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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한 주동안 대상포진에 걸려서 조금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두통으로 심하게 고생했습니다. 머리가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다음에는 눈을 뜰 수 없을만큼 불편하였습니다. 이어서 얼굴에 수포가 올라왔습니다. 그제서야 대상 포진이 걸린 줄 알고 본격적인 대상포진 치료를 하였습니다. 각막에 염증이 생겨서 안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며칠 후 얼굴에 상처가 생길까 봐 피부과에 다녔습니다. 이번에 저는 약과의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이 가장 많은 약을 복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이 대상포진에 많이 걸리는지, 어떤 휴유증이 발생하는 지에 관해 검색해 보았습니다. 대상포진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어릴 때 수두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와 같은 것으로 수두가 치료된 후에도 이 바이러스가 사라지지않고, 우리 몸 속의 신경을 타고 척수 속에 오랜 기간 동안 숨어있다가 우리의 몸이 약해지거나 다른 질환으로 생체 내의 면역기능이 떨어져 있을 때 다시 활성화되어 이 병을 일으킵니다.
주로 대상포진은 60세 이상의 고령자이거나 AIDS, 혹은 암 등이 있는 환자, 항암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등 전신적 면역기능이 떨어졌을 때 바이러스가 되살아나서 이 병에 걸리게 되는데, 젊은 사람도 과로와 스트레스 등을 많이 받으면 이 병이 생길 수 있고, 50세 이상의 여성에게서도 상당부분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대상포진의 특징은 우리 몸의 신경 중의 하나를 따라서 퍼진다는 점입니다. 우리 몸의 신경은 척추에서 오른쪽, 왼쪽으로 한 가닥씩 나와있기 때문에 대상포진에 걸리면 몸의 한쪽에만 통증과 수포를 동반한 피부 병변이 발생합니다. 또한 신경 중에서도 감각신경과 운동신경 중 주로 감각신경에 침범합니다.대표적인 합병증인 신경통은 환자의 10~18%가 겪는데, 주로 화끈거리거나 쿡쿡 쑤시고 찌르는 듯한 만성 통증을 뜻하며 몇 달 또는 몇 년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만성 통증은 수면방해 및 우울증, 만성피로 등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작은 접촉이나 마찰에도 심한 통증이 생겨 옷을 입거나 목욕을 하는 것 같은 일상생활에까지 큰 불편을 줍니다.
왜 제가 설교 제목을 신앙의 대상포진이 올 때라는 제목으로 정한지 아십니까? 어릴 때 수도와 치료가 디어도 바이러스가 어딘가 남아서 면역이 약해질 때 침투하여 대상포진을 일으키고, 휴유증으로 계속해서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대상포진이 올 때에도 면역력이 떨어질 때 생깁니다.
신앙의 면역력이 떨어지는 세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몸에 남아있는 죄의 바이러스가 활성화할 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은혜의 항바이러스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변수는 삶의 매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울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의 바이러스도 이와 같습니다.
한번 잘못한 것은 재발할 가능성이 높고 만성으로 치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거기서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 왕의 아내가 될 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한 사건 이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7,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경배를 드린 후에 발생한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 12장에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 역시 세상에 대한 면역력이 약한 것 같습니다.
1.신자는 세상 가운데서 죄의 바이러스가 침투할 때 면역력이 약해집니다
창세기 12장의 사건은 두 가지 변수에 의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10절에 보면 “그(가나안)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으라.” 가나안(팔레스틴) 지방은 지리적 여건상 우기와 건기가 뚜렷이 구분되어 대개 양력 10, 11월에 집중적인 비가 내린다. 따라서 이때 비가 적게 오면 그 다음 해에는 기근이 들게 마련인데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람에게 때맞춰 이러한 기근이 닥친 것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심한 기근을 만나서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브람은 애굽의 나일강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은 나일강이란 풍부한 수원(水原)으로 인해 거의 기근을 모르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떻든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방법에만 호소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이 우려한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 사래가 너무 예쁘다는 것입니다. 11-13절에 보면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라가 아름다워서 자신은 죽이고 사라는 살아날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만약 이런 고민이 있는데도 애굽으로 내려가야 할까요? 다시 방향을 틀어야 할까요?
아브람은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애굽의 초현실 앞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우려했던 현실이 그만 터지고 말았습니다. 본문 14, 15절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아브람 역시 세상 방식대로 살아가다가 자신의 아내를 빼알길뻔 하는 기가막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후에 아브람에게 찾아오는 계속적인 시험의 핵심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 방식이느\냐, 하나님 방식이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 앞에서 아브라함은 비로서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까?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세상에서어떤 방식으로 경쟁해야 할까요? 세상 방식입니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내기를 원하실까요?
2. 신자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할 때 면역력이 떨어집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살펴보면 아브람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세상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아내로 인해 자기 생명이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를 낳아야 할 구원의 계획 가운데 있는데 아브람은 그것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두번째로 자기 아내를 사라로 속인 사건이 창세기 20장에 나옵니다. 본문 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하며.” 아브라함이 헤브론 지경 아므레 상수리 수풀(13:18)에서 장막을 걷고 남방, 곧 팔레스틴 남쪽 지방인 네게브로 이주하였습니다. 11절에 보면 그랄 왕(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인 줄 알고 자기의 침실로 데리고 갔다가 죽을 뻔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는 사라의 나이가 75세(창 12:4)의 중년의 나이였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애굽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사래를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며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여전히 믿었더라면 이러한 부질 없는 염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고 인간적인 처세 방법을 택했다는 것은 엄연한 잘못이자 나아가 남을 속이려는 기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거짓말한 결과는 극도의 위험에 자신의 가정을 내어맡긴 것입니다. 아브람 자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래의 순결은 빼앗기게 되고 더구나 사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철저하게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적당하게 타협하거나 법을 위배하게 되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죄의 유혹도 시간이 지나면 업그레드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의 위험이 닥치면 거짓말을 하는 강박증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시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타협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쪽 진실로 그것을 사실인양 이중 잣대를 갖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또 그는 정말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으라.” 자신의 아내가 이복누이인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내라는 사실을 숨긴 것입니다. 절반의 진실을 진실이라고 믿게 하는 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내뱉은 말을 끄집어 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노라.” 그러나 이러한 두 사람과의 약속이 정당한 것일까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일까요?아브람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요?
3. 인간의 위기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됩니다.
창세기 12장에서도 아브람이 자신의 아내를 빼앗기자 하나님께서 사라를 특별한 방법으로 지켜주십니다. 은혜의 항 바이러스 작동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밤이 되기전 갑자기 왕과 후궁들과 종들까지 병에 걸렸다는 보고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라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그래사 아브람에게 왜 나에게 이렇게 하느냐고 책망합니다. 신자가 어려운 상황이 두려워 하나님을 멀리하면 세상에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신자로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사라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갔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살려고 하다가 벌린 일이 아비멜렉이 하나님께 죽을 뻔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아바멜렉이 사라를 범하지 못하도록 현몽하셔서 막으셨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하나님께 자신이 온전한 마음으로 깨끗한 손으로 하였다고 변호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비멜렉의 입장을 인정해 주십니다.
아비멜렉이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모든 종들을 불러 지난 밤에 일어난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책망합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실수하면 하나님이 불신자들을 통하여 신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하나님 방식을 통해서 그분이 하나님이 되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신자를 심어 두신 목적입니다.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어쩡쩡하게 살아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한번 범죄하게 되면 동일한 범죄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것이 이삭과 같이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자녀들은 그것을 보고 자라기 때문에 자신은 그렇게 안해야지 하지만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내 자녀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할 때 그것을 막으시는 경우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문제가 생길 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이 왜 안 막아주시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를 처리하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애굽 왕 바로나 그랄 왕 아비멜렉이 죄를 지은 것보다는 아브라함이 죄를 짓도록 원인을 제공한 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재앙을 내리십니까? 바로 왕과 그 집에, 그리고 아비멜렉과 그에게 속한 자가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그 덕에 재산을 불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잘 해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 기도를 받고 아내를 돌려야 너와 네게 속한 자가 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선지자인 이상, 아비멜렉이 그의 아내를 취하려고 한 것은 선지자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범죄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아비멜렉의 죄는 아브라함의 중재 기도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비멜렉 앞에서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움에 처해 순식간에 권위를 회복하는 장면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궁지에 몰린 아브라함이 선지자적 권위(7절)를 회복할 수 있도록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열어주심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18절).
심지어 창세기 21장 25, 34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영토에서 우물을 파고 지낼 정도로 장기적인 체류허가를 얻어냅니다. 이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자신이 잘나서가 결코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 때문에 빛 된 사명을 다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다시 반복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세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넘어지는 기회를 만들지 마십시오
둘째, 스스로 만든 해결책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셋째, 절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결하려고 하오니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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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지도자는 doing보다는 being이 더 중요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는 먼저 지도자의 자격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자격이란 적합한 인격, 지식, 기술, 경험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감독의 직분이란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 보면 “양떼롤 돌보는 목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로 돌아왔느니라.”초대교회의 감독이 되는 것은 온전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딛 1:5-9). 오늘날 감독이 직분은 목회자와 장로와 교회와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지도자는 크게 두 가지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는 잘 다스려야 하고 다른 하나는 잘 가르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피해야 할 덕목이 있습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 구타하지 아니하며 다투지 아니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갖추어야 할 덕목은 절제하고 근신하며, 단정하고 관용하며 나그네 대접을 잘 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의 첫번째 조건은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합니다. 선한 일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것에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일상생활에 충실한 것을 말합니다. 감독이 자격 요건, 교회의 지도자는 두번째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완벽해야 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도덕적, 인격적,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의 세번째 조건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아내에게 신실해야 하며 가정을 잘 지키는 자라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은 절제가 배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뿐 아니라 모든 면에 절제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근신해야 합니다.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분별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신중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외모가 단정해야 합니다. 도에 지나치지 않고 정중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나그네 대접을 즐겨해야 합니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가르치기를 잘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배워야 합니다. 단순히 가르치는 것만 아니라, 가리킬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시 진정성과 영적인 감화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술을 즐겨하지 말아야 합니다. 술 곁에 오래 앉아있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술을 즐겨하지 않아야 합니다. 술에 취하면 자제력을 상실하여 판단이 흐려집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관용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5절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철저하고 단호해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고 관대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구타하지 않아야 합니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언어 폭력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서로의 의견이 달라도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도자에게도 돈이 필요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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