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갔을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함께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막 12:28).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이 세 가지 화 있을진저로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시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분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 즉 서기관들에게 세 가지 화를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율법교사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훼손되거나 변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히브리어 성경을 필사하는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해석해 주고 적용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화 있을 진저, 사람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지우고 너희는 손 까닥도 하지 않는구나!
지기 어려운 짐'이란 율법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을 말합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제외하고도 613조에 달하는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출 20:8)에 대해 안식일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대한 규정, 이동이 허용되는 무게에 대한 규정, 맬 수 있는 끈의 종류에 대한 규정을 추가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행위는 불법적인 노동으로 간구했지만 덫에 걸린 짐승을 구하는 일은 허용되었습니다.
안식일에 금지된 법들 가운데 하나는 무슨 끈이든지 안식일에 매는 것입니다. 단 여자들이 허리띠를 매는 것만 허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물에서 물을 긷기 위하여 끈을 매서 길을 수는 없지만 여자가 허리띠를 물똥에 매서 길을 수는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른 손이나 왼손이나 가슴이나 어깨로 무엇이든지 나르면 죄가 되지만 그의 손등이나 발로, 혹은 입으로 혹은 팔꿈치 귀로 또는 머리카락으로, 또는 신발이나 셔츠 소매로 나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정도가 아닙니다. 당시에 율법 교사들이 성경에도 없는 과도한 짐을 안겨주는 것으로 인해 힘들게 할 뿐 자기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긍휼로 인해 구원을 베풀어주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를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화 있을 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이로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비석을 세워 자신들이 선지자들의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0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선지자들의 후손이라고 간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지자들을 죽인 후손들로 간주하였습니다(마 23:34). 그리도 당시에 종교적 지지도자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그들의 조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 보면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창세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곧 아벨의 피에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흘린 선지자의 피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성경 분류법상 처음 책인 창세기로부터 마지막 책인 역대기하에 이르기 까지의 의로운 첫번째 죽음과(창 4:8) 마지막 죽음(대하 24:20)을 말합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로 칭함을 받았으나 그의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고 사가랴는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비판하다 죽임을 당한 의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후 70년경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멸당하므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화 있을 진저 너희 율법 교사여 너히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그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핵심은 놓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은 물로 다른 사람들 조차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초청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회개하는는커녕 예수님과의 논쟁을 통을 통해서 트집을 잡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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