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공인된 거짓말이 몇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자리를 양보 받은 노인이 “에구, 괜찮은데”라고 하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중국음식집에서 “출발했어요. 금방 도착해요”라고 하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대학 수석 합격자가 “그저 학교 수업만 충실히 했을 뿐이에요”라고 하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음주운전자가 “딱 한 잔밖에 안 마셨어요”라고 하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간호사가 “이 주사 하나도 안 아파요”라고 하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옷가게에서 “어머, 너무 잘 어울려. 맞춤옷 같아요”라고 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딱이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옷가게에 가면 “이 옷 아줌마 꺼네”라고 합니다. 딱 맞는 옷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에 속지 마세요. 그러나 정말 그 옷에 딱 맞는 사람, 그 나라에 딱 맞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맞춤형’이란 말도 많이 씁니다. 그 사람에게 적합한 상품이나 물건을 만들어준다는 뜻입니다. 맞춤형 복지, 맞춤형 교육, 맞춤형 보험까지 있습니다. 나에게 딱 맞는 상품이나 물건이 있다면 이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한국여자 골프는 왜 강한지 아십니까? 1988년 최초로 미국 LPGA에서 우승한 한국인은 당시 32세의 구옥희입니다. 지난주에는 미국 최고 권위의 US 오픈에서 지은희선수가 우승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LPGA에서 한국계선수가 82승을 하였습니다. 지난해에는 한국선수들이 LPGA 9승을 하였습니다. 신지애선수는 지난해에 3승을 하여 통산 9승을 하였습니다. 신지애선수는 목사님의 딸이어서 더욱 관심이 갑니다. 한국 여자선수들이 골프를 잘 하는 것은 한국 특유의 올인 문화가 그 원동력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극성도 한 동력입니다. 그래서 ‘피겨맘’이란 말도 있고, ‘골프 대디’라는 말도 있습니다.
골프는 90%가 멘탈 게임이라고 합니다. 테니스, 육상, 수영 등은 체격이나 체력이 서양인을 따라잡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골프는 정신력이 체력보다 더 강조됩니다. 골프는 힘과 섬세함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프는 비교적 체격이 적은 한국여성에게 적합한 스포츠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적합한 운동, 일,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 것은 중요한 성공의 요건입니다. 여자 양궁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인 손기술’이 양궁을 잘 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양궁에 딱입니다.
시편 96:8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라고 합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적합하고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이란 뜻입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유데토스’라고 하는데 ‘잘 놓여 있는’, ‘적합한’, ‘순응하는’이란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천국에 잘 놓여 있는 적합하고, 순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자가 합당한 자입니다.
60절에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전파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이유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 전파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일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자들이 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이 문구는 누가만의 것입니다. 누가는 회개의 긴박성으로부터 전도의 긴박성으로의 바꾸어갑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의무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기 위한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 전파입니다.
각 시대마다 시대에 합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때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엘리야 시대가 끝나고 엘리사 시대가 됩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가시자 사도들이 예수님이 남기신 일들을 대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시대적 인물을 따로 준비하시고 그 시대에 적합한 인물들을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는 예나 지금이나 합당한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다니엘 12:3에는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한 자가 누구입니까? 전도자입니다. 전도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전도자가 지혜 있는 자보다 더 빛이 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는 교회는 단순히 화해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기만 하는 장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신문사나 방송국은 소식을 받아 전해 주는 곳이지만 교회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그 말씀 때문에 몰려드는 장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전혀 새로운 사회적 완전체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며 역사에 의미를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시편 118:17에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죽을 자격이 있습니다. 살아서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국민일보에서 한 설문조사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내가 해본 가장 좋았던 전도방법은?’이란 설문에 만날 때마다 전하고 힘들 때 기도해주기, 맛있는 음식 함께 먹기, 성경 등 문자 메시지로 보내주기 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보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특별한 기술보다 전파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파에 대한 관심입니다. 전파에 대한 열정과 간절함입니다. 열정과 간절함이 있으면 누구나 전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소식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오래 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교회에서 학교가 있는 곳 까지 주일 저녁이면 장시간 운전을 해야 하는데 너무 피곤하여 졸음이 왔다고 합니다. 사모님과 함께 오면서 좋은 졸음방지법을 개발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을 정해놓고 계속 험담을 하면 졸음이 싹 가신다고 합니다. 물론 장난삼아 한 말이겠지만 사람들은 남의 얘기를 하면 자던 잠도 깹니다.
험담은 어떤 사람의 정보를 남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험담전파는 열심히 합니다. 남의 험담은 너무 재미있습니다. 돈 안들이고 제일 재미있는 것이 험담이랍니다. 험담을 전파하는 것만큼 열정과 재미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 아마 하나님의 나라가 금방 확장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다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최우선인 자가 합당한 자입니다.
62절에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데 첫째 사람은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둘째 사람은 자기 가족과 먼저 작별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 하니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장사’는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율법을 공부하는 것보다,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유월절에 제사드리는 것보다, 할례를 시행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를 장사지낸다는데 반대할 수 없는 적절한 명분입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의 명분은 하나님 나라의 명분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족 작별’은 집을 나가지 전에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아무 말 없이 나가면 금방 실종 신고라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작별인사를 하면 인사하는 중에 만류할 수도 있습니다. 인사하다가 발목이 묶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쓴 불평의 글이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집을 나가면 출가라 하고 내가 집을 나가면 가출이라 한다.’ 그렇습니다. 가출은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고 집이 싫어서 나갈 때를 말합니다. 출가도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고 나가는 경우가 있겠지만 집이 싫어서 작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카를로 카레토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창세기 22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사라와 의논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라와 의논했다면 사라가 분명히 말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발목을 잡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은 아들이나 아내보다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일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우선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제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에 하나님 나라 제일주의로 세상의 일을 뒤로 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 최우선이 되지 않으면 결코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최우선이 되지 못하면 전도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 향기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편지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최우선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 우선법칙을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는 말은 농경문화의 산물입니다. 기원전 80년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드(Hesiod)의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밭이랑을 곧게 가는 것입니다. 밭이랑을 매면서 뒤를 돌아보면 이랑이 곧게 될 수가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의 삶에 바른 동기는 무엇입니까? 57절에 보니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말은 제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5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네가 나를 따르려하면 집도 절도 없는 존재가 되고 머리 둘 곳도 없는 존재가 될 텐데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다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따르겠다는 것은 선생인 나도 이 세상에 있을 곳이 없는데 너 또한 그렇게 하겠느냐?” 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주님을 쫓겠다하면서도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성공시키는데 동기를 둔다면 그런 동기는 성공할 수 없는 동기입니다. 주님을 쫓는 동기가 이기적인 목적과 세상적인 야망을 달성하고 주님을 이용해서 세상적인 욕구를 충족해본다면 그 사람의 동기는 성공할 수 없는 동기입니다.
주님을 쫓는 동기는 하나님을 높이고 성공시키는데 두어야지 주님도 바르게 쫓게 되고 그 사람의 동기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요건에 대해 주님은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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