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탈 기독교 시대의 전도]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란 자유해지는데 있다고 현대문화는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럴까요? 당신은 자유를 원하지만 사실은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당신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살아야 하며,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에 종속되어 타인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은 자신의 실존에 근거하여 의롭다는 정체성을 얻으려하는데, 이는 결국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만큼 타인을 무시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내세우는 힘의 논리를 십자가에서 뒤집으셨습니다. 그분은 섬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권세를 내려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타인에게 함부로 대하며 정의롭지 않게 행한 삶에 대해서도 그분이 정의로운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로써 당신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는 정체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신이 무언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확인시켜 주는 정체성입니다. 나아가 그로부터 깊은 만족과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성경의 약속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지난 주에는 가족 전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가 예수님이 계신 곳에 찾아가서 하루를 보낸 후 그분이 메시야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려고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나서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갑니다. 에수께서 시몬을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가족전도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해고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오늘은 친구전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친구 전도는 접촉점을 마련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전도한 그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게 됩니다. 빌립은 누구일까요? 본문 44절에 의하면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입니다. 같은 동네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광야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에 빌립을 만난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단계에서 머무르지 말고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빌립의 고향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입니다(가버나움). 벳세다는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습니다(요 12:21). 갈릴리는 이방 나라들의 침략으로 인해 어둡고 혼돈한 지역이었습니다. 벳새다는 어부의 집이란 뜻으로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기 위해 먼저 찾아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에게 찾아가서 전도합니다. 본문 45절입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가 누구일까요?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빌립은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고 나타나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호적상으로 요셉의 아들이고 호적지는 나사렛입니다. 당시에 나사렛은 초라하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은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6장 14절입니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강조한 것은 에수의 출생이나 집안 내력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한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친구를 만나서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어도 내가 만난 예수님을 나누자 않으면 뭔가 빠진 것 같아서 허전합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강요하는 느낌이 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친구가 처한 상황을 깊이 이해하면서 그에게 복음을 자연스럽게 전하는 접촉점을 갖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나다나엘은 율법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 탄생할 것을 율법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의 집은 갈릴리 가나에 있었는데 (요 21:2), 나사렛에서 6킬로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전도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포기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라고 권면합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반문했지만 그래도 와보라고 강권합니다. 들어서 예수님을 아는 것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를 의심하였지만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하는 어떤 젊은이가 구원받지 않은 자기 친구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의 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졸업하기 전까지는 그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며, 두 사람은 졸업한 후 공군장교가 되어 각기 다른 곳으로 배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갖고 있었지만 그의 소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 친구인 톰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개월 후에 그는 터어키로 배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군사기지에 있는 상점의 계산대에서 자기 친구인 톰을 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상점 밖에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톰의 부대는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미국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톰은 특별한 사명을 띠고 터어키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동안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은 톰의 결혼생활이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과 이로 인해 고독을 느낀 톰이 행복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톰은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정말 행복하고 평안하게 보여. 나는 지금 그것을 바라고 있단 말이야." 이 말은 그리스도인 친구로 하여금 간증과 복음을 나누게 만들었고, 드디어 톰은 주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틀 후에 톰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터어키를 떠났습니다. 톰의 특별한 사명은 누가 부여했을까여? 공군이었을까요, 하나님이었을까요
2.친구 전도는 알아주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더 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 47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시편 기자는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시 32:2).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간사하게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링컨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가 있다. 또 몇 사람을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를 가리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말을 다 아셨습니다. 어떻게 아셨을까요? 빌립이 예수님께 이런 사실을 전해 주었을까요?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을 볼 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아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한 말이 무엇인지, 나다나엘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이러한 지적에 대해 너무 놀라서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내가 보았노라.” 보았다는 것은 주목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이 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을까요? 당시에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곳을 율법을 교육하거나 기도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빌립은 상식적이고 현실적이고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성향을 가진 나다나엘에게 상식을 초월한 신적인 차원으로 접근하십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내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성향을 고려하여 거기게 맞게 시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다나엘의 입장에서는 빌립이 자신에 대해 예수님께 코멘트했는가, 나를 어떻게 잘 아시지. 인간적인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보았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싶어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언제나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감동은 모든 장벽을 뚫고 들어가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 드는 힘이 있습니다. 감동은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리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강동시킬 수만 있다면 전도는 됩니다. 어떻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요? 상대방이 특별한 느낌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하실 때 늘 “너는 내가 염두에 둔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느끼게 만드십니다. 주님은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삭개오, 사마리아 여인을 대할 때 늘 그러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서면 “나는 특별하구나!”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특별한 느낌이 사람을 감동시켜 닫힌 마음의 창을 여는 열쇠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꿰뚫어 보는 예수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49절). 나다나엘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아시는 분이라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실 메시야임에 틀림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나다엘의 이러한 고백에 대해 이렇게 멘트하십니다.
본문 50절입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함으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51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존재 자체를 알아 줌으로써 그 사랑에 압도당하여 바른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더 큰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큰 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야곱이 형 에서의 축복권을 빼앗은 후에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할 때에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졌습니다. 거기서 하루 밤을 짐내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서 잠이 들게 되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서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였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8장 13-15절입니다. 나는 너희 조상 여호와 하나님이다.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아지고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가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으리라.”
예수님께서 더 큰 것을 보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온갖 불행과 슬픔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 밖에 없지만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리되 인간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친구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가 하늘이 열리는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최고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복음을 친구에게 전할 때 그가 어두움에서 벗어나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고 도날드 그레이 반 하우스 박사가 필라델피아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을 집례하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는데 그 중에는 고인과 가깝게 지내던 중견 사업가들의 많았습니다. 이 장례식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죽을 그리스도인이 1년전 '내 무덤가에서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편지 한 통을 써서 유서 속에다 넣어두고 그것을 장례식 때 읽어 주도록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 하우스 박사는 그 편지를 개봉하여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나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을 증거의 시간으로 삼기 원합니다. 맥! 자네도 지금 내 관을 바라보고 있는 군중들 가운데 있겠지. 친구여, 우리가 함께 골프를 칠때마다 나는 그대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얼마나 간절히 권면했는가!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네.
죠지! 그대는 지금도 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려는가? 그분은 그대를 위해 죽으셨고 지금 그대에게 영생을 주기 원하시는데도?".여기까지 읽자,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다음에 혹시 자기이름이 거론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인처럼 죽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지금 그리스도를 위해서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로 하기가 어렵다면, 우리가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그 잃어버린 바 된 친구에게 최소한 증거의 편지를 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 재림을 준비하며 사십니까?- 도날드켐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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