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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by liefd 2024.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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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예수 앞에 나오는가?

 

오늘날도 두 부류가 예수님 주위를 멤돈다.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이다(1). 큰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2).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두 번째 주류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이 이야기의 과녁은 제멋대로 살아가는 죄인들이 아니라 매사에 성경의 규정대로 행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타이르는 대상은 부도덕한 외부인이 아니라 도덕적인 내부인이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사람이나 종교를 등진 사람이나 둘 다 영적으로 잃어버린 존재이고, 삶의 길도 다 막다른 골목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의 편이신가? 종교적 도덕주의를 특히 치명적인 영혼의 병으로 꼽으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을 항상 끌어들인 반면, 당대의 종교적이고 성경을 믿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오히려 우리가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반듯하고 도덕적인 경향이 있다.

 

우리도 잃어버린 두 아들처럼 질주한다.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이 아버지는 사랑을 거부당한 고통뿐 아니라 처참한 명예훼손까지 참고 견딘다.

종은 주인의 집에 살면서 일했으나 품꾼은 인근 마을에 살면서 품삯을 벌던 각종 상인과 공장이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집안은 물론 지역사회 전체의 수치가 되었다. 지역사회의 규범을 어긴 사람은 사죄만으로는 안되고 배상까지 해야 했다.

아버지 제가 다시 집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여겨주신다면 일을 배워 품삯을 벌어서 조금이나마 빚을 갚겠습니다.

 

중동의 기품 있는 가부장은 달리지 않았다. 지역사회의 젊잖은 기둥이자 대농장의 소유주인 가장은 달리지 않았다.

그 중에서 제일 좋은 옷이라면 아버지의 옷이었을 것이다. 이는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었다는 확실한 증표다. 나는 네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꺼다. 네 힘으로 자격을 얻어서 이 집안에 다시 들어오는 게 아니다. 내가 그냥 너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그 어떤 죄나 허물도 다 사면해 회복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든 상관없다. 고의로 사람을 괴롭히거나 심지어 살해했어도 상관없고 자신을 지독히 학대했어도 상관없다.

동생은 아버지 집에 양식이 풍족한 줄은 알았으나 이제 은혜도 풍족함을 깨달았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수용은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이다.

 

맏아들도 잃어버리다

 

아버지가 맏아들과 말하려고 부득이 자리를 뜬 것은 대연의 주최자로서 체신이 깎이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들어가자고 타일러도 그는 한사코 거부한다.

맏아들이 이렇게 격노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자신에게 뒤따를 손해 때문에 속이 뒤집혔다. 동생을 도로 집안에 들임으로써 아버지는 그를 다시 상속자로 삼아 이미 확 줄어든 가산의 1/3에 대한 권리를 주었다.

 

형은 자신의 이력을 내세우며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이런 결정을 하신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홧김에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이것 보세요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아버지가 부자의 연을 끊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놀랍게도 자애롭다. 나는 동생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너도 버릴 마음이 없다. 선택은 네 몫이다. 들어오겠느냐, 말겠느냐?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죄는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이상이다.

비유에 나오는 형제를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는 두 가지 기본적인 길을 보여 주신다, 하나는 도덕적 순응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발견의 길이다. 둘 다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길이고, 세상의 악을 해결하는 길이며,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길이다.

 

비유 속의 형은 도덕적 순응의 길을 대변한다. 비유 속의 동생은 자아 발견의 길을 대변한다. 이 두가지 삶의 길과 그 둘의 필연적 충돌이 고전 영화 위트니스에 생생히 그려져 있다.

도덕적 순응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전통과 공동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 자기 발견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서 거기서 나의 참 자아와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

 

방법은 다르나 마음은 같았다

 

두 아들을 보통의 기분에서 보면 하나는 못됐고 하나는 착하지만 아버지와 멀어져 있기는 둘 다 똑같다. 비유 속의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형은 왜 들어가지 않는가? 내가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15:29). 형이 아버지의 사랑을 읽고 있음은 착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착하기 때문이다. 그와 아버지를 갈라놓은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이력에 대한 교만이다.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건 그의 악이 아니라 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둘째 아들이 삶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는 가산의 지분에 대해 아버지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게 못내 싫었다. 스스로 결정해 자기 몫의 재산을 마음대로 쓰고 싶었다.

 

맏아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도 동생 못지않게 아버지의 반감을 품었다. 그는 아버지보다 재물을 더 원했다. 다만 동생은 멀리 떠난 반면, 형은 옆에 남아 명을 어김이 없었을 뿐이었다. 자기 뜻을 관찰하는 방식만 달랐다 그는 무언으로 요구했다. 나는 아버지께 불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내 인생의 모든 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셔야 합니다.

 

두 형제의 마음은 똑 같았다, 둘 다 아버지의 권위를 못마땅해 하며 거기서 벗어나려 했다. 두 아들은 모두 반항했다. 방법상 하나는 아주 못되게 굴었고 또 하나는 지극히 착했을 뿐이다. 둘 다 아버지의 마음을 떠나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두 아들 중 누구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둘 다 아버지를 이용해 이기적인 목표를 이루려 했을 뿐이지 아버지를 사랑해서 즐거워하고 아버지를 위해 섬긴 게 아니다. 하나님께 반항해 그분과 멀어지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는 그분의 규율을 어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규율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

 

플래너리 오토너의 소설, 현명한 피, 등장인물 헤이즐 모츠에 대해 이런 말이 나온다. 그 사람은 죄를 피하는 게 곧 예수를 피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구주로서의 예수님을 피하려면 모든 도덕법을 지키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권리가 생겨난다.

 

형이 아버지에게 그토록 노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집안의 옷이며 반지며 가축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개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엄격한 윤리와 경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들은 그분의 권위에 반항한다.

 

방식만 다를 뿐 둘 다 자기 마음속에서 집착하고 있는 목표물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줄 게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재물이라 믿는다.

맏아들은 잔치에 들어가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노하여 거부하는 것으로 보아 한번도 아버지의 행복이 그의 목표였던 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당신의 모든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형이 하나님께 순종한 건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죄를 일련의 규범을 어기는 것으로 정의한다. 죄란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게 아니라 구주요 주님이시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구주와 주인이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도덕법을 어기고 자기 기준대로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도덕법을 지켜 극도로 착해지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구주와 주인이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도덕법을 어기고 자기 기준대로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도덕법을 지켜 극도로 착해지는 것이다.

 

둘 다 틀렸으나 둘 다 사랑받다

 

두 아들 모두 틀렸는데도 아버지는 둘 다 소중히 여겨 사랑의 찬치 속으로 불러들인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틀렸으나 모든 사람이 사랑받는다.

자신이 별로 선하지 못하거나 마음이 넓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쪽으로 간다. 그러나 자신이 이대로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돌보시며 교만한 자들을 멀리하신다(138:6).

 

어느 신문에 세상의 문제는 무엇인가? 라는 공개질문이 실렸을 때 카톨릭 사상가인 G.K.체스터턴은 이런 짧막한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담당자에게 그전 바로 나입니다.”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 불순종만큼 위험하다

 

형의 분노는 스스로 만들어 낸 감옥이다.

예수님은 죄와 구원을 잃음과 찾음의 은유로 말씀하신 적이 많다.

형 같은 태도를 품은 사람의 첫 번째 징후는 삶이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냥 슬픈 정도가 아니라 분노와 원한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형은 자신이 착하게 살면 삶이 행복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고난에 대처할 줄 모르는 것은 그들이 준수하는 도덕이 결과지향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착하게 사는 이유는 선한 행실 자체가 즐거워서가 아니라 그런 계산적인 방식으로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자아상의 근거를 부지런한 노력, 도덕성, 소속된 엘리트 집단, 아주 똑똑한 지식 등에 둔다.

 

알코올 중독자는 번번이 가족들을 실망시킨다. 중독자의 아내는 고생의 결과로 엄청난 자기 연민과 독선적인 태도에 빠질 때가 많다. 그래서 남편을 난 몰라라 하면서도 그의 죄의 전력만은 늘 붙들고 늘어진다. 그럴수록 중독자는 더 자기

혐오가 싫어서 그 이유라도 술을 마신다. 파멸의 악순환이다.

 

두려움과 이기심이 동기가 될 때

 

형의 태도를 품은 사람들의 또 다른 증후는 기쁨이 없이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이다. 아버지를 위해 노예처럼 일했다(NIV 성경). 노예처럼 일한다는 것은 강요당하거나 떠밀린다는 말이다. 노예는 두려움 때문에 일한다. 형은 오로지 의무감 때문에 아버지에게 순종했음을 보여준다. 기쁨이나 사랑은 간 곳이 없다. 기쁨 없이 노예처럼 일하는 고역이다.

 

두려움 대신 사랑이 동기가 된 사람은 법도 잘 지킬뿐더러 부단히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여 기업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운영한다.

 

형같은 태도의 마지막 징후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확신이 없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인가? 삶이 잘못되거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뭔가 잘못 살아서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 다른 증상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때 기분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참히 무너져 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적으로 느껴져 당신의 삶에서 진정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다 보니 사람들의 인정이라도 받아야 스스로의 거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에서 헤어나기 힘든 것도 또 하나의 증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증상은 메마른 기도생활이다.

 

어디서 답을 찾을 것인가?

동생은 자신이 아버지와 멀어져 있음을 알았으나 형은 몰랐다. 그래서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매우 위험하다.

형 부류의 사람들의 분노와 우월감은 모두 정서불안과 내적 공허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동생들은 형의 태도와 기독교의 태도가 서로 똑같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진정한 형이 날 찾으러 오셨다. 형이 찾아야 하고, 형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의의 뿌리까지 다 회개하라

 

동생의 족쇄든 형의 족쇄든 각자의 잃어버린바 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랑이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먼저 나가 사랑을 표현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서 입을 맞춘다. 아버지는 분노와 원망을 품은 맏아들에게도 나가서 잔치에 들어오라고 다독인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일 적들을 사랑으로 타이르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그분은 방탕하게 살아가는 자유분방한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완고한 종교적인 사람들도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지 않으시는 한 우리는 절대로 그분을 만날 수 없다.

 

형을 구원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자신의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이다. 바리새인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주된 장벽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받을 선행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 몰론 하나님을 만나려면 자신이 잘못된 일을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냥 형일 수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 당신의 죄악과 착한 행실 양쪽 모두의 배후에 스스로 구주와 주인이 되려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

 

용서란 가해자에게는 값없고 무조건적이지만 당신 쪽에서는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

비유의 1막이 아버지의 값없는 용서를 보여준다면, 2막은 그 용서에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 진정한 형은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고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구원할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형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핵심적인 차이는 마음 깊은 곳의 동기다. 바리새인들이 착한 것은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욕구 때문이고, 그 욕구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존 뉴턴의 친구인 시인 윌리엄 카우퍼는 찬송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율법을 성취하신 주를 보고 주의 용서의 음성을 들으면 노예가 변해 자녀가 되고 의무가 변하여 기쁨이 되네.

 

이 세상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여정이다

 

그날에 우리는 아버지 집, 영원한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죄로 망가진 세상, 쉽지 않은 귀향길

집이란 우리가 그곳에 가야 할 때 우리를 받아주어야만 하는 곳이다(로버트 프로스트).

 

진정한 귀향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인간의 내면이 망가져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주변이 망가져 있기 때문이다.

두 탕자의 이야기는 귀향의 잔치로 끝난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종말을 기록한 요한계시록도 잔치로 끝난다(19:9).

 

아버지 잔치는 이미 시작됐다. 들어가 누리라

예수 복음은 지금, 여기서의 삶부터 바꾼다.

매일의 삶이 달라지다.

죄와 은혜와 희망에 대한 메시지에 기초해 살아가면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예수님의 구원은 잔치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500리터가 넘는 물로 최상급 포도주를 만드셨다. 구원은 객관적이고 법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관적이고 체험적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잔치다. 그분이 이루신 일을 믿고 안식하면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실제로 거하신다.

 

타락한 물질세계도 구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사회 구조를 개혁하여 안전한 거리와 따뜻한 가정을 만드는 일을 한 문장 안에 함께 말할 수 있다.

복음의 내면화, 복음의 생활화.

 

종교는 나는 순종한다. 고로 나는 받아들여진다는 원리로 작동한다. 그러나 복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고로 나는 순종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처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방법이다.

 

모든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깊이 이해해야 하고, 마음의 변화들이 삶으로 옮겨져야 한다. 복음을 믿으면 우리의 동기, 자아에 대한 이해, 정체성, 세계관 등이 고쳐진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일뿐 아니라 종착점이다.

내 선행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은혜로 구원받은 거라면 이제 아무렇게나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요 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비유에 1막은 있고 2막은 없는 것처럼 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지만 무한한 희생의 결과다.

 

이것을 잘 담아낸 성경 본문은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자로 비유된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 부류가 있는데, 그중 둘은 변화된 삶을 결실하지 못한다. 한 부류는 끈기와 인내가 없어 고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부류는 계속 염려하며 물질주의적 삶을 고수한다. 유일하게 변화된 삶을 결실하는 부류는 더 열심히 노력했거나 더 순종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다.

 

본 회퍼는 역설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삶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은혜에 수반된 엉청난 희생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으며, 따라서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혼자서는 성장 할 수 없다

잔치는 본질상 공동체적이다.

형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멀리한다면 이 또한 방식만 다를 뿐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행동에 불과하다. 루이스는 한 개인을 알아가는 데 공동체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에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예수님을 본받고 섬기고 사랑하려 애쓰는 신자들의 공동체 속할 때에만 당신은 그분을 알라가고 닮아갈 수 있다(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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