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3장 12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에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신자의 삶은 단순히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D-DAY)이 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불에 타서 사라지고 없어지고 맙니다. 따라서 언젠가 불에 타서 없어질 그것에 너무 집착하거나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도 현재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모든 것이 다 필요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다만 일시적인 것들을 영원한 것들을 위한 기회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 축복받고 행복하게 사는데 있지 않습니까? 그 이상 다른 어떠한 것을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도 신자가 이 세상에서 축복받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분명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조건이 있습니다. 언제나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의 생활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3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의가 제대로 시행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신자의 진정한 행복과 축복의 상태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그날 저기”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무리 이 세상이 살기에 좋아보여도 “지금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저기”를 사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4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새하늘과 새땅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역시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같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하는 것이 너무 황당하고 터무니 없는 그런 어떤 것으로 여겨지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현실에 대한 고통과 아픔을 도피하는 것으로 있지도 않은 그런 세계를 기대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을 분명히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신비한 비밀이 있습니다. 어떻게 눈으로 본적이 없는데 그것이 마치 있는 것처럼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우리 앞에 실제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정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떠한 벽에 부딪히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금요일 생활고를 비관한 주부 손모씨가 세 자녀들을 아파트 14층 창문 밖으로 던지고 자신도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일로 인해 우리는 많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들을 생각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요즈음은 자식들마저 죽이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즈음은 이혼 할 때도 서로 자녀를 맡지 않겠다고 서로 미루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전에는 서로 자녀들을 맡겠다고 소송을 벌였는데 이제는 당신이 아이를 맡으라고 떠맡기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주부 손 모씨가 얼마나 벼랑끝에 몰렸다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살 자신이 없고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그 역시 새 하늘과 새 땅을 분명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 하반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언제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죄악을 멀리하고 흠없이 살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어떠한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좇기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어떠한 강박관념이나 집착을 버리고 평강 가운데 자신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본문 15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때로는 주님께서 더디 오신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주의 오래참으심이 구원에 이르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열심히 회개해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11-13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슬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한 마디로 이제는 더 이상 헤매고 방황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섰던 내용이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전부라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원한 처소가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간절히 사모하며 소망 가운데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9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오늘 본문 16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지나친 강박관념이나 불안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2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먼저 배도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 곧 적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말세가 가까워 질수록 우리가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욥과 같이 믿음의 의를 굳게 잡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욥기 27장 5-6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앞으로 점점 사람들의 마음은 돌이킬 줄을 모르고 계속 그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0-11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오늘 본문 16절 하반절에 보면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앞으로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초월적으로 신비하는 것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신비한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들이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다가 이단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초월의 종교이면서도 계시의 종교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삶 전체를 통해서 신앙의 인격이 물씬 배어나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 17절에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신앙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사도 베드로는 당시의 교회에 무법한 자들의 미혹을 조심하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진정으로 구원받았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신앙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어떠한 신학이나 교리도 죄를 조장시키는 것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 더 이상 신앙의 방황을 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영적인 무지함과 마음이 굳세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시험과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8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은혜와 지식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일입니다. 21세기에는 깨어진 관계로 인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숱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더 기능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 줄 상대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조건과 이해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에 너무나 삭막한 현실을 맞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누구에게나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지식으로 인해 번민하고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많은 꿈을 꾸게 할 것입니다.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업그레이드 시킬 때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와 지식에 자라갈 때에 앞으로 여러분에게 영광스러운 삶이 보장될 것입니다. 이번 7, 8월 달을 통해서 경건의 습관을 길들이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21세기는 영적인 무지함과 마음이 굳세지 못한 관계로 예상치 못했던 충격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은혜와 지식의 업그레이드를 통해서 진정한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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