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다, 행 16:31)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교회용어사전에 보면 “신앙의 대상을 인식하고 신뢰하는 전인격적인 행위, 곧 단순한 지식의 차원을 넘어 구주 예수를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삶의 방향을 그분에게로 전환하며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신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행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곧 그분의 주권적인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
제대로 안 믿으면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듣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동이나 착한 일들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무흠한 수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죄가 없으시고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위로가 되면 좋은데,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지금 내게 제대로 믿고 있지 못하다면 어떨까? 다른 사람들은 나 보다 신앙생활을 훨씬 더 잘 하고, 믿음도 좋아 보입니다. 나는 믿음의 수준이 그들보다 훨씬 뒤쳐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나의 행동을 보면 제대로 믿고 있는게 맞나 싶습니다. 믿는자 답게 살지 못하기에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단순하게 정의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련하신 유일한 구원의 수단입니다.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단에 강조점을 주어야 합니다.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가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프랑스 곡예사 샤를 블롱댕(Charles Blondi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위대한 도전을 하기 위해 뉴욕 타임지에 광고를 냈습니다. “장대를 들고 나이아가랴 폭포를 가로질러 외줄타기를 할 예정인데, 보고 싶으신 분들은 외서 구경하세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블롱댕은 그 자리에서 정말 장대 하나만 들고 나이야가라 폭포 외줄타기에 성공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블롱댕은 사람들에게 “내가 이 줄 위에서 외발자전거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박수를 보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신뢰한다며 연이어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공했습니다. 그를 향한 인기와 환호가 절정에 달할 무렵, 블롱댕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사람을 태우고 이곳을 건널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도전의 수위가 최고조에 이르자 사람들은 더욱 환호하며 그를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블롱댕의 한 마디를 듣자, 찬물을 끼얹은 듯이 분위기가 가라앉았습니다. 왜 분위기가 가라 앉았을까요?
김효남 목사는 [믿음을 말하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저를 이렇게 믿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제 등에 업혀서 이곳을 건널 사람이 있습니까? 나와 주십시오’, 이때 사람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습니다. 아무도 자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블롱댕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건널 수 있다고 하는 블롱댕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어깨에 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그들에게는 그에 대한 참된 신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를 넘어섭니다. 나 자신의 인격적인 신뢰가 곁들여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머뭇거릴 때 한 사람이 자신이 도전하겠다고 자처했습니다. 해리 콜고드(Harry Colcord)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그 도전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요? 알고 보니, 그는 블롱댕의 매니저였습니다. 콜코드는 오랜 시간 블롱댕 곁에 지내며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하는 관계였습니다. 결국 콜코드는 블롱댕의 몸에 업혀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가는데에 성공했습니다.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해보면 믿음에 대한 이해가 쉬워집니다. “누가 나를 구원하는가?, 무엇을 통해 구원받는가?, 어떻게 믿음이 자라는가”
믿음을 이해하는 핵심 1. 누가 나를 구원하는가(구원의 주체)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넌 사람은 누구인가요? 분명 매니저인 콜코드가 건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폭포를 건너게 만든 장본인은 블롱댕입니다. 블롱댕의 능력이 콜코드를 구원한 것입니다. 블롱댕을 믿는 콜코드의 믿음이 폭포를 건너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믿음 속에 능력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폭포를 건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폭포를 건넌 것은 오전히 블롱댕의 능력이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넘어서 구원받게 하는 주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십니다. 그래서 존 머레이 교수는 [구속]이라는 책에서 믿음은 수단일 뿐, 구원의 주체는 예수님이심을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믿음의 효력이 믿음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모든 효력은 구주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특이하게도 믿음은 믿음 그 차제가 아닌 그리스도만을 주목하고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을 이해하는 핵심 2. 무엇을 통해 구원받는가?
예수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폭포를 건너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이해할 때, 우리의 믿음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믿음 그 자체에 능력은 없지만,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구원하는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 수단,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블롱댕에게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고 설득한다고 해서 폭포를 건널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폭포를 건너가려면, 건너가고자 하는 사람이 블롱댕을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을 갖는 수밖에 없습니다. 콜코드는 블롱댕과 같이 지내다 보니 그를 너무나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믿음이 수단이 되어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콜코드가 폭포를 건넌 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이 폭포를 건널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내가 이 사람을 가장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없는 자들이여! 이 모든 공로가 바로 나의 믿음의 깊이에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콜코드를 비웃을 것입니다. 폭포를 건너게 만든 능력은 블롱댕에게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입니다.
콜코드는 오히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블롱댕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그가 나에게 이런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주어 고맙습니다. 저처럼 여러분도 도전해 보십시오. 블롱댕은 정말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믿음을 이해하는 핵심 3. 어떻게 믿음이 자라는가?(믿음의 성장)
그렇다면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기는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입으로 고백합니다. 세례도 받습니다. 교회에서 설교 말씀도 열심히 듣습니다. 그런데 전혀 감동도 없고,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내가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인간적인 방식으로 나의 믿음과 확신을 평가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특정한 행동이나 일시적인 마음 상태로 우리의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평생에 걸친 신뢰의 여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을 통해서 구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함이 깊어지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삶 속에서 믿음을 성장시키십니다. 왜 콜코드가 블롱댕을 온전히 믿을 수 있었을까요? 특별한 신뢰 프로그램에 참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블롱댕과 오랜 시간 같이하며 자연스럽게 살아온 삶을 통해 믿음이 생긴 까닭입니다. 모든 삶의 여정을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은 여러 삶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십니다.
박완서 작가의 부부 동반 기차 여행
소설가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남편과 함께 부부 동반 2박 3일 기차 여행을 갔습니다. 풍경이 너무 좋은 여행일정이었지만, 문제는 기차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정장을 입은 한 남성이 구걸을 하는데, 승객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며 자신의 사연을 소개하는 듯했습니다. 구걸하는 사람치고는 옷차림이 특이하여, 도대체 무엇을 나누어 주는 지 읽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종이를 받았는데, 글이 아니라 사진이었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그 사진을 보고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뜻밖에도 그건 낡은 결혼사진이었습니다. …다소곳이 서 있는 신부 옆에 …신랑이 의젓하게 서 있는 촌스럽고 낡은 구식 결혼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신랑은 지금 구걸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이었습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것 보여 주며 구걸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상해하면서도 어느 만큼은 감동 같은 걸 하고 있었습니다
.
그도 꽃다운 시절이 있어서 결혼을 했습니다. …친척, 친구들에게 앞날을 축복받으며 착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었고, 지금 이 구걸도 무서운 지아비의 노릇이라는 생각이 뭉클하니 내 심장 언저리를 뜨겁게 했습니다.”
이 사진 또한 구걸을 위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수단 중에 하나라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느낌은 달라서, 남편 몰래 많은 돈을 그 사람에게 쥐어 주었습니다. 왜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요? 박완서 작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마 그날이 내 결혼기념일이어서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어쩌면 결혼의 의미를 남 보다 더 잘, 더 많이 알고 있었음이 아닐까?
박완서 작가는 지금 남편과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정을 지켜야 하는 구걸하는 정장 차림의 남성을 만난 것입니다. 험난한 결혼 생활을 가쳐 가며 가정을 지켜온 사람은 가정에 닥쳐오는 고난과 역경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될 때가 있고, 잘못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유없는 위기가 닥치기도 한다는 것을 압니다.
박완서 작가는 삶을 통해 이미 결혼과 가정을 배운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장을 입은 사내의 결혼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이해는 격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경험이 이해의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믿음있는 나의 모습
신앙생활도 이와 같이 않은가요?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적으로 이해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녀를 낳고 기르게 됩니다. 자녀 출산과 양육을 통해 말 안듣는 자녀를 품에 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됩니다.
기도 응답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응답해 주시지 않으셨기에 섭섭해 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떠 올려봅니다. 너무 바랐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처음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잔을 옮겨 달라는 요구가 응답받지 못했는데 그래도 십자가로 걸어가신 주님 때문에 내 죄가 말갛게 씼겨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마음의 고놔와 순종의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상사에게 욕을 들어가며 일을 할 때, 내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비난받고 욕을 들으실 떼에도 맞대어 욕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나아가 그것을 확신하고 싶다면, 삶의 모든 여정 속에서 주님과 관련하여 그 상황을 해석하고 해결해 보려고 하십시오, 처음에 폭포 한 가운데로 떨어질까 두려워했던 옛 모습이 떠오르면 어느새 그분의 등에 안겨 편히 나를 맡기고 있는 ‘믿음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