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나는 태어나기로 결정한 적이 없다, 요 3:3)
부르심이 관계의 차원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라면, 거듭남은 탄생의 관점에서 구원의 출발을 바라본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이 내게 영적인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거듭남이 무엇일까요?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판한 교회용어 사전에 보면 “거듭남이란 새롭게 태어남, 성경적으로는,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있던 존재가 은혜로 새생명을 얻어 전인격적이고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 곧 중생을 말합니다.”
왜 태어났니
짓궂은 장남을 많이 치던 초등학생 시절, 내 생일에 한 식당에서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했습니다. 생일 케이크를 자르기 전에 “생일 축하합니다”노래를 불러 주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그 노래를 들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들이 가사를 바꾸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인구도 많은데 왜 태어났니.”
친구들이 장난을 치는 것을 알기에 상처받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조금 더 삶을 살아보니 가끔 이 가사가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나와 주변에서 벌어지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쫓아가 보면, 이 단순한 삶의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방황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낳고 싶지 않은 세대
요즘 젊은 사람들을 만나 보면, 자신은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를 낳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유가 매우 타당합니다. “목사님, 제가 인생을 살아 보니, 정말 살기 쉽지 않더라고요. 너무 험한 세상이고, 너무 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아가라고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오히려 자녀에게 제가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태어나서 불행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뜻 들으면 다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잘못된 전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야 할 바깥세상이 무게에 따라서 내 삶의 존재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능력은 너무 큽니다. 그런데 나의 능력은 너무 작습니다. 경쟁해 봐야 맨날 밀릴 텐데 뭐 하러 삶을 살아가는가?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내 삶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여자 친구와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난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서로 힘들어할 바에야 각자 그 길을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삶의 무게 때문에 사랑을 포기합니다. 더구나 자녀 교육을 감당할 자신이 제겐 없기 때문에 결혼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출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부모라면, 그 아이는 태어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해줄 자신이 없는 부모이기에, 아이는 태어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교육비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자녀를 갖는 것 자체가 꺼리게 됩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요? 부모와의 관계에서 오는 사랑의 힘이 빠졌습니다. 출산을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자녀가 이 세상에서 맞닥뜨릴 시련과 고남의 무게만 이야기 합니다. 그 자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빠져 있습니다.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를 만나는 것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부모와 눈을 맞추고, 부모와 함께 울고 웃는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모든 환경의 어려움을 이기게 만드는 것은 부모와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 사랑에 대한 충만함이 부모 안에서 먼저 사라져 버리니, 세상에서 자녀가 감당해야 할 무게를 방패 삼아 자녀를 갖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왜 태어나게 하는가? 자녀와 행복한 관계를 누리기 위함이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녀는 태어나기로 결정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가 그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1.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원리를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의 출발이 되는 거듭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는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도중에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맨 처음 일어나야 할 일이 거듭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거듭남(born again, regeneration)이란 영적인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맺지 않는 사람들은 육체의 생명은 살아있으나 영혼의 생명은 죽어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의 영적인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육체의 탄생으로부터 내 삶이 출발하듯이, 영적인 탄생은 거듭남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는 영적으로 어떻게 태어나는가?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어떻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이 태어나는 방식과 동일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쉽게 말해 하나님이 직접 태어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나는 태어나기로 결정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을 때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부모가 결정한 것입니다. 영적인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정리하면 이런 것입니다. “네가 육체적으로 어떻게 태어났느냐? 아마 너의 부모가 모든 것을 결정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네가 할 수 일은 없다. 너의 영적인 부모가 하는 일이다. 내가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거듭남의 핵심: 사람은 할 수 없다
거듭남과 부르심의 교리에서 공통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앤서니 후크마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태어나기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는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적 출생에 있어서 완전히 수동적이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탄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이 인간과 협력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2.거듭난 사람은 두 가지 변화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거듭남은 (1) 내 삶이 목적 중심으로 변화되게 하고, (2)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거듭난 사람의 변화 1: 목적 중심의 삶
성경은 거듭남의 교리를 늘 창조와 연결시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거듭남).
왜 거듭남과 창조가 함께 나오는걸까요? 우리가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이 수반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내가 이 세상에 우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분이 계십니까? 어쩌다가 이 회사에 와서 일하고, 어쩌다가 이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사는지 이유를 모르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 보니 세상이 정해주는 목적을 따라갔습니다. “여기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해.” “그 나이쯤 되면 집은 하나 있어야 해.” “이런 대학 나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세상이 정해주는 기준이 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세월이 지나며 끊임없이 바뀌어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주권적으로 창조하셨다면 육체와 영혼 모두가 영원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빋게 됩니다. 의미없이 태어난 존재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거듭남과 동시에 삶의 방향성이 달리지고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신앙을 갖게 되면 삶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목적이 만드는 옳고 그름
자신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십니까? 그러면 신앙생활의 첫 걸음을 떼기 전에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내 삶의 목표를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내 삶의 방향성을 새롭게 설정해야 합니다.
현대시대를 분석하는 연구자들은 이 시대를 “감정주의”(정의주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삶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예전에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행동을 싫어하셔! 라거나 하늘에서 천벌이 내릴 거야”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기준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감정입니다. ‘옳고 그름’이 ‘좋고 싫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왜 그 행동을 해야 하는가? 옳아서가 아니라, 내가 기분이 좋아서 그렇다. 왜 그 행동을 안 하는가? 그냥 내가 하기 싫어서 그렇다. 모든 사람이 내가 생각하기에 기분 좋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에게 “너의 행동은 틀렸어!”, “그렇게 살면 안돼!” 말할 근거가 없어졌습니다.
좋은 시계와 나쁜 시계
어떤 시계가 좋은 시계일까요? 디자인이 좋은 시계, 가벼운 시계, 크기가 작은 시계 등 사람들마다 선호도가 다양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습니다. 시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디자인이 좋다고 좋은 시계가 될 수 없습니다. 시계의 목적은 시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현재 시간을 정확히 나타내지 못하면 그것은 좋은 시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 시계는 무엇에 쓰이는 물건이지’?라고 물을 때 평범한 대답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지’…이 목적을 알 때에만 우리는 정확하지 않은 시계를 보고 나쁜 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삶의 목적과 시작을 거부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율적인 개인들뿐이며, 모든 도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목적을 거부했기 때문에 유일하게 남은 옵션은 인간 본성에 모든 도덕의 원리를 맡기는 것뿐입니다.
목적대로 살지 않으면 부서진다
현대인들은 삶의 목적을 이야기하면,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받는 것 같아서 반발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정말 목적이 있다면, 목적을 벗어나서 살아갈 때 우리 삶이 부서져 버립니다. 한 아이가 부모의 바싼 시계를 공처럼 던지며 놀았습니다. 시계가 부서졌습니다. 왜 부서졌을까요? 목적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다.”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억압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적을 이해하면 받이들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은 억압이 아니라, 목적대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보호해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몇 가지 삶의 목적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사랑하면서 살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 따위는 필요없고 나의 유익과 만족이 내 삶의 뜻이야’라며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삶이 부서질 것입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회사 선후배들과의 관계도 꼬일 것입니다. 사랑이 내 삶에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돈만 벌면 되지, 삶애서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회사원이 있다고 합시다.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먕히 주변의 무언가가 부서질 것입니다. 건강이 부서질 것입니다. 관계가 부서질 것입니다. 가정이 부서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벗어나면 오히여 부서지는 것입니다. 내가 거듭났고, 주권자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목적을 따를 때 내 삶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의 변화 2. 가능성을 바라보는 삶
거듭남의 교리는 주변에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속담을 떠올려 봅니다. 내 자녀는 전혀 스스로 돕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자녀를 싫어하시고 버리실 것이라는 걱정이 됩니다. 자녀에게 “네가 열심히 해야 하나님도 너를 사랑해 주실 것 아니니”라는 말로 자극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스스로 돕지 않는자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얼마나 발버둥치느냐애 따라서 거듭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면 이것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 사람을 택하고 부르신다면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무한한 가능성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을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닫힌 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접근 불가능한 피조물도 없고, 열기 어려운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도
지금은 위생이나 의료 기술이 많이 발전했지만, 수 세기 전에는 아이가 평범하게 태어나서 생명을 유지하기만 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이들 대부분이 태중에서 사망하거나 태어나더라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살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신앙을 가진 부모인데 나의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나는 일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궁금하게 될 것입니다. ‘이 아이는 천국에 갔을까?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을까?’
우리보다 먼저 신앙을 지켰던 신자들은 바로 이 부르심과 거듭남을 붙들고 위로와 소망을 얻었습니다. 앞에서 거듭남이나 부르심은 사람의 재능이나 능력이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하셨다면, 유아나 영아, 심지어 태중에서 지각이 없는 아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3항: 선택함을 받은 어린 아이들은 어려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가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되고(거듭나고) 구원된다. 이 원리는 말씀의 사역을 통하여 외적으로 부르심 받을 수 없는 모든 택함받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지적인 장애를 가진 자녀를 기르는 부모, 태중의 자녀를 잃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할 능력이나 인지가 없는 자신의 자녀를 바라보며 얼마나 큰 소망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부르심과 거듭남의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친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내가 태어난 흔적
자녀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낳은 부모에게는 육체의 흔적이 남습니다. 자녀를 낳은 어머니의 몸은 낳지 않은 상태로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은 자녀를 낳고 기른 사랑의 흔적이 됩니다. 영적인 생명이 태어날 때도 흔적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믿을 수 있는 흔적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부모가 되신다면 우리를 해산한 고통의 흔적을 가지고 계신지 찾아보면 됩니다.
요한복음 16장 21절에 보면 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시기 전에 갑자기 여성이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만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은 왜 십자기를 지고 가시기 전에 여성의 출산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출산하러간다!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하러 간다!”는 말씀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이런 비유를 했던 것입니다. 여성이 자신의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새 생명을 낳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시며 우리를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팀 켈러는 요한복음 16장 21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시다가 갑자기 해산의 수고를 하시는 여성을 이야기하는가?...예수님의 말씀이 이제 보이는가? 너의 첫번째 인생은 어떤 여성이 자신의 인생을 위험에 처하게 했기 때문에 육체적 생명이 주어졌지만, 너의 두번재 인생은 누군가가 그의 인생을 주었기 때문에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 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나이다.”
거듭난 자는 흔적을 남긴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면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거듭난 신자는 내게 생명을 주신 분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나를 거듭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닮아, 나도 그분을 따르는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내가 태어난 것아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는 흔적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내가 거듭났다면,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면, 이 땅에서 경험하는 고난의 무게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고난이 무겁다고, 시련에 넘어졌다고 삶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난을 이기게 만드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가 있습니다. 그 무게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영혼을 태어나게 하셨음을 계속 생각하라. 주님이 내 삶을 부르셨음을 확신하라. 그 부르심의 문제가 내 삶의 모든 고난을 무게를 이기게 만들 것입니다. 삶의 무게가 무거워도 괜찮습니다. 무게와 관계없이, 거듭난 자의 삶은 흔들리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