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1 : 자만 VS 용기
본문
창세기 12장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 오세였더라.”
도입
이번 예람교회 전교인 가족수련회에 정말 잘 오셨습니다. 이번 수련회에 주제는 “용기있는 삶”입니다. 저는 그동안 목회하면서 우리 성도들이 힘을 잃과 용기를 많이 잃어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이번 가족 수련회를 통하여 용기있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용기있는 삶은 총체적인 삶의 변화를 위한 결단입니다. 용기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분명 사단의 공격과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도전들을 받을 수 잇지만, 그것은 새로운 판단과 새로운 삶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남성과 여셩들이여 이제 변명이나 주저함 없이...
그리스도를 위해 일어나십시오!
대중문화에 항거하여 일어나십시오!
당신의 가족들과 미래를 위해 굳건하게 일어나십시오!
창세기 11장 31절에 보면 데라와 그의 가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는 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란에 안주하고 맙니다. 현실의 상황에 안주하는 것이 자만입니다.
1. 용기있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새롭게 도전합니다(창 12:1-4)
자만은 말합니다, “현상을 유지하라.”
용기는 말합니다, “소지품을 챙겨서 떠나자”
아브람은 그의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란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는 전에 가나안을 본 적이 없으며,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입니다. 아브람은 익숙한 가정의 고향에 머무는 것이 편합니다. 갈대아 우르는 오늘날 강남과 같이 살기에 좋은 곳입니다. 고고학에 의하면 당시에 우르는 본창한 곳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는 비록 가나안을 향해 떠났지만, 목적지의 절반 지점인 하란에 머물게 되고 거기서 죽게 됩니다. 결국 아브람의 아버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지 못합니다(창 11:31).
창세기 11장은 셈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브람에 이르기까지 각 장자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데라는 나홀의 장자이고, 나홀은 스룩의 장자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 아브람은 그의 아버지의 재산과 큰 집안을 관리하고 꾸려나가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람이 조상의 땅을 떠나 어디론가 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장자이기 때문에 한 가문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의 나이 75세인데, 아직 자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약속의 말씀대로 떠납니다(창 12:4). 하나님의 약속은 추진력입니다. 그는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순종합니다(창 12:1-3).
적용
자녀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어떤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따라가는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분명 오늘날 아버지들의 목표는 은퇴를 위한 준비나 자녀들을 위한 학자금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부르셔서 믿음으로 새롭게 도전하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대로 그렇게 계속해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용기 있는 크리스천들은 불가능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갑니다.
자만은 말합니다, “할 수 없다.”
용기는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미 승리했다.”
아브람은 사람들이 이미 거주하고 있는 곳을 통과하여 지나갑니다. 모세는 이 일 후 약 700년이 지나서 가나안 거주민이 야만적 기질을 가졌다고 언급합니다(창 12:6). 약속의 땅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실망과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창 12:6).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언제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성공합니다(7절). 거기서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만남이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아브람은 여정을 이한 지도나 여행 일정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을 뿐입니다.
적용
우리는 어떤 좋은 결과가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단지 약속을 받았을 때에도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과 그 약속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3. 용기있는 크리스천들은 미래를 위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갑니다.
자만은 말합니다. “ 지금에 관한 것이며, 나에 관한 것이다.”
용기는 말합니다, “ 미래에 관한 것이며, 나의 가정에 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일을 결정 할 때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약속이 당장이 아니라 먼 미래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자녀가 생기고, 손자들을 보려면 여러 해가 걸립니다. 아브람이 열국의 아버지가 되려면 먼 미래에나 가능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네게브는 살기가 어려운 고입니다. 비록 목축에는 적당하였지만,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은 지역입니다. 자만은 어려운 환경에서 사는 것,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만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 속에서 인내하지 못하고 편안함을 찾습니다.
용기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인생의 큰 그림을 바라봅니다. 현재 상황에 많은 도전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미래에 하실 일을 바라봅니다(히 11:8-10). 히브리서 11장 1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가 죽음을 보기까지 약속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고 살다가 죽습니다. 용기는 큰 그름을 보며 단거리 경주갸 아니라 마라톤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미래의 무엇인가를 내다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용
미래를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내리는 결정들이 다음 세대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항상 고려해야 합니다. 하늘의 시각을 갖는 것이 우리의 미래와 가족을 지키는 열쇠입니다.
결론
자만이 아니라 용기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앞으로 행진하며 가정을 세우며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말할 수 없이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용기를 가지십시오. 빼앗긴 상실감으로 화를 내거나 이전에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의 행진으로 때로는 우리의 친구들이나 그동안 쌓아온 지위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각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기있는 삶을 살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는 언제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 2 : 용사들 VS 겁쟁이들
본문
사사기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도입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진정한 아버지는 자녀와 깊은 정서적 유대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사랑의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는 아버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른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준비와 훈련, 그리고 전문 기술을 갖추는 데 반해, 정작 가장 힘든 아버지가 되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 무대책 상태입니다. 일과 승진이 중요하고,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원만한 가정 생활을 하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됩니다.
저는 이렇게 도전합니다.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 이외로 많습니다. 아버지가 있지만 아버지와 없는 것처럼 방치되어 있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아버지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가정을 위해 투자, 보호, 인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수많은 아이들이 아버지 없이 살아갑니까? 왜냐하면 수많은 아버지들이 남자가 되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교 본문
여호수아가 끝나고 사사기가 시작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사기 6장 7-10절의 말씀에 보면 미디안 사람들의 약탈 행위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을 버리고 산에서 웅덩이를 파고 굴과 산성을 만들어 거기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들의 집을 버렸을까요?
1. 우리는 하나님을 버렸고 그 결과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도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을 버렸기에 그들의 집들도 버렸습니다(삿 6:1-4).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실패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경배하기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마음이 빼앗길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목적을 버렸고, 언약을 깨뜨리게 된 것입니다.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약탈을 당하는 것은 결코 사고나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삿 6:1-2).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신앙 때문에 주변 국가들에 의헤 굴욕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 우리의 삶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집을 버렸습니다(삿 6:11).
사사기 6:12절에 보면 하나님을 버릴 때 압제는 가중되고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드온은 가축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손으로 밀을 타작합니다. 이는 그가 밀의 소량을 경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타작 마당에서 작업을 하는 대신에 들킬까봐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합니다.
우리는 가족과 직장, 관계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자녀들은 대중문화에 사로잡힙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일어나 싸우기 보다는 같이 동화됩니다.
사람들은 연약하기 때문에 그들의 집을 버렸습니다(삿 6:15).
우리의 유일한 변명은 연약함입니다. 그것이 겸손의 가면이든, 두려움의 반응이든 사실은 연약함입니다. 연약함은 자신의 강점을 무시할 때 옵니다. 사사기 6:16에 나타난 기드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연약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함 속에서 강하여지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 그러나 우리가 연약함 뒤에 숨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약한 상태에 머무르지 말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시키시고 채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는 감당할 만한 힘을 주십니다. 자신의 연약함에 묶여서 그리스도의 능력까지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디모데후서 1:7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내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에 대해 담대함을 채우심으로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어떻게 강하게 변화시켜 주실까요? 여기에 그 방법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대신에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는 우리를 사르십니다(삿 6:17-21)
기드온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냅니다(삿 6:13). 기드온이 바위 위에 제물을 올려 놓았을 때 주의 사자가 불로 태웁니다(21절). 로마서 12:1-2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히브리서 12:29 말씀은 우리 하나님은 삼키는 불이라고 하십니다.
용기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불로 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용사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바위 위에 올려 놓고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적용
당신의 삶은 무엇에 의해 불타고 있습니까? 당신 자신입니까?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입니까?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입니까?
그는 우리를 깨뜨리십니다(삿 7:1-8)
하나님께서는 종종 연약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도저히 승산이 없는 사람을 부르셔서 승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주변이 없는 모세를 하나님의 대변자로 세우셨습니다. 목동 소년 다윗을 위대한 왕으로 만드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바울을 교회의 일꾼으로 만드셨습니다. 약한 자가 더 약해질 때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붙드십니다.
사사기 7:1-8에 보면 하나님은 기드온의 군대를 정예부대로 줄이십니다. 전쟁에서는 군사의 숫자가 많아야 하는데 자꾸 줄여가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절 말씀에 그 이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의 공과를 자기 탓으로 돌릴까봐 군대를 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심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나 생각지 않은 은혜를 입었을 때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로로 돌리는 것을 경계하실까요?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차단시키고 불행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곳이 곧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약골인 우리들을 용사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를 먼저 깨뜨리십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며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기드온은 잘 훈련된 용사들을 원했으나 하나님은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기드온은 3만 2천 명의 군인들을 확보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300명까지 줄이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가능성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때로는 깨뜨리심은 우리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적용
당신이 깨어지거나 부수어져서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어야 부분이 무엇입니까?
그는 우리를 들어 쓰십니다(삿 7:19-22)
우리가 철저히 깨어지고 불탈 때,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됩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겨우 300명의 사람으로 거둔 성공적 승리와 함께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건들을 명하시며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기드온의 작은 군대를 들어 쓰십니다.
만일 아버지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용기있는 리더십을 취하며 진리를 굳게 붙잡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당신은 아버지로서 당신의 가정에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 가정에 나 때문에 행복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은 우리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고 능력을 주실 때 행복한 가정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적용
이렇게 도전하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그리스도의 모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는 하나님의 손과 발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사역자로서, 자녀로서 역할을 감당할 때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습니다. 겁쟁일 수도 있고 용사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전쟁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설교 3: 투사들 VS 도망자들
본문
사무엘상 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도입
동물의 왕국에서 동물들은 약탈자의 공격에 대해 싸우거나 도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강력한 적에 대항하여 싸우든지 불신의 유혹으로부터 지혜롭게 도망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줄 것입니다.
설교 본문
당시에 이스라엘은 군주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가 나타납니다(삿 2:10). 사사기 시대는 불순종의 악순환 시대입니다. 도덕적 무정부 상태였으며 고퉁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이방인들에게 압제당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구원해주십니다. 또 다시 반역하면서 이러한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사사기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사무엘은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출현합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습니다(삼상 3:1).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실한 선지자 사무엘의 경고를 무시하고 왕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요구대로 해줄 것을 명령하십니다(삼상 8:1-22).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보다 더 인상적이고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버림받은 첫 번째 왕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하십니다(삼상 16:14). 다윗이 궁에 들어와서 수금을 타면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갑니다(삼상 16:23).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전쟁을 걸어옵니다. 이 전쟁은 양 진영에서 각각 한 사람의 용사를 내세워 두 사람의 승패에 의해 모든 것을 다 취하는 싸움입니다. 블레셋에서는 골리앗을 내세웠는데 그는 투사입니다. 투사란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감히 누군가를 내세우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무엘상 17:10-11절에 보면 블레셋의 골리앗이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자고 소리칩니다. 이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골리앗의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의 최선은 불레셋의 최악을 두려워했습니다(삼상 17:20-32). 신자가 세상을 두려워하여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가장 불행한 순간입니다.
사무엘상 17:32절에 보면 이때에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며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소년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훈련된 용사들이 방관자로 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 작은 소년을 보내셔서 사내 대장부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사무엘상 17:33-40에 보면 다윗은 정식 훈련을 받지 않은 한 소년에 불과했고, 골리앗은 전문 투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1. 아버지 됨은 두려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도망쳐서는 안됩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왕이 된다는 것은 그의 최대의 기쁨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최대의 도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를 품에 안을 때 그것은 삶에 있어서 최대의 기쁨이지만 최대의 도전이 됩니다. 슬프게도 어떤 아버지들이 자녀들을 버려두고 집을 떠납니다. 사정이야 어떻든 아버지 됨이 두려운 것이지만, 절대로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너무나 막중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2. 아버지 됨은 두려운 것이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다윗은 작은 성공들 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자 이제 결정적인 것을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할 시간이 왔습니다. 이제 최대의 적을 상대로 싸우며 최후를 하나님께 맡길 시간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정을 리드해야 합니다. 사울의 군인들은 전쟁터를 떠나지 않았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6절 말씀에 보면 40일 동안 골리앗은 하나님의 군대를 대적하여 도전과 위협을 가해옵니다. 40일 동안 사울과 그의 군대는 두려워 떨고만 있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가정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아버지됨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역할은 아버지들을 돕고 격려하며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전쟁터의 전방에 단순히 서 있는 것과 실제로 싸우는 것은 다릅니다. 이제 여러분의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용기있게 싸울 시간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대중문화요 도덕적 상대주의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여러분 집 문에까지 쳐들어올 것이며, 여러분의 자녀들을 사로잡아갈 것입니다.
3. 아버지 됨은 두려운 것이지만, 우리는 그 두려움을 상대로 싸워야 합니다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의 확신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두려움보다 크시며 우리의 어떤 적보다 강하십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가셨습니다.
이전에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다윗의 믿음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왜 골리앗을 대항 할 수 없는지 이유들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포기하지 않고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갑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갑옷를 입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고 나아갔습니다. 결국 다윗이 승리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사람의 외모를 보지 말고 중심을 보라고 하십니다(삼상 16:7).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거인에게 도전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적용
오늘날 부모의 역할 그 자체가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때때로 올바른 일을 한다는 것, 믿음 위에 바로 선다는 것, 자녀를 올바르게 훈육하는 일이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가족들을 지속적으로 사랑하십시오. TV나 비디오 게임이 당신의 자녀들을 지배하도록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학교 성적과 운동 경기보다는 경건한 성품을 길러 주십시오.
결론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되어 계속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삶에도 실패의 순간이 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젊었을 때에는 신실하고 당당하게 싸웠고 거인을 죽였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나이가 들어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때 그는 죄를 범합니다. 그가 전쟁에 참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궁에 머물러 있다가 간음죄를 짓고 그 선택의 결과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당당히 일어나 자만과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전쟁은 회개로 시작되며 회개로 끝납니다. 회개는 거인을 상대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악과 자만과 두려움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유혹으로부터 도주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우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에서 도망하는 대신에 부르심을 받은 소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때론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할 때, 평판이 안 좋은 표를 받는 것만 같습니다. 남성은 하나님을 알며, 그가 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가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양육함에 있어서 능동적 책임을 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 4 : 협력자들 VS 단독주자들
본문
열왕기상 18:46 “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도입
야구와 테니스, 골프와 농구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팀 스포츠가 있고 개인 스포츠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팀 스포츠를 좋아하지만 어떤 이들은 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팀 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있어서 단독주자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믿음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교회에 결속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다른 신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합니다.
우리는 결코 홀로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독 주자를 찾지 않습니다. 그는 협력자들을 찾으십니다.
세상은 단독 주자를 강인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남자다움과 권위의 상징으로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만을 의지하라는 것은 세속적 인본주의의 속임수입니다.
설교 본문
1. 하나님의 팀에 있어서 당신은 결코 스타 선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강한 조력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명성이 자자했던 한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갈멜산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 그리고 다른 우상 숭배자들 곁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엘리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상상이 가십니까? 이와 같은 군중을 대항하여 홀로 서 있는 엘리야를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상 18장 20-46절에 보면 엘리야는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1. 그의 경쟁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 바알에게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대가 누구인지 잘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나 다른 신앙인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라 이 세상 어둠의 주관자들과의 씨름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문화전쟁의 희생자들입니다. 우리의 자녀를 전리품으로 노리고 있는 이 세상의 적과 대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성공은 그의 어깨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그가 하실 때 엘리야는 단지 대리선수로 벤치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용기는 주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엘리야의 용기는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을 때 우리는 스타선수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에게 공을 던져 드리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지켜볼 뿐입니다.
적용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우리의 사명은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범사에 그분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팀에 있어서 놀라움의 요소는 언제나 그분의 전략입니다
열왕기상 18장 37절에서 엘리야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일련의 번개불이 기도의 응답으로 얼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구하거나 상상하지 못한 그 무엇,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무엇이가를 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야는 제단에 많은 물을 붓습니다. 인간의 제한된 시각에서 볼 때 하나님의 전략이 항상 명료하거나 논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략은 그분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에 적합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불을 위해 기도했고, 그는 불을 받았습니다. 그냥 하나의 불이 아니라 제물과 그곳에 있던 모든 물을 삼키는 그런 불이었습니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도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의 말씀은 땅과 바다를 지으시고 질병을 다스리시는 분이 구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한 약속입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3. 하나님의 팀에 있어서 당신이 홀로 서 있을 때에도 당신은 막강한 군대 이상입니다.
열왕기상 18:40에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다 붙잡으라고 명령합니다(22절). 그들 모두를 죽였습니다. 신명기에는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꾀는 자들을 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신 13장). 이러한 죽임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이세벨의 행위에 대한 보응이기도 했습니다(왕상 18:4, 13). 엘리야가 단독으로 450명을 굴복시키고 죽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엘리야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첫 자리를 내어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협력자와 단독주자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단독주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챕니다. 협력자는 그들의 보조역할을 인식합니다.
단독주자는 그들의 방식대로 움직입니다. 협력자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움직이며 언제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합니다.
단독주자는 혼자 한다는 것에 자만을 가집니다. 협력자는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며 그로 인해 기뻐합니다.
결론
홀로 선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결코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면 충분하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대 그분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상상하는 것 이상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과 바른 것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영왕기상 18장 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용기 있는 삶에서 마이클 목사는 우리가 얼마나 더 머뭇거릴 것인지 다음과 같이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까?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 얼마나 많은 경고를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끝날 때 ”나는 이것을 위해 일어섰노라“고 말할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까? 만일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그 자체가 이미 여러분의 결정인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지금입니다. 지금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용기 있는 삶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충분함 그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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