 지역에는 이미 교회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1.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음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동역자로 얻게 된 사람은 디모데였다. 디모데는 제자였다(1). 둘째,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의 아들이었다(1). 셋째,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였다(2).

 

그런데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전도 여행에 동반하고자 했을 때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디모데의 부친이 헬라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3). 사도 바울은 이 유대인들 때문에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다(3),

 

2. 사도 회의의 교훈을 전함(16:4-5)

 

사도 바울은 여러 성을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잇는 사도들과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들을 주어 지키게 하였다(15:26-29). 이 규례들은 사도회의의 결정사항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의 교회순회와 교지전달은 두 가지 결과를 일으켰다.

첫째, 교회들이 믿음에 견고하게 되었다(5).

둘째, 교회들이 날마다 수적으로 증가하였다(5),

이것은 교회의 안정과 부흥에 있어서 열정과 교리의 중요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열정과 교리가 조화를 이룰 때 교회는 안정되며 부흥한다는 것이다.

 

드로아 활동(16:6-10)

1. 성령의 금지(16:6-8)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 전도에 성공함으로써 계속 아시아를 공략하려고 했으나 성령께서 막으셨다(6).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동쪽에 있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통과하여(6), 서쪽에 있는 무시아를 향하다가 북쪽에 있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께서는 이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이 계속 서진하기를 원하셨다. 결국 사도 바울은 무스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가게 되었다(8).

 

2. 환상(16:9-10)

 

드로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9). 그의 일행은 즉시 마게도냐로 떠날 시도를 하였다(10),

 

빌립보 활동(16:11-40)

1. 루디아의 회심(16:12-15)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도착하였다(12).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로마의 식민지였다. 사도 바울 일행은 첫 번째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기 위하여 문밖 강가로 나갔다(13).

 

사도 바울은 거기서 여자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마침 루디아가 그의 말을 듣게 되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 였다. 그녀가 부유한 상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디아는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그녀는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었다. 그 결과로 그녀와 그녀의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 루디아의 집은 사도들이 빌립보에서 활동하는 동안 거점이 되었다.

 

2.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의 치료(16:16-24)

 

사도 바울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치료함으로써 그녀의 점으로 크게 유익을 얻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폭행을 가한 사건이었다.

 

3. 간수장의 회심(16:25-34)

 

바울과 실라는 고난 중에도 마음이 서로 합했다. 그들은 고난 중에서 기도하고 찬미하였다.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지의 표시였다. 찬미는 영적 헌신의 표시이다.

 

바울과 실라가 찬미하는 동안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욱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벗어졌다(26). 빌립보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심한 고난 중에도 기도하며 찬송하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불행이 닥치면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한다.

사도 바울은 이때 전도의 기회를 포착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31). 사도 바울은 개인전도 만큼이나 가장전도에 총력을 기울였다. 결국 간수장과 함께 온 집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다.

 

13. 데살로니가 전도와 아덴 설교(사도행전 17)

 

사도행전 17장에는 바울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전도, 그리고 아덴에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빌립보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며 복음을 전한 바울은 이제 서남서 방향으로 여행하여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빌립보에서 150킬로 떨어진 데살로니가에 도착한다.

 

데살로니가전도(17:1-9)

인종적으로 볼 때 이 도시에는 마게도냐에서 가장 큰 성읍은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인종들이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도시에 유대 회당인 거류지와 회당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먼저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 원칙을 고수했다. 거기에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준비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회당은 바울에게 있어서 선교경비를 조달하는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 성경 말씀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메시지에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결과 몇 몇 유대인들과 이방신을 섬기던 많은 헬라인의 무리와 유력한 인사들의 부인들을 기독교인들로 얻을 수 있었다(17:4). 야손, 데마,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등이 이때 회개한 사람이다.

 

수주 후에 바울 일행은 소동 휘말리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차단하기 위해 군중봉기를 일으켰는데, 그 죄목이 예수를 왕으로 선포한다는 것이었다.

 

베뢰아 전도(17:10-15)

데살로니가 동료들은 밤을 이용해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낸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약 100킬로 떨어진 곳에 의치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그의 말을 정중하고 편견 없이 들어 주었다. 성경의 최종 해석자는 설교자가 아닌 설교를 듣고 그것을 깊이 묵상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성도들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베뢰아까지 좇아와 여기에서도 소동을 일으켰다(13).

 

바울은 베뢰아 신자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실라와 디모데를 거기에 남겨주고 자신은 아덴에 떠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덴 전도(17:16-34)

아덴은 주전 5세기 이래 가장 주요한 도시 국가 중 하나로 헬라의 수도였다. 당시 아덴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게 3대 도시 중에 하나였고, 세계 문명의 발생지로서 철학과 문학, 예술 등 헬라 문화의 중심지였다.

 

당시에 스토아 학파는 금욕적이고 범신론적이며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부정하고 사물의 영원성을 믿는 반면, 에피쿠르스 학파는 쾌락을 최고의 신으로 여기며 창조를 부인하고 생명의 발생이라든가 운명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역시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다.

 

사도행전에는 9편의 바울의 살교가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 아레오 설교를 제외한 8편의 설교는 디아스포라 회당들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행해진 설교였다.

 

에덴의 청중들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관에 대해 처음 듣는 이방인들이었다.

바울은 설교의 서두에서 아덴 사람들의 맹목적인 종교성과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메시지는 모든 청중들로 하여금 이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공감할 수 있게끔 그들의 관심, 상황, 목표 및 감정에 부합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제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교한다.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만유를 지으신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는 주재자가 되심을 말한다(17:24).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만드신 창조자시며(26),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만물을 주시는 인생의 주관지이시다(25).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정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시며, 또한 인간과 교제하시는 인격적인 신이심을 선포한다(26).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주재자일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구속주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에 순복할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을 소개한 후 자연스럽게 구속사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증거한다.

 

사도행전 17장에 나타난 바울 설교의 특징

첫째, 역사적인 사건을 선포했던 설교

둘째, 구속사의 맥락에서 해석했던 설교

셋째, 개인에게 결단을 촉구했던 설교

넷째, 상황 적용이 뛰어났던 설교

 

14. 고린도와 에베소 사역(18-19)

 

아가야의 고린도에서

1. 아굴라와 브리스 길라(18:1-4)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 길라는 만나 같이 장막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3). 그들은 바르게 살며 제대로 사역하기 위해 낮과 밤 없이 고된 노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세속 직업의 고단함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역과 봉사의 부담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우리라면 이런 장면 앞에서 숙연해져야 한다.

 

2. 고린도 사역(18:5-11)

 

드디어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했다. 그들은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마 실라와 디모데가 그들로부터 전달된 재정적 도움을 가져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했다(18:5). 바울은 16개월을 이곳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3. 유대인의 고소(18:12-17)

 

갈릴오가 총독으로 재임하던 기간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그곳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바울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그가 로마법을 어기고 있다고 고소한 것 같다(18:13)

 

바울의 에베소에서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그의 긴 설교 여행의 절정을 이룬다.

 

1. 안디옥으로의 여정(18:18-23)

 

2전도 여행이 마무리되고 제3차 전도여행으로 이행한 과정을 개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다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변론을 했다. 바울의 에베소 회당 변론은 여러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것 같다. 그들이 더 머물 것을 요청했으나 일정 때문에 일단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에베소에 오리라는 기약을 하고 떠난다.

 

2. 아볼로(18:24-19:1-7)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답게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로 평가되었다(18:24).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쳤다. 하나님의 도를 자세를 풀어 주었다.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가 복음의 핵심적 요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쳐 주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선포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요한의 물 세례와 비교하여 예수의 세례의 차이를 설명했을 것이다.

 

3. 에베소 사역(19:8-20)

 

에베소 신자들이 온전한 복음을 소개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역사도 있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3개월간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담대하게 강론했으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그래서 회당을 나와 두란노 서원을 강론의 장소로 삼았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축귀와 신유를 동반했다. 그의 말씀 사역에 기적의 역사가 뒤따랐고, 이를 흉내내는 주술사들도 있었다.

 

4. 은장색의 소동(19:21-22, 23-41)

 

바울 사역의 성공은 에베소 지역에서 아데미를 근간으로 한 경제에 위협을 가져왔다. 신전의 사업에 기초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의 불만과 에베소의 수호여신 아데미에 대한 충성심과 애향심이 한데 어울려 민요가 발생했다.

에베소의 서기장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아무런 불법을 행한 것이 없으며 오히려 군중의 소요를 합법적이지 못한 것으로 정의하여 질서를 회복시켰다(19:35-41).

 

15.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의 작별(사도행전 20)

 

사도행전 20장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 중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마게도냐와 헬라로 간 바울(1-6)

 

에베소에서 광적인 소요가 그친 후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서 권면한 후에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떠났다. 마게도냐는 소아시아 반도 맞은 편 지역으로 오늘날 유럽에 속하며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의 도시가 있는 곳이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에 마게도냐를 들러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 후에 바울은 헬라로 가서 석 달을 머물렀다. 헬라는 고린도와 아테네 등이 있는 아가야 지역을 뜻한다. 바울은 거기서 수리아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함(7-12)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이날 저녁에 밤늦게까지 성경 강론을 계속하였다. 안식일 첫날 곧 주일, 바울과 그 일행들이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 이때 유두고가 3층 창문에 걸터앉아서 말씀을 듣다가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해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바울이 그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엎드리기 전에 기도했을 것이다(왕하 4:32-35)

 

살아난 청년을 인하여 사람들이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적은 바울의 강론을 들은 청년들이 그 말씀이 진리이며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다는 것을 강하게 믿도록 역사하였을 것이다(16:20).

 

드로아에서 밀레도로 감(13-16)

 

드로아를 떠난 바울과 그 일행은 두 편으로 나뉘어 바울은 육로로 앗소로 가고, 나머지 일행은 배를 타고 먼저 앗소에 가서 기다리게 되었다(13). 그들은 다시 앗소에서 만나 배를 타고 미둘레네로 가고, 거기서 이튿날 기오 앞에 이르고, 그 다음날 사모에 이르고 그 다음 밀레도에 도착했다.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에 있는 항구이다. 에베소에 들르지 않은 이유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거기서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6).

 

에베소 장로들에 대한 고별 설교(17-35)

 

장로란 유대적 배경을 갖고 있으면 감독이란 단어는 헬라적 배경을 갖고 있다.

 

1. 에베소 교회에서의 목회회고(18-21)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 어떠한 사람이 되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바울이 주님을 섬길 때의 모습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모든 겸손과 눈물과 시험이다. 겸손이란 겸비한 생각,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눈물은 성도들을 위하여 흘린 눈물이며, 많은 눈물이 있어야 교회가 바로 되고 참된 목회가 된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바른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온갖 시험과 비방이 찾아온다.

 

참된 목자는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를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활용한다.

세상으로 향하던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참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2. 바울의 결심과 각오(22-27)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자기의 계획과 각오에 대해 말한다.

바울의 선교사역의 가장 큰 성공비결은 그가 이적과 기사를 행했다거나 학식이 뛰어났다거나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다는데 있지 않다.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는 데 있다.

 

3. 장로들에 대한 당부(28-35)

 

장로는 권세를 부리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돌아보는 자, 보살피는 자이다. 각 정해진 구역 식구들을 돌아보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4. 밀레노 항구에서의 작별(36-38)

 

밀레노 항구에서의 작별의 눈물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서 또 다시 자기의 목숨까지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바울을 마지막으로 보내면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람에 감동되어 소리 높여 운 울음이었다.

우리에게 이런 신앙은 자기의 명예와 권리를 너무 앞세우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너무 나선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곳곳에서 탄식소리만 들려온다.

 

16. 예루살렘을 지나 로마로 향하는 바울(사도행전 21-23)

 

바울 일행은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하여 여정을 서두른다. 사도행전 21장에서부터 23장까지의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은 가시사랴에 이르는 긴 행로이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21:1-14)

이 할로는 고스-로도-비디랴-두로를 거쳐 다시 돌레미아에 이르고 그곳에서 떠나가이사랴에 이른다. 그 다음 바울 일행은 이제 가이사랴에서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1.밀레도로부터 두로까지(21:1-6)

 

두로에서 짐을 푼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믿음의 형제들을 찾앗고, 그들과 함게 칠일을 머물렀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구너고를 다시 한 번 받는다.

 

2. 가이사랴에서 바울(21:7-17)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중의 하나인 빌립의 네 딸과 만났고, 거기서 아가보라 하는 유대로부터 온 선지자를 만난다. 그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킨다. 이로 인하여 그곳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울며 권고한다.

얼마간 그곳에서 기거한 후 바울 일행은 몇몇 제자들과 특별히 나손이라는 구브로 사람을 동반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야고보와의 만남( 21:15-26)

사도행전 21:1-14은 예루살렘까지의 긴 여행 행로이다.

바울 일행은 다음날 야고보와 다른 장로들과의 만남을 갖는다.

사도회의의 결과는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금하는 것이다.

 

바울의 체포(21:27-40)

바울이 칠일 간의 정결예식을 마치는 무렵에 유대인들이 성전에 들어와 바울을 폭행했다.

 

바울의 변론(22:1-21)

바울이 말한 성전에서의 변론은 크게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며, 다른 하나는 성전에서의 환상이다. 이 바울의 변론은 결국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일을 증거하는 것이며 로마에까지 증거해야 할 내용이었다.

바울은 다메섹 경험을 세 번에 걸쳐서 성전에서의 환상을 언급한다. 22장은 유대인들에게 설명하는 것이고, 26장은 이방인이었다.

 

천부장과 바울(22:22-30)

천부장은 바울로 인해 벌어진 이 소동의 원인을 알기 위해 바울을 제사장과 대면시켜 논쟁하게 한다.

 

대제사장 앞에 선 바울(23:1-11)

사도행전 23:11에 언급된 주의 음성은 바울에게 깊은 위로와 확신을 준 말씀이다. “담대하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리라.”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23:12-22)

바울의 조카가 이 음모를 알고 급히 수비대로 들어가서 바울에게 이를 전했고, 바울은 조카를 천부장에게 보냈다. 천부장은 바울을 더욱 철저하게 보호하였다.

 

가이사랴로 이송되는 바울(23:23-35)

기병에 의해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천부장의 편지와 함께 총독에게 보낸다. 총독은 바울이 정말 길리기아 출신임을 파악하고 난후 고소인이 도착한 후에 바울의 말을 듣겠다고 약속하고 바울을 헤롯 궁에 가둔다.

 

17.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의 복음 증언(사도행전 24-26)

 

총독 벨리스 앞에서의 자기변호와 증언(24:1-27)

24장의 고소 시간은 고소자들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후 시작된다. 바울 사도가 벨릭스 앞에 섰을 때는 그의 통치 말기인 서기 57, 즉 그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져 유대 지도부의 주장을 무시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압송된 지 닷새 만에 고소인들이 도착했다.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직접 내려왔으며 그는 몇몇 장로들과 그들을 대변할 변사 더둘로를 대동하였다.

 

바울을 고소한 핵심은 바울이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정치범으로 몰아서 바울에게 유죄선고를 내리도록 하는 데 있었다(1-9).

 

바울의 변호는 더둘로가 제시한 고소가 근거가 없음을 벨릭스에게 말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지 열이틀 밖에 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변론한 적이 없고 소동케 한 적도 없었다고 변호한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자신이 붙잡히게 된 것은 부활에 대해 얘기한 것 외에 다른 무슨 악행이 있었는지 고소자들에게 말해달라고 변론한다(10-21).

 

벨릭스는 이 도에 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24:22-23).

바울의 재판이 휴정으로 들어간 지 며칠 후 벨릭스는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찾아왔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하여 들었다(24:24-26). 벨릭스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지만 회개하는 믿음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후에도 벨릭스는 바울을 자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바울에게서 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그루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하며 자신이 곧 가이사랴로 가니 유대인지도부가 함께 내려가서 그곳에서 재판을 하자고 제안했다(25:1-12).

베스도는 예루살렘에 팔일 또는 10일을 더 있다가 가이사랴로 갔다. 유대인들이 그와 함께 갔고 그 이튿날 바울의 재판이 2년 만에 재개되었다.

황제에게 호소하는 바울의 청을 들은 베스도는 재판에 참석한 다른 고관들과 의논한 후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기로 하였다(25:6-12).

 

바울을 황제에게 보낸 명분이 뚜렷하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며칠 후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 버니게의 방문을 받고 이 명분을 찾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재판을 소집한다. 이 재판을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다(25;13-26:32).

 

바울의 저돌적인 설교에 놀란 총독 베스도는 그 재판 자리가 오히려 설교의 기도회가 되고 전도의 기회가 되고 말았다. 바울은 베스도에게 자신의 설교를 요약하며 결단을 촉구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긍정하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아그립바 왕에게 말했다.

 

아그립바 왕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베스도에게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이 사람이 황제에게 호소하지 않았더라면 놓아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8. 항해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사도행전 27-28)

 

로마에 이르기까지(27:1-28:16)

마침내 로마로의 행로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런 결정은 철저히 피동적이다.

바울은 유라굴로 대풍을 만나 그 배의 276명의 영적 지도자가 되고 있다. 멜리데 섬에서의 독사에 물리고도 죽지 않은 바울은 3개월 간에 그곳에서의 체류는 참 하나님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로마에서의 바울 활동(28:17-30)

로마에서의 바울의 첫 번째 활동은 로마의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대화를 나누는 일이었다. 바울은 제 일차 면담에서 자신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지게 된 것이 자신의 뜻과는 무관함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인들과의 2차 만남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함과 또 예수의 일에 대해 성경을 통해 논증함으로 자신의 믿는 바를 제시하는 것을 경청한다. 로마에서의 2년 동안 바울은 힘써 전하며 가르치는 사역을 했다.

 

바울은 모든 담대함으로 막힘없이 복음을 전했다(31). 하나님의 주도권은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 속에서의 주도권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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