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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성경에 나타난 자살 유형

by liefd 2024.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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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안재환과 최진실 성도의 자살이 연일 방영된 장면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들의 영정 앞에 놓여진 성도 ○○○라는 푯말은 기독교인이 자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표지였다. 그리고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만천하에 질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 목회자들의 수많은 설교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키는 것과도 같아 부끄러움을 넘어 목회의 무력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의 문제로만 치부해 목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진솔하게 영혼을 지키어 돌보는 일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 많은 성도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그들의 요청에 귀를 막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기독교인의 자살은 최근에만 있던 사실이 아니라 오래도록 행해져 왔다. 다만 그 성격의 특성상 드러낼 만한 일이 아니어서 가리워지거나 편의상 다른 사고로 적당히 처리해 버린 것이다. 실제로 드러내기에는 곤란하지만 필자는 상담하면서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직분자들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유족들의 가슴아픈 사연을 여러 차례 상담하는 임상에 직면하고 있는 터다.

 

자살은 스스로 생명을 끊는 현상이다. 자살은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이 절망적으로 자기의 삶을 포기할 때 일어나는 극단적인 행동이다. 현상적으로 자살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죽음을 선택한 의지적 행동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대부분 개인의 부정적인 의지력이 작동되면서 긍정적인 의지력은 마비된 상태에서 행해진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결국 자살은 평소에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순간적으로는 정상적인 판단의 기능이 멈춰서는 병리적 상태에서 자살이 실행되는 것이다.

 

이제 자살은 일반인들만 아니라 기독교인에게조차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현실의 마지막 출구나 해결책으로 활용되는 편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 목회자들은 자살에 대하여 그 현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공부하여 목회적인 대책을 세우는 노력을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성경에 나타난 자살의 유형을 정리하면서 그 실마리를 풀어 나가기로 하자.

 

성경에는 실로 다양한 자살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여기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성경에서의 자살은 죄를 지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마치 죄의 결과로 여겨지며, 이것이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돼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당한 자살이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봐야 한다. 이런 자살을 다음의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 있다,

 

1. 자기처벌성 자살: 가롯 유다(27, 1)

 

예수님의 제자 중 스스로 자원하여 나섰던 가롯 유다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한 자살자다. 그의 자살은 신약의 대표적인 자살이기도 하다. 가롯 유다는 무죄한 예수님을 배반하여 판 죄를 뉘우치고 은 30개를 반환한 뒤 성전에서 나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27:5)’. 부정한 수입은 양심의 가책을 해소하지 못했고, 반역의 돈을 반환했으나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혀 황급히 성전에서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힌놈의 골짜기 절벽 위에서 목을 맸을 것이다(1: 18).

 

실로 가롯 유다는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제자였다. 그의 자살 원인은 여러 가지로 추정할 수 있지만, 일단은 그의 탐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탐욕은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께 바르는 것을 본 그가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어찌하여 주지 않느냐고 비난한 데서 드러난다. 요한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그에 대해 고발했다. 가롯 유다의 말에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두둔하여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12:7)’고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가롯 유다의 자살은 지나친 욕심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런 그의 탐욕은 급기야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교훈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탐욕에 물든 그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경고를 여러 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가롯 유다의 자살은 지나친 욕심이나 탐욕이 자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물론 가롯 유다의 자살을 두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야망이 수포로 돌아가자, 일종의 보복성으로 저들의 음흉한 계획에 야합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유다가 돈 몇푼 때문에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다 해도 이 또한 자신의 욕심이 지나쳤던 결과라는 범위를 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도피성 자살: 사울(삼상 31)

 

사울은 도피성 자살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도피란 현실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여 회피하려는 행위로, 대개 자존심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블레셋 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적군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할례 없는 이방인의 손에 잡혀 모욕적인 죽음을 당할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으로 스스로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져자결했다(삼상 31:4).

 

사울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미약한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하나님은 이런 미약한 지파에서 왕을 선출하시어 겸손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사울은 처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을 때 자신의 미약함을 알고 행구 사이에 숨는 겸손함을 보였으나, 왕이 된 후 교만해지기 시작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거역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서 그를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정도가 되기에 이른다.

 

사울의 자살에서 우리는 지나친 교만의 말로를 보게 된다. 지나친 교만은 자신을 깨닫지 못해 마침내 자신을 개선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는 교훈이 생긴다. 그의 교만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됐고, 급기야는 하나님도 잊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 악신이 들어가서 늘 번뇌하게 됐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실 것을 알고 다윗을 죽이려 들기에 이른다.

 

실로 사울의 자살은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지나친 교만이 자살로 이어지게 됐음을 본다. 교만은 자신이 중심이 돼 다른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교훈도 무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잠언 16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했을 것이다. 자신을 끝내 낮추지 못하는 교만이야말로 누구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시해 스스로 자살로 삶을 끝내고야 만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3. 보복성 자살: 시므리(왕상 16)

 

시므리의 자살은 쿠데타 실패로 인한 자살이다. 북이스라엘의 엘라왕이 폭정을 행하자 시므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엘라왕이 술에 취해 대신들과 흥청거릴 때 시므리 장군이 그를 쳐 죽였다. 그러나 집권한지 7일만에 백성들이 시므리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오므리를 등극시키고 시므리가 머물던 왕도를 포위했다. 다급해진 시므리는 왕궁에 불지르고 그 속에서 죽었다(왕상 16:18).

 

억지로 오른 왕위가 그다지 순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백성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몹시 분개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성이 함락됨을 보자 자신의 왕궁을 불사르고 스스로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왕상 16:15-20). 시므리의 치세 기간은 이스라엘 역대 왕 중 가장 짧은 7일에 불과했고, 더 나아가 훗날 시므리라는 이름은 구데타를 일으킨 악명 높은 왕의 대명사가 됐다.

 

시므리의 자살은 지나친 권력욕으로 인해 쿠데타를 일으켜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형이다. 권력욕이란 지배력의 다른 모습으로, 열등감이 그 근원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이 지배하려 든다는 점에서 지배력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더욱이 그의 자살은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성을 불지르고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사실에 근거하면 보복성 자살에 해당한다. 지나친 권력욕을 자살로 해결하려는 비참한 보복적 자살이 아닐 수 없다.

 

4. 운명론적 자살: 아히도벨(삼하 17)

 

아히도벨은 다윗 왕이 신임했던 부하들 중 하나다.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하고 왕위를 차지하려 했을 때 압살롬에게 모략을 제공한 자가 아히도벨이다. 나중에 다윗의 충신인 후새의 전략에 몰려 자신의 모략이 수포로 돌아가자 아히도벨은 나귀타고 귀향해 스스로 목매 죽었다(삼하 17:2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모반에서 아히도벨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의 반역은 다윗 왕에게 뼈아픈 일격이었을 것이다. 압살롬은 다윗에 대항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아히도벨과 협의한 후, 다윗왕의 또다른 부하인 후새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왕에게 은밀히 충성하고 있던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획에 반대하고, 대신 실제로 다윗에게 유리한 자신의 계획을 제안함으로써 압살롬의 거사에 등을 돌렸다. 압살롬이 후새의 계획을 받아들이자 아히도벨은 후새가 자신을 속였음을 깨닫고는 압살롬의 부대가 비참히 패할 것을 예상하고 자살했다(삼하 15:31-37, 16:20-17:23).

 

아히도벨의 전략은 다윗왕만 잡으면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도 다 잡을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실제로 다윗왕만 잡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판이었다. 그의 기막힌 전략은 압살롬도 마음에 흡족해 했으나, 아히도벨은 자신의 전략이 실패하게 됐음을 알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상황을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좌절이요 절망 뿐이다. 그런 절망이 끝내 그에게 자살을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그의 절망이 상황을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좌절에 이르고 극도로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상황을 해결하려는 과히 운명론적 자살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운명론적 자살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균형있게 살아가지 못하고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펼쳐가다 상황을 역전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극심한 좌절에 이르러 자살로 삶을 끝내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5. 이타성 자살: 삼손(16)

 

삼손의 자살은 거의 영웅적인 자살이다. 그런 이유로 삼손의 자살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삼손도 자살한 사람이다. 물론 그의 자살은 하나님의 백성을 귀찮게 하는 블레셋을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죽이고 자신도 죽는 죽음이라는 사실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이스라엘의 민족 영웅으로 묘사된 인물인 삼손은 특별히 구별된 나실인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전설적인 전사로서 그가 거둔 엄청난 전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초기 지파동맹시대(BC 1200-1000) 상당한 기간 동안 블레셋인들에게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는가를 암시한다. 삼손은 ‘20동안 판관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의 부모는 단 지파 출신으로 예루살렘 근처 소라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중 신의 현현(顯現)을 통해 그들이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를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나실인으로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실인은 독한 술을 마시지 않고, 머리털을 밀거나 깎지 않으며, 사체(死體)를 만지지 않기로 서약한 이른바 구별된사람이다.

 

물론 삼손의 죽음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은 사실이다.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그가 신전에서 죽은 것은 자살이 아니라 잠시 포기했던 원래의 사명을 되찾은 행위라고 한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비평가들과 심지어 탈무드 시대(1세기부터 시작) 일부 유대인 해석가들까지도 삼손의 이야기를 전설 또는 서사시로 간주한다. 그들보다 좀 더 보수적인 주석가들은 그 사건들의 비현실성과 본문의 민담 양식을 인정하면서도 사담에 담긴 역사적 진리의 핵심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대중의 상상력으로 인해 윤색되고 랍비 문학의 영향으로 살이 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삼손의 죽음은 그 현상적으로 볼 때 자살이 틀림없다. 다만 그의 자살은 단순히 운명을 비관하여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깨달은 뒤에 마지막 온 힘을 쏟아 적을 무찌르는 형태의 죽음이기에 이타성 자살로 분류돼야 할 것이다. 물론 삼손의 죽음은 생각해 볼 여지를 여전히 남기고 있다. 쉽게 자살로 규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비록 절대적인 선은 아니라 해도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는 헌신이요 택한 백성의 생명이나 안전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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