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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네트워크(고후 1:7-11),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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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당한 고난을 성도들에게 나누어야 할까요? 묻어 두어야 할까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고난을 나누고는 싶은데 상대에게 부담을 안겨주는 것 같애 망설이게 됩니다. 교회에 자신에 대한 소문이 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꺼리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책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힘에 부칠 정도로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진 적이 있다고 토로합니다.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이 당한 고난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공지한 것일까요? 본문 7절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고난을 당한 것 같이 위로에 참여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견고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에 파묻히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의 고난을 잘 극복하게 될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고난의 네트워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페이스북도 있고, 카톡도 있고 인스타그램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로 올리는 사진은 어떤 것일까요? 어디 가서 무엇을 했는지, 어떤 맛집을 갔는지, 어떤 소감을 가졌는지에 대한 게시물을 올립니다. 간혹 생일에 축하 메시지를 올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은 너무 솔직하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페이스북에서 김목사님이 생신이라고 알려주네요. 생일 축하합니다. 기억해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좀 그렇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힘든 것을 나눌 수 있는 고난의 네트워크가 있습니까? 당신이 고난 당할 때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실수와 약점까지도 먼저 이야기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손해보기가 쉽고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런 것 자체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당하는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고난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9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너무 힘이 들어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그렇게 믿었던 어떤 사람도 의지하지 말고, 자신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을 기울이고 전적으로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 고난을 나눌 수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하십시오. 제가 목회하면서 9:1의 법칙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아홉 명의 사람들이 저를 힘들게 하여도 한 사람 이상은 제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붙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약할 때마다 하나님깨ㅔ서는 한 명 이상의 성도들을 붙여 주셔서 위기를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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