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오는 많은 시들은 포로기 이후에 쓰여졌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심판
시편에서 심판은 온 우주가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심판)하소서(35;24). 그리스도인들은 그 법정을 자신이 피고석에 앉아 있는 민사재판으로 그립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원고로 앉아 있는 민사재판으로 그린다는 점입니다. 전자가 바라는 것은 무죄 방면이나 사면이지만, 후자가 바라는 것은 커다란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완전 승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35:23)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그녀는 자신이 소송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눅 18:1-5).
시편과 예언서들이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승소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9:12, 68:5, 72:2, 76:9, 82:2-3).
시편 50편에서 하나님이 고소인으로 등장합니다(6-21절). 대부분의 경우 시편 기자는 성난 고소인으로 나타납니다(7:3-5).
내가 옳다라는 확신과 나는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이라는 확신은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편이 말하는 저주
시편 109편은 자신의 원수가 다른 악인의 다스림을 받게 해달라고, 사탄이 그의 오른 쪽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탄은 고소자, 밀고자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계속 기도합니다. 그 원수가 심문을 받을 때 유죄를 선고 받아 형을 치르게 해주시고,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7절).
여기서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인간인 재판관을 향한 탄원을 의미합니다. 즉 그 탄원 때문에 오히려 상황이 더 나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의 명이 짧아지게 히시고, 그가 하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하소서(8절). 그가 죽을 때 그의 자식들은 거지가 되게 하소서(10절), 그에게 동정을 베풀 사람이 한 명도 없게 하소서(12절). 그의 부모가 지은 죄도 언제나 주님께 기억하게 하소서(14절)라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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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7편 9절에서 시인은 바벨론 사람의 어린 아기를 잡아다가 돌바닥에 머리를 매어치는 사람은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9절).
69편 22-23절에는 이보다는 순화된 악의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시편 143편 12절에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죽여 없애주시것), 139편 19절에는 하나님이 그 악인을 죽여 어ᅟᅧᆹ애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즐겨서 그들을 배 아프게 만들어야 비로소 자신의 행복이 완전해진다는 뜻입니다.
도덕세계에는 더 높은 곳일수록 더 위험한 곳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그때에 사람의 말이...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0-11). 시편 기자의 분노는 단순한 분노와는 무언가 다릅니다.
시편이 말하는 죽음
시편 17:14은 악인에 대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아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현세에서 좋은 것을 누렸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떠올릴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의 말씀과 대조를 이루는 누가복음 6장 24절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시편 17편 1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그 악인을 넘어뜨려 달라고 기도하는데, 14절에 이르러는 예 그들을 뭉개 주십싱로. 그러나 먼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귿르의 운명이 ㄷ아하도록 해주십시오. 악인을 죽이시되 살아있는 동안에도 나쁜 일을 당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시편 49편 7-8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아무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30:3절의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라는 말씀은 단순히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 가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116편 3절의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렀으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다는 말씀은 죽음이 내게 덫을 놓았고, 나는 죽어가는 사람처럼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는 듯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죽음의 문턱에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천국 소망을 하나의 보상으로 사용할 때는 쉽게 허물어지고 맙니다. 과거의 성직자들의 지옥불 설교를 들어보면 그토록 공포심을 유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전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심히 놀라워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성직자들은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신중함과 자기 중심적인 공포심에 호소를 한 것으로, 사실 그런 수준에서 생겨난 믿음은 우리의 행동에 항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여호와의 아름다움
당시에 회당에서 하는 일은 성전에서 하는 일은 상당히 달랐습니다. 회당은(눅 4:20, 행 13:14) 유대인의 회합 장소로 종종 특별한 방문객에 의해 율법책이 낭독되고 연설이 행해지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희생제사를 드리던 것으로 야웨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예배가 드려지던 장소였습니다.
제게 시편의 가장 큰 가치는 다윗을 춤추게 만든 즐거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이 표현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자주 행하게 되는 마지못한 예배참석과 힘없이 처진 형식적인 기도생활과 비교해서 하는 말입니다.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원한다. 이 시인에게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과 예배 행위 자체가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편 기자들의 시에는 그분의 현존을 향한, 그분을 너무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평생을 성전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고 싶어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원했던 그들의 갈망은 마치 욱체적인 갈증과 같았습니다(42:2).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온전히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곳이었습니다(50:2). 그분을 만나지 못했을 때 그들의 영혼은 마치 물없이 바싹 마른 황폐한 당과 같았습니다(63:1). 그들은 오직 그곳에서만 보금자리를 얻은 새처럼 쉴 수 있었습니다(84:3). 주의 집에서 즐겁게 보낸 한 날이 그들에게는 다른 곳에서 보낸 평생보다 나았습니다(84:10).
시편이 말하는 꿀보다 더 단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꼴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9:10). 이 표현이 하나님의 자비나 도움 또는 성품에 대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종교의례처럼 자기 나름의 암적인 생명을 가지고 자기 존재 목적을 도리어 해칠 수 있습니다. 찰스 윌리엄스는 “수단이 자율적이 되는 순간 치명적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신적 율법에 구현되어 있는 신적 정신의 질서는 그에게 그야말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는 그 율례들을 즐거워합니다. 그것들을 연구하는 일은 그에게 부귀를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들은 꿀처럼 답니다. 그것들은 은이나 금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사람의 눈이 열릴수록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들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이 말하는 묵인
26편 4절을 보면 자신은 허망한 일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간사한 사람들과 동행하지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우상숭배자들을 미워했습니다. 도둑과 연합했다는 이유만으로 책망합니다(50:18).
침묵은 좋은 도피처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묵인에 대한 이러한 경고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시편에는 혀로 짓는 죄들을 고발하는 내용이 많습니다(5:9, 10:7, 12:3, 36:3, 55:21, 102:8).
시편이 말하는 자연
시편 기자들의 자연관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요소는 대다수의 고대 작가들과 공통된 것이고, 둘째 요소는 당시에는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대단히 드문 것이었습니다.
1. 그들은 대다수가 농부인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흔히 유대인들이라고 하면 어떤 금융업이나 소매업 또는 대금업 등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러한 작업에 종사하게 된 것은 토지 소유를 금해 땅과 거리가 먼 직업들을 가질 수 없었던 중세 시대 때부터입니다.
2우리가 알 듯이 유대인들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연과 하나님을 분명하게 구분했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찬양
감사로 제사를 드래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50:23). 시편 54편은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워하시고(1절)로 시작하는데, 6절에는 마치 거래 조건 인양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내가 하루 일곱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119:164).
유대교에서 제사의 핵심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황소와 영소를 드린다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니이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주신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찬양에 대한 아주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오랫동안 놓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찬양을 경사나 경의를 표하는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찬양은 기쁨이 자연스럽게 너쳐나는 일이기도 하다는 도 한 가지 사실은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제가 놓치고 있었던 사실은, 사람들은 자기가 높이 평가하는 대상을 찬양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타인에게도 그 찬양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찬양하기 좋아하는 까닭은 찬양이 우리릐 즐거움을 표현해 줄뿐만 아니라 완성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시편을 읽을 때 두 번째 의미, 숨겨진 의미, 성육신이나 수난이나 부활이나 승천이나 기독교의 중심 진리들과 관련된 알레고리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 방법에 대해 현대인들은 깊은 불신을 갖고 있는데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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