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아론슨'이라는 분이 DASH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저자는 인생에는 GIGO의 원리와 TITO의 원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GIGO의 원리란 garbage in, garbage out이라는 말입니다. 쓰레기를 입력하면 쓰레기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TITO의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TITO의 원리는 treasure in, treasure out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소욕으로 행하는 자와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자는 완전히 다릅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면 어떻게 참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계속 누릴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성령을 좇아서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를 자유로운 상태에 머물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의 자유는 숙명적으로 방종으로 흘러가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한마디로 육체와 성령의 싸움입니다.
본문 16절과 17절을 보세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육체란 자연적으로 타고난 타락한 상태에 있는 본성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필립스는 육체를 저급한 본성 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성령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육체란 우리가 자연적으로 타고난 본질을 가리키며, 성령은 새로 태어남,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둘, 즉 육체와 성령은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내면적인 투쟁이나 갈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일에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어떠한 육체적인 욕망이나 유혹에도 이끌리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서 나무나 돌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는 법을 깨닫게 된 이후 우리의 육체는 확실히 욕망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와 성령은 언제나 맞서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갈등은 치열하고 계속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본성, 육체와 성령,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두 가지가 한 몸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심령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육신은 연약한 상태에 있습니다. 영혼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옛사람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이란 우리가 회개한 다음, 중생한 다음에도 아직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옛사람, 옛 본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그의 육신을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모든 면에서 순종하려 하지만 그의 육신이 있기 때문에 자신 이 방해받고 있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5절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하 습니다. 영적인 바울과 육적인 바울, 속사람의 바울과 겉사람의 바울,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바울과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바울, 이 두 사람이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중생한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이런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런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괴로워하였습니까? 마음으로는 죄에서 살기를 원치 아니하는데 살다보니 아직 도 죄에 매여서 종노릇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죄를 미워하고 깨끗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몸에는 옛날 육신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하고 실망하며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 때만이 아닙니다. 노인이 되어도 싸워야 합니다. 사실 어느 한 순간도 마음 놓고 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선한 싸움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벧전 5:8∼9)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마귀와 싸우는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평생 졸졸 쫓아다니면서 우리를 넘어뜨릴 기회만을 엿보다가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는 것 같으면 들어와서 우리를 자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 편에 서서 힘차게 싸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우리 지체 안에서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전쟁치고 우리 마음의 전쟁만큼 심각하고도 치열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 육체의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19절에서 21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일이 현저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육체적인 일의 죄도 나타나는 법입니다. 본문에 보면 죄목 하나 하나가 나타나 있는데 신약 성경에 이렇게 죄목들이 나열된 구절이 몇 곳 있습니다(막 7:21∼23; 롬 1:8∼32; 딤전 1:9∼10; 딤후 3:2∼5).
이런 죄목 들을 참작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반성해 보는 것은 퍽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이트훗은 본문의 15가지의 죄목을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째, 성적인 죄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둘째, 종교적 죄로 우상 숭배와 술수.
셋째, 형제애 위반으로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넷째, 부절제의 죄로 술취함과 방탕
첫째, 성적인 죄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같이 범죄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 종교적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이고, 셋째, 형제애 위반은 사람에 대한 죄요, 넷째, 부절제의 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절은 성적인 죄인데,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은 공개적 또는 비공개적, 기혼자 사이에 또는 미혼자 사이, 정상적 또는 비정상적인 것을 막론하고 모든 성적인 범죄가 육체의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0절은 종교적인 죄인데, 우상 숭배와 술수입니다. 우상 숭배는 육체의 일로 말하면 음행에 해 당하는 것이고, 육체의 일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상 숭배가 다른 신들에게 뻔뻔스럽게 예배하는 것이라면 술수는 일종의 마술 행위로 악령의 권세와의 밀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사회적인 죄인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인간관계가 파탄되는 여덟 가지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원수를 맺는 것에 대해 라이트훗은 갈라디아 지방의 켈트족은 특히 서로 싸우고 분쟁 하였다고 했습니다. 원수를 맺는 것은 마음에 원한을 품는 것으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고, 이하의 모든 죄목들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분쟁과 시기는 고린도후서 12장 20절에 같은 순서로 나 타나 있습니다. 마음에 원한이 있으면 자연히 분쟁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분쟁은 언제나 퇴폐 적, 파괴적인 다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시기는 열등감의 소산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을 때 자연히 시기하게 됩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것이 곧 시기입니다. 시기는 악의에 찬 분으로 발전하고, 분냄은 당을 짓게 합니다. 시기는 마음의 노여움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의미하고 분냄과 당 짓는 것은 삯꾼이 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어느 당파에 매수되어 당쟁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은 분리함과 이단인데, 당을 지으면 자연히 분리하게 되고 그래서 한 이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투기입니다. 시기가 남을 멀리하는 욕망인데 비해서 투기는 남의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것입니다.
끝으로 무절제의 죄인데, 그것은 술 취함과 방탕함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13장 13절 에도 같이 나타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고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어두움의 일들입니다. 육신을 따르면 자연히 이런 자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 종교, 사회, 음주 등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육체의 일의 목록을 나열한 다음 에 하나의 엄숙한 경고를 합니다. 전에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을 때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함과 의와 절제의 나라이기 때문에 육체의 일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이런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는 자는 그가 소위 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싸우는 일은 세상에 사는 날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싸우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 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 6:13∼18)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과 영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육에 속한 생활을 하는 것이 있다면 깨끗이 씻어버리고, 끊어버리고 축복의 나날을 맞이합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장애물은 내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육신’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적이 내 속에 있습니다. 바로 육신, 육체의 정욕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
인간의 힘으로는 육체의 욕망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성령의 법이 육신의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육신과 환경의 장벽을 넘게 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십시오. 이것이 진리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성령을 좇아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환경이든지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소욕이 커지도록 해야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동반자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은 내가 하게 되는데 복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서 선택할 때 복된 삶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좇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성령을 좇아 살면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첫 번째, 우리의 육신의 삶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이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을 말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정과 욕심이라도 거부해야 합니다. 나 혼자서 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해야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스스로 행하는 것은 죄입니다. 이것을 구별하는 삶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삶도 철저히 주님의 힘으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는 죄 때문에 인간은 괴로움을 당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8-20).
육신은 타고난 내 본성, 스스로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하고 선한 것 같지만 나중은 다 ‘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힘이 아닌 내 힘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두 번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면 은혜 아래서 살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은혜로 산다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산다는 것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내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게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 속에서 주님이 사신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주권이 주님께 있다면 삶의 모든 것에 있어서 주님께 그 뜻을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로 산다는 것의 두 번째 의미는 살아가는 모든 원동력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주가 돌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입니다. 작은 오차도 없이 우주가 운행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살아가는 모든 능력은 주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사도 바울은 수 많은 일을 했지만 하나님이 하셨기에 그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연약함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연약한 자에게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세 번째, 성령을 좇아 행하면 열매가 달라집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육신의 열매는 뚜렷합니다. 구별이 분명합니다. 육신으로 산다면 그 열매가 맺어집니다. 육신의 열매는 땅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또한 남을 해치게 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열매를 맺으면 나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단수입니다. 열매들이 아니라 하나, 열매(the fruit)입니다. 즉 성령을 좇아 산다면 성령의 열매가 절로 맺어집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인간 속에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또한 남을 유익하게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나도 잘되지만 남도 유익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겠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줄기에 붙어 있다면 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열매를 구하기 보다 성령에 붙어, 성령을 좇아 사십시오. 절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좇아 사는가, 나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서 되어지는 것들은 염려나 근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 속에 사랑을 부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승리하며 복된 삶을 살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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