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행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감사의 크기가 행복의 크기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이 기억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아이의 입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가르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
맥추절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첫 열매의 절기입니다. 신명기 16장 10, 16절에서 칠칠절이라고 하는 것은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양식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감사의 표시로서 명령적 감사를 뜻합니다. 한 해의 수확을 끝낸 기쁨 속에서 그 수확을 가능케 해 주신 하나님께 기뻐하며 감사드리는 축제입니다.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반응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평가하시며 복을 결정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감사의 비밀을 깨달았기에 빈곤에 처하거나 비천에 처하거나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만족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사람과의 관계에서 친사회적인 효과를 일으켜 우리 마음의 독소인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증오, 이기심, 방탕 등을 선하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이며 이 평강은 감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A. 토리 박사는 “감사 충만이 곧 성령 충만이다”라고 했다.
염려에 대한 치료 방법은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간구에 대한 응답의 조건이 바로 감사입니다. 염려함을 감사함으로 바꾸어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서인 『탈무드』를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만족하면서 항상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만족하면서 항상 감사하는 사람이 제일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감사가 없으면 감사가 주는 감격과 기쁨이 없고 평안과 자유함이 없을 것이며 매사에 원망과 불평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은 피폐해질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에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또한 우리가 감사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들 마음 가운데 미련한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남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우리가 감사로 무장하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남도 기뻐하고 나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
환경을 바라보면 절망이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모든 환경을 주장하시는 전능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뉴욕대학부속병원 재활센터 입구에 걸린 어떤 장애인이 쓴 기도 시가 있습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싶어 성공을 구했는데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표현하지 못한 기도는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기적을 베풀어 줄 때 감사한 것이 아니라 먼저 감사함으로써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하버드대학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일자리를 얻게 된 사람들 중에 85%는 태도 때문에 직장을 구했고 15%가 똑똑함과 지식 때문에 직장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머리카락이 빠져서 없는 분들을 대머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즘같이 헤어스타일을 통해서 자신의 멋을 드러내는 시대에 머리카락이 빠져서 없다면 정말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것입니다
대머리를 가지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제목이 있습니다.
첫째, 여성에게는 거의 없는, 남자에게만 있는 현상이므로 감사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대머리가 됩니다. 날마다 앞이마를 쓰다듬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대머리인 사람은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머리로 구걸하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보았기 때문입니다
넷째, 목회자들 중에 대머리가 된 사람이 비교적 많습니다. 엘리사도 대머리였습니다.
다섯째, 비누, 샴푸, 물을 많이 절감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여섯째, 하나님을 편하게 해 드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 내용은 웃자고 하는 감사의 내용입니다. 머리카락 한 올 심는 데 대략 1만 원이 든다면 100개를 심으려면 100만 원이고, 천 개를 심으면 1,000만 원이 듭니다. 보통 사람의 머리카락 숫자가 20만 개 정도라고 하니 머리 전체에 다 심으려면 머리카락 값이 20억이나 됩니다. 그렇다면 머리카락만 제대로 있어도 우리는 20억 부자가 되는 셈입니다. 결국 생각의 차이가 감사를 만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능케 하는 삶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일이 잘 풀리고 환경적인 조건이 좋아졌다는 이유 때문에 느끼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인간적인 조건과 상황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기쁨입니다. 어떠한 환란과 역경에도 변하지 않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 기쁨의 삶은 감사할 때 가능한 삶이 됩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24시간 기도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범사에 변함없이 언제나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의지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는 삶이 기도의 삶이며 환경에 상관없이 기뻐하는 삶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두 가지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Think(생각)가 Thank(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고 믿음의 크기입니다
사람들의 감사에는 3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분명히 감사할 일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감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감사할 만한 일이 없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세계적으로 날지 못하는 새의 종류가 40여 종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새는 바로 키위입니다. 새는 날아야 새입니다. 날지도 못하는 새를 새라고 말하기는 뭔가 어색함이 있습니다. 천적이 없어서 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새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은 고난이 내게 주는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고난이 있다는 것은 삶 속에서 어려운 일이지만 그 고난이 내 삶에 진정한 날개를 달아 줄 수 있다면 그 고난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요소가 됩니다. 고난이 우리 삶에 커다란 유익을 준다면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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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속담 중에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 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돌들 때문에 흘러가는 물에서 아름다운 시냇물 소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순종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을 통해서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순종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순종으로 이끌어 가는 통로가 고난이라면 분명 그 고난은 우리에게 큰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으로 유명한 조셉 머피 박사는 “하루 한 번 자신이 받은 모든 은혜에 감사하라. 그러면 은혜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기관에서 자녀들이 누구를 통하여 상처 받는가 조사했더니 아버지에게서 40.7%, 어머니에게서 32.1%라는 통계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처 받는 이유는 ‘함부로 하는 말’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에 많은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감옥에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 마음에서 기쁨도 사라지고 감사도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삶에 용서가 있을 때에 감사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기 전이라도 내가 받은 은혜 때문에 감당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때린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맞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처 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때린 사람은 용서를 구하고 맞은 사람은 용서를 해 주고, 상처 준 사람이 용서를 구하고 상처 받은 사람이 용서를 해 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고는 우리 영혼 속에 깊은 상처가 치료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용서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용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미운 사람을 용서하는 그 순간 여러분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자유함을 얻게 되며 감사가 회복될 것입니다
불평은 감사의 적이다
원망과 불평 바이러스는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이 주신 복 모두를 잃어버리게 하는 무서운 영적 독소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이웃과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게 만드는 아주 무서운 저주요,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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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불평은 다음 4단계로 구분됩니다.
첫째, 의식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매사가 다 불평입니다. 자기가 불평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 못 하여 항상 삶이 불평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둘째, 의식하면서 불평하는 단계입니다.
이 수준은 불평이라고 의식을 하면서도 그 불평을 절제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불평하는 단계입니다.
셋째, 의식하면서 불평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불평을 의식하면서 그 불평을 자제하는 단계입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감사훈련이 바로 이 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의식하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감사훈련의 최종적인 목적이 되겠습니다. 이 단계는 불평의 환경에도 불평이 아닌 감사가 나오는 단계입니다. 의식하지 않아도 불평 대신에 감사가 나오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까지 나아가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축복이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불평하면 축복이 박탈당합니다. 또한 불평으로 인한 또 다른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평으로 인해 가나안의 축복이 박탈당하고 축복받을 그 시점이 40년 후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오늘날 불평하면 축복이 박탈당하거나 축복이 도망가게 됩니다. 감사는 축복을 당겨 주는 능력이 있지만, 불평은 축복을 멈추며 도망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은 하나님을 욕하는 행위이며 멸시하는 행동입니다.
불평이 우리 삶 가운데 치명적인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귀에 들리는 대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염려되는 모든 상황일 때에 감사함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감사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완전히 장악해 버리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감사한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또한 그 은혜에 감사한 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았다 할지라도 불평하면 당장 은혜를 까먹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복을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불평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복은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비교의식은 감사를 무너뜨린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전 12:14~17) .
비교의식은 행복을 방해하는 적이며 감사를 방해하는 방해꾼입니다. 비교의식이 아닌 창조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십시오. 비교의식은 하나님의 코드가 아닌 마귀의 코드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속이고 죽이고 멸망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비교의식은 우리를 좌절하게 합니다. 비교의식은 모든 분쟁의 원인이 되고 시기와 미움, 절망, 분노, 좌절을 불러 일으켜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비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무엇을 소유해도, 어떤 환경에 처해도 자족하지 못하며, 늘 열등감에 빠져 패배주의자로 살게 됩니다. 마귀의 코드가 비교의식 속에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코드는 자족이며 감사입니다. 감사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캘리포니아 데이비스대학 로버트 에먼스 교수는 ‘감사를 습관화한 학생의 연평균 수입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많으며 감사를 습관화한 사람의 평균 수명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길었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약점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에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데이비스대학 로버트 에먼스 교수는 ‘감사를 습관화한 학생의 연평균 수입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많으며, -
믿음의 반응을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바로 감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했던 그 아홉 사람들에 대한 작자 미상의 글이 있습니다. 「그 아홉의 변명」이라는 글입니다.
한 사람은 “의사와 제사장에게 가서 이것이 정말 나았는지 정밀검사를 해야겠다” 해서 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혹, “재발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런고로 며칠 두고 봐야겠다”. 정말 나았는지 좀 기다려 봐야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내 병은 본래 문둥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였던가 보다”.
또 그다음 사람은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았을 거야.” 이건 자연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병 걸리기 전 가지고 있던 밭과 재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이제 먹고 살아야 하니 그걸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 버린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병에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수절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한 것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또 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해 준 것이 없잖아. 안수를 해 준 것도 아니고, 어루만져 준 것도 아니고, 안찰을 한 것도 아니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그저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라’ 한 말씀밖에 안 했는데 무엇을 감사하라는 말이야” 하며 가 버렸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유명한 랍비들도 이런 것은 아마 가능할는지 몰라.”라며 예수님의 능력을 상대화시켜 버렸습니다.
또 한 사람은 “이 모습대로 갈 수는 없잖아. 가서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께 가야지.” 그래서 가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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