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계속적인 사람과의 만남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만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언제나 그 사람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병든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 귀신들린 사람, 죽게 된 사람, 갈등하는 사람, 부자, 의사, 세리, 죄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첫번째 부류의 사람은 은혜를 베풀기 위해 찾아온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로 향유를 부은 여인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왔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고민이나 문제, 아픔, 상처를 치료 받기 위하여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이유는 은혜를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늘 들었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은혜를 받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는 목적이 그와 정반대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 나오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은혜를 깨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동기가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깨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걸고넘어지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과의 만남을 그들과의 만남과 대조시키시면서 그들이 누구인가를 적나라하게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매주 혹은 매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교회로 나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나오십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 입니까? 은혜를 깨기 위해서 입니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입니까?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예수님께 쓰임 받는 수준이 전혀 다릅니다. 교회의 사역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같이 쓰임받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결실을 맺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쓰임받는 기간이 다릅니다. 사역도 다릅니다. 열매도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주님께 크게 쓰임을 받으려면 주님께 나오는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교훈을 깊이 배우고 깨닫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1. 자신이 특별하다는 바리새인들의 근성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 쓰임을 받기 이전에 먼저 우리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과연 나의 영적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야합니다. 믿음이 어리든지 약한 경우는 사람에게 의존하고 기대야만 지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나 교회의 일을 충성스럽게 잘하려면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숙한 성도가 되라는 것은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시켜서 일을 하는 사람이 된다면 영적으로 아직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하려면 날마다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만큼 교회의 일도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일을 해도 잘못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보실 때 그들의 영적 수준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만큼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바리새인하면 나쁘고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영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도 논쟁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것만을 고집하며 자랑으로 삼는 믿음의 철부지입니다.
본문에 바리새인은 자칭 의인이고 옥합을 든 여인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행동은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은 의도적으로 예수님과 대립을 합니다. 여인은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을 섬깁니다.
본문 39절입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바리새인들의 판단은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죄인과는 거리를 두고 차별화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여인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기를 만지는이 여인을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거룩한 선지자가 범죄자와 함께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선지자라고 한다면 특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부족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실수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실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단점도 이와 비슷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은혜 체험도 많이 하였습니다. 이러한 좋은 장점들을 하나님이나 교회나 성도를 섬기는 역할로 사용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특별한 그룹을 만들어 자기 의를 내세우며 분쟁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 장 11절 하번절에서 12절입니다.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우리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별되게 사는 것이 특별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특별한 것과 구별된 것의 의미를 모르고 행동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버려야할 자신을 자꾸 드러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많으면 분열되고 서로 벽이 쌓입니다. 교회가 혼란스럽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자기를 더 내세우려는 바리새인을 닮은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그런 성을 쌓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를 낮게 만드는데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믿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교회는 특별한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니라 구별된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2. 바리새인들과 같이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리새인들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여인을 격려하거나 칭찬하기 보다는 비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죄인이 용서를 받는 것보다 그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들추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행동에 대해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본문 41-43절입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지만 심오한 진리를 말해줍니다. 바리새인이나 옥합의 여인이나 둘 다 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만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평생 간직한 옥합을 예수님께 가지고 그의 발에 입맞춤을 한 것을 잘했다고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어떻게 죄인과 가까이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연약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세워주기보다 거침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예수님 앞으로 인도해야할 사람이 도리어 예수님께 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심지어 천국가는 길까지 막아버리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해 ‘화를 받을 사람’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 천국 가게 하는데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다가 사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이라도 나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작은 상처나 아픔이 되는 것은 아닌지, 십자가에 거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옥합을 들고 찾아온 여인이 죄인인걸 알면서도 맞이해 주셨습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도 교회에 오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잘되도록 함께 기도하고 좋은 것을 나누며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3. 바리새인들의 탐욕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믿음생활에 치명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욕심이고, 탐욕입니다. 아담과 하와, 가롯 유다가 타락하게 된 것이 바로 탐욕 때문입니다.
욕심을 내게 되면 하나님을 버리든지 멀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욕심이 죄라고 했습니다(약1:15). 바리새인들은 욕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3:25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겉은 깨끗한데 안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 되는 유일한 진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헌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본문 47절입니다.“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이 여인이 눈물로 자신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자신의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기의 목숨 같은 그 어떤 것이라도 예수님에게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움, 증오, 탐심이 가득하게 되어 그 어떤 것이라도 바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은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으면서 희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바쳐기는 커녕 자기의 욕심으로 채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보십시오.44-46절을 보십시요!.
왜 그들이 그렇게 인색하고 완악한 것일까요?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인 마음에서 만들어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이 소중하게 모은 향유를 드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만나 그동안 죄의 속박에서 살았던 타락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도록 해주신 죄의 해방과 자유로부터 온 사랑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런 죄 사함을 받으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려면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께 사랑을 받았는가를 알면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결심과 각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가르쳐주신 말씀이 마태복음 25장입니다. 42-43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스스로는 잘 믿고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것 하나도 예수님께 자기의 몫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교회 일은 욕심으로 하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열심이 아니고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향유를 부은 여인과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스스로 바리새인을 선택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이 없으면 나도 바리새인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바리새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예람교회는 매일 주님 앞으로 나오는 성도들의 손에 향유가 담긴 옥합을 들고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들로 넘쳐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기뻐하고 자신의 몫을 감당하며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열심 있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기의 몫을 드리는 예수님과 여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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