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눅 11:1-4),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6. 22.
반응형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단순한 특강이 아니라 실습에서 나온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제자들은 바쁘신 중에도 항상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어려울 때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가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그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했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셨을 때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여,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 것을 들어 보면 그가 어떠한 사람이며 무엇을 위하여 사는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할 줄 몰라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면서 제자들은 우리의 기도와 차원이 다른 것을 느끼면서 늘 궁금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에게 주님처럼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새로운 차원의 기도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회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접속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누가복음 111-4절은 기도의 내용, 5-8절은 기도의 방법, 9-13절은 기도의 응답에 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은 나의 순종적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내 인격, 가정, 교회와 사회에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목적이 나의 목적이 되고, 주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고, 주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본문 2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주문을 반복하면 효과가 나타난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획신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주권을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찬양과 감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뜻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가 임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때 상응하는 인간에 대한 축복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개인과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육신의 양식을 채워달라는 기도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영혼의 양식을 사모하는 기도입니다. 육체적인 양식이든 영적인 양식이든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도 사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영적으로 새롭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동시에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사랑을 베풀게 됩니다. ''는 하나님께 ''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그 사람의 죄는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는 선입견을 갖는 것은 손해가 많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두 번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가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 했고, 그 사람이 얼마나  못했는가 거기에 묶이지 말고 나를 사랑해주신 그분의 사랑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그저 나누어 줄 때 용서가 가능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용서의 극치입니다. 신앙의 최고봉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따라 의지적으로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 때문에 함게 모이는 것을 폐하도록 하는 것이 마귀의 작전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불편한 관계의 상태로 죄를 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차라리 안 만나는 것이 좋은 것 아닐까요?

 

물론 충분히 이해가 되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관계가 좋기만 했을까요? 예수님이 지도자였지만 제자들은 서로 다투고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가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누가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가지고 길에서 다투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성도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은 사단이 주는 것으로 삶의 우선 순위를 바꾸어버립니다. 시험은 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는 상태에 있을 때에만 아버지와 자녀의 친밀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쉽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6:13"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송영구가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