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회복시켜라(창 25:27〜34)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이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지식이나 지위에 있는 것도 물론 아니며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불행한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불행하다는 것이고, 행복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적 행복이 있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 행복이 있습니다. 상대적 행복이란 나와 가정과 사회라는 삼자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입니다. 가정의 가치관이 바르고 부모님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배울 것이 많고, 사회가 바르고 내 자신이 바를 때 누리게 되는 행복이 상대적 행복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행복이 있습니다. 가정이나 사회가 아무리 일그러졌어도 그 일그러짐에 영향을 받지 않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저자의 기도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합 3:16-18).
이것을 절대적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돈, 지위, 명에,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내적 행복을 절대적 행복이라고 합니다. 바로 신자들에게 이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축복의 유언을 하는 모습이 신명기 3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 아셀 지파에게 이런 축복을 합니다.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신33:24-29).
무슨 말씀입니까? 있고, 없고, 가졌고 못 가졌고, 누리고 누리지 못하는 외부로부터 오는 만족을 행복의 기준으로 하지 않는 축복에서 아셀 지파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등장을 합니다. 먼저 에서를 상대적 행복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야곱은 절대적 행복을 소유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오니 야곱이 팥죽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동생 야곱에게 ‘내게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30절)고 조릅니다. 그러자 야곱이 약삭빠른 것을 합니다. 31절에 보면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고 합니다. 에서는 대답하길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고는 그 소중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습니다.
에서는 훗날 깨닫고 보니 소중한 것을 알았지만 이미 빼앗긴 후였고, 잃어버린 다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는 12:1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성경은 에서를 ‘망령된 자’. ‘어리석은 자’로 평가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상대적인 행복 때문에 절대적인 행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장자의 명분이란 말이 4번이나 나왔습니다. 대단히 장자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장자권이 중요합니까?
첫째는 제사의 권한이 장자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에게는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특권이 장자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둘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얻게 되는 권한이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되는 기업을 이을 자는 장자입니다.
셋째는 메시야의 계보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장자권이 계승 되는 혈통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마1:2) 야곱 대신에 에서가 들어가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 귀한 축복을 생존 문제라는 배고픔 때문에 경홀히 여겼습니다. 더욱더 장자권의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축복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없이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축복을 받아야 소득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연습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시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유명한 주석가이자 목사인 매튜 핸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도와주심과 성공하게 하심과 자비로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설교도 할 수 없고, 강연도 할 수 없고 축도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복의 근원이 되어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포기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에서가 실수했으니 에서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의 핵심은 34절 끝 부분에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이 말씀 속에서 에서의 사람됨, 그 본질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에서는 영적인 신령한 권리와 신령한 축복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과 신앙,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장자의 명분을 소홀하게 생각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임종을 맞이하면서 로마서 8;18절을 수없이 반복하며 외웠다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보이지 않는 것, 신령한 것, 영원한 것에 대한 큰 가치를 두고 소중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자꾸 되새기는 것일까요? 너무 자주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려운 일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에서처럼 육체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말씀에 묶어두고 자신을 치는 행동을 계속해야 썩어질 것들에게 메이지 않는 것입니다.
에서를 보십시오. 창세기 28:6-8을 보면 이방 가나안 여인인 마할랏과 결혼을 합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보다 육체적인 욕심에 더 집착합니다.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팥죽을 달라고 할 때도 그렇습니다. 순간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좀 더 참고 기다리면 되는데. 온 식구와 함께 먹을 수도 있는데. 당장 내 놓으라고 합니다. 창세기 25장 32절에 보면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정말 죽게 되었습니까? 배고픈 것으로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더 있다가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한 사건을 과장하는 것, 스스로 위기를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로 신자들 중에는 약간의 문제만 생기면 못살겠다느니, 끝이라느니, 죽어버리겠다고 말하는 스타일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너무 눈에 보이는 것, 현실적인 것에 매여 정말 중요한 신앙까지 잃어버리는 무신론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신자들에게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5:1-7)
이렇게 신령한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신자가 되십시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육체를 위한 것을 위해 죽기 살기로 매달리지 마시고 영적인 것에 매달리십시오.
눈앞에 당장 떨어지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미래를 보십시오. 고사성어에 조삼모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송나라 때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좋아하여 집에서 많이 키웠는데 날이 갈수록 숫자가 많아져 먹이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원숭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열매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씩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데모를 합니다. 적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말을 바꾸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하니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도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것만 생각을 하지 미래는 생각지 않습니다. 에서 스타일입니다.
이제 본문 34절의 유감스러운 장면을 생각하며 마치겠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배가 고플 때 헛소리 했다손 치더라도 팥죽 먹고 정신 차린 다음에야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다느니 하고 말 한 미디쯤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먹고 마시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잘못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에서는 그 한마디를 못해서 평생 은혜없는 복, 없는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7:36-41절을 보면 야곱이 간사하고 나쁘다며 증오하며 죽이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에서는 야곱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현세적인 것, 눈앞에 당장 벌어지는 사건에 매여 신령한 것. 영원한 것, 은혜로운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방법에서야 물론 잘못한 점이 있습니다만 신령한 복, 절대적인 복을 간절히 사모한 나머지 마침내 장자의 기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홀히 여긴 반면에 하나님의 축복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되느냐? 신령한 것에 목숨을 거느냐?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느냐?상대적 행복이냐? 절대적 행복이냐? 야곱이냐? 에서냐?
여러분, 스스로 가야 될 목표를 정하십시오, 그러나 어리석다거나 망령되었다는 평가를 듣지 않도록 올바른 선택을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사십시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행복한 사람이 되어라(시 1:1〜6)
어떤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님이 공장 시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휴게실에 들어갔는데 공장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한 학생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공장장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이렇게 일하는 시간에 휴게실에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느냐며 당장 해고를 시키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 때 공장장이 말하길 저 학생은 우리 공장의 직공들 중에서 충실하게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자기 일을 한번도 소홀하게 다룬 적이 없다고 선처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직접 학생을 불러 더 이상 이 공장에서 일할 수 없으니 지금 가서 모자를 갖고 공장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학생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그는 사장 앞에 무릎을 꿇고는 “사장님, 저를 해고시키지 않는다면 다시는 책을 공장에 가져오지 않겠으며 야간학교도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만일 공장을 그만 도게 되면 우리 어머니와 동생들을 굶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자 사장님은 안 된다. 더 이상 우리 공장에서 일할 수 없다. 그러나 내 계획을 너에게 말해 줄테니 야간학교 대신 주간학교에 다니고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기 바라며 매월 첫 주 월요일 아침에 네 봉급을 준비해 놓을 것이니 가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은 기쁜 소식을 어머님께 알려드리기 위해 집을 향했고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게 되었는데 역시 사장님의 도움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는 고마움을 전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의논하고 싶어 사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사장님은 많이 늙었고 열심히 공부한 이 청년을 격려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들었습니다. 사장님, 저는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기 때문에 앞으로 명 변호사가 되도록 열심히 일해 보겠습니다. 라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것 참으로 좋은 계획이라고 칭찬을 한 다음 사장님은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무엇을 하겠는가? 글쎄요, 성공한 다음 명성을 얻고 훌륭한 변호사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무엇을 하겠는가? 결혼을 해야죠, 내가 바라고 원하는 인생관과 이상을 가진 여자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자녀를 잘 키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그 다음에는 세계여행을 하고 멋지게 살다가 변호사를 은퇴한 다음 공기가 좋은 시골에 가서 여생을 보내다보면 죽음의 천사가 찾아오겠지요. 그 다음은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또 늙은 사장님은 물었습니다.
젊은이의 얼굴이 이상해지더니 이런 식으로 어디까지 물으시려고 하십니까? 하고는 사장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자네가 은퇴를 한 다음 언제인가 사망의 천사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죽음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 때 젊은이의 얼굴은 창백해지면서 한참을 생각하고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사장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모든 계획은 다 좋다. 그런데 한 가지 잘못된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잘못된 위치에 두었어! 너는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어야 하는데 인생의 마지막 장소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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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둔 사람이고, 하나님을 마지막 자리에 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었더니 그 때서야 하나님께 일생을 맡기고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16세기의 성자 필립 디 네리(Philip de Neri)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살아갑니다. 이것을 행복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불행하게 살기보다는 행복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어디로부터 온다고 믿고 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 다른 곳에서 내게로 다가와 주기를 바라며 기다립니다. 이것이 행복에 대한 가장 큰 함정입니다.
행복이란 다른 곳으로부터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언제나 강조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환경이 별도로 있다든지 행복해지는 여건이 다른 곳에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보십시오. 에덴동산처럼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에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파라다이스 즉 낙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복되지 못할 때 그들은 행복을 잃고 낙원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행복이란 어디에 살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행복은 장소의 문제보다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환경을 요구하고, 행복해지는 조건을 내세우기 전에 먼저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행복합니다.
막연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복된 세상이 내 앞에 열려지기를 바라보는 것은 헛된 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땅을 주시는 것입니까? 자식을 주시는 것입니까? 창세기 12: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복의 근원“ 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복된 사람이 먼저 되어야 복된 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복된 사람은 어디에 살아도 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복이 되지 못한 사람은 어떤 좋은 환경을 주어도 복을 잃고 맙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메마른 사막과 같은 가나안을 선택했습니다. 환경을 따진다면 절망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복된 사람이기 때문에 복을 만들어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를 시켰습니다. 하지만 조카 롯이 택한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의 동산같고 물도 넉넉한 비옥한 땅 이었지만 결국 타락하고 아내를 잃는 아픔을 겪고 불행하게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의 운명도 똑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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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사람은 환경과 여건에 관계없이 항상 행복합니다.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졌다고 좋아합니다. 고독하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건강하면 일할 수 있다고 병들면 조용히 기도할 수 있다고 좋아합니다. 하는 일이 순탄하면 만사를 형통케 해주심에 감사하고, 역경에 처하면 자신을 단련시키고 정화시켜 주심에 대해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사람은 처해있는 환경이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을 만들 수 있는 행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된 자리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복을 좇아서 방황하겠습니까? 아니면 복을 창조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처음 설교를 아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12).
무슨 말입니까? 천국이 임하고 위로를 받고, 땅을 기업으로 받고, 배부르고 긍휼히 여김을 받고, 상을 받는 것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복이 옵니다. 그러므로 복이란 나 자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복 받는 길이 따로 있다고 시작하지 않고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시편1편을 묵상하며 읽게 되면 내가 복 있는 사람인가 복 없는 사람인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1절)고 했습니다. 좇지 않는다는 말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악인이란 불신자,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불신자의 길, 불신앙의 길을 따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따라서 삽니까? 여러분을 끌고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며 따라가고 있습니까?
시편 119:97-105에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토록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 보다 더 하니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아멘 하고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복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보고 듣고, 묵상해야 합니다. 신자는 말씀 없이는 한 시간도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말씀하시길 자신의 나이만큼 성경을 잃을 수 있어야 신앙생활을 잘 하는 신자라고 했습니다. 20살이면 20번은 읽으셔야 합니다. 30이면 30번을,. 40이면 40번을 읽어야 합니다. 나이에 비해서 성경을 아직도 형편없이 읽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라도 성경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말씀이 지켜주어야 안전합니다. 말씀이 충만해야 다른 짓을 안 합니다. 말씀을 잘 아는 만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부흥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이 본문을 오바댜서라고 하시면서 다 찾으라고 하신 다음 어떤 집사님을 바라보니까 당황을 하는데 옆에 앉아있는 집사님께 오바댜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집사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데 한다는 말이 오바댜는 캄보디아 옆에 있다고 하더랍니다. 이 정도면 다 된 것 아닙니까?
성경을 많이 읽으십시오. 말씀을 많이 들으십시오, 들은 만큼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주일이라도 말씀 듣겠다는 욕심으로 오십시오. 새벽에 말씀듣기 위해 일어나십시오. 저녁에도 오십시오. 하나님의 바른 응답도 말씀에서 나오고, 축복도 말씀에서 오며 , 능력도 말씀에서 옵니다. 혹 여러분 중에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뜨겁게 변화되지 않는다고 고민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일년 만이라고 빠짐없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은 자라고 신앙생활에 활력이 있고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며,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1절)고 했습니다.
죄 짓는 사람들이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지 않는 사람의 사상과 철학과 행동하는 길에 서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시간을 대부분 사용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주로 만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사십니까?
세상 사람들과 기독교인의 삶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내일이 없다는 절망적 의식에서 삽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오직 돈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은 다릅니다.
신자에겐 모든 것에 목적이 있고, 부름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내일의 소망을 갖고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복하 삶을 원하신다면 믿는 사람들 틈에 끼십시오. 되도록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십시오. 믿음이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십시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라”(2절)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으며 완악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자주 가십니까? 어떤 의자에 앉기를 바라십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리를 피하십시오. 높아지고 박수 받는 자리를 거절하십시오. 상을 받는 자리는 거절하십시오. 오히려 감사하는 자리를 찾아가고 사랑을 나눠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자리, 용기를 주고, 위로를 줄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십시오. 이왕이면 어려움을 풀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의미 있는 일화이기 때문에 소개를 해드립니다. 임금님이 길 한 복판에 큰 돌덩이 하나를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나무 뒤에 숨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길 한 복판에 놓인 돌을 보고 웬 나쁜 녀석이 길 복판에 돌을 갖다 놓았냐고 투덜거리며 비켜갑니다. 요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돌에 부디쳐 넘어질 뻔 하자 고래고래 욕을 하고 원망을 하면서 재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는 지나갑니다. 마침 한 채소장수 할아버지가 수레를 끌고 오다가 그 돌을 보고는 수레에 돌을 실어 옆으로 옮겨 놓습니다. 그런데 이게 원일입니까? 힘겹게 돌을 옮겨 놓고 보니 그 돌밑에는 금은 보화가 감추어 있는게 아닙니까? 그리고는 이런 글이 적혀 있는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습니다. 누구든지 돌을 옮기는 사람에게 이 금은 보화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살아가실 작정이십니까? 살살 피해가며 기회주의자처럼 사실 것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 저 사람 원망하며 살것입니까? 아니면 내 앞에 놓여있는 무거운 짐들을 묵묵히 옮겨 놓으면서 살아가시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피하고, 역경이 있으면 불평하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원망하는 자리에 앉지 마시고, 문제를 옮기고,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다시 정리를 한다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될 말씀이 3절에 있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바로 행복에 대한 성경의 원리가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생활이나 교회생활, 가정생활이 모두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항상 푸르게 살아가는 삶으로 매사가 형통하시길 바랍니다. 이제부터 복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복이 없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먼저 복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복있는 사람이 되면 하늘의 신령한 복이든 땅에 기름진 복이든 여러분이 기대하는 행복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십시오. 말씀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말씀의 축복으로 사십시오. 복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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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과정을 놓치지 마라(사 48:1〜11)
사람들의 실패와 성공은 그리 쉽게 평가될 수없습니다.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실패일 수 있으며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성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 성공했다고 해서 반드시 내일도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오늘까지 불행했다고 해서 내일도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삶의 원칙이 있다면 성공했느냐 아니면 실패했느냐에 앞서 오늘이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성공자이며 행복자일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극적인 인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성공자가 별도로 있는 것도 아니며 실패자로 찍혀 나온 사람도 없습니다.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의 스케줄만 잡힌 채 살아가라는 인생도 없으며 반대로 아픔 없이 날마다 웃으며 살라는 럭키보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과보다는 동기와 목적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실패나 고통의 문제를 생각해보십시오. 올해는 신자들 모두가 실패나 고통이나 어려움 없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마 몇 번은 거쳐야 될 일이기 때문에 먼저 대비한다는 마음에서 말씀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고통이나 어려움을 당하면 흔히 하나님을 들먹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아니까 하나님이 안 계셔는 못해도 하나님이 뭘 하고 계시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하나님이 나를 모르시는가!라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아니면 내가 너무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나를 쓰시지 않는가라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죄가 많아서 안된다고 스스로 주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고통이나 어려움의 징후가 내가 죄가 많기 때문에 일어난다고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9:1-3을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예를 통한 주님의 설명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길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신이오니까? 그 부모 오니까? 소경이 된 것이 자기의 죄가 많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이것은 죄의 문제가 아니라 하시면서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절)고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꾸 일이 안되거나 불행한 일이 생기면 어디로 갑니까? 재수가 없어서! 팔자가 그래서 ! 죄가 많아서 한 번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는 쪽으로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문제를 똑바로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는 것 아닙니까? 내 뜻대로 안 되고 내 마음에 못마땅합니다만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물론 죄의 문제이기도 하고 환경 요인의 문제도 있고 무지와 무능력 때문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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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적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가 현실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려워도 견디어야 하고 고되어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속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3C로 나타내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Communication," "Content", "Command"입니다. “의사소통”, “만족”, “명령”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의논하십니다. 우리와 소통하십니다. 우리와 이야기하십니다. 우리의 의견을 물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족하게 하십니다. 내 소원대로 다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하십니다. 내 뜻과 무관하게 내 의견이나 소원에 관계없이 명령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 명령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냐 ! 불순종이냐! 하겠느냐!, 아니면 못하겠느냐!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말씀과 응답”, “명령과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인간은 응답하게 되어 있는 것이 창조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에덴동산을 만들어 죄인들로 만들어 놓았냐고 불평합니다. 선악과를 두셨으면 가시철망이라도 쳐서 죄를 못 짓게 하시지 공연히 타락하게 했다고 합니다. 바로 에덴동산의 문제는 옛날 천지창조 때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의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의 응답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있습니다.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 !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깊으신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든 환난이든 실패든 질병이든 모든 사건 속에는 하나님이 명령하는 말씀 즉 계시가 담겨있기에 불평이나 원망 이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기대하며 원하시는가를 찾는 것이 바른 신앙관을 갖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4절에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고 하나님이 꾸짖습니다. 갖은 죄악과 불신앙으로 타락하고 교만해진 인간을 가리키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야기입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완악해졌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무서워졌습니다. 어느 곳을 가도 사람 때문에 겁이 납니다. 사람이 무서운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역시 목에 힘줄이 무쇠 같은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정말 무섭습니다. 그런 세상을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서울에서도 보셨고, 분당에서도 보셨습니다. 무쇠 같은 힘줄로 뻣뻣해진 목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사야1:4-6절을 보십시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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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목이 무쇠같이 뻣뻣한 백성들을 그냥 내버려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꺾으셨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하나님은 끝내 이루시고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회개시키고 기어이 돌아오게 하시고 기어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십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연단이나 풀무에 넣어서라도 정화시키고, 듣게 하시고, 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꿇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순종케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결국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택한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통이 무엇이며 실패가 무엇이고, 불행이 무엇일까요? 연단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것입니까? 왜 고난의 풀무를 등장시키십니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훼파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 70년을 당해야 될 고통을 고난의 풀무라고 합니다. 무서운 고통의 70년! 전쟁과 노예의 70년! 괴로움과 억압의 70년! 바로 이 70년의 고통의 기로에 서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환난과 고통의 고난의 풀무에서 선택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고난의 풀무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자를 선택하십니다.
회개하는 자를 선택하십니다. 교만을 꺾고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선택하십니다. 지금 어떤 분은 고난의 풀무 70일 중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7개월 동안 고난의 풀무에서 목말라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고난의 풀무 7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쳐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나를 선택하기 위한 하나님의 비법임을 인정하십시오. 내가 꺽고 있는 일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계시가 있음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보다 더 질그릇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잠시 연단하시는 훈련과정 중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저는 때로 사람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무엇보다 겸손해 지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분도 보았고, 박사님도 보았고, 일류회사의 사장님, 교수, 의사, 수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공부 많이 했다고 겸손해지는 것은 못 봤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 분들에게도 겸손해 지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 겸손해지는 방법은 호되게 얻어맞아야만 낮아지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겸손만큼 배우기 어려운 과목도 없을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귀한 축복과 은사는 어려운 시련 속에서 즉 고난의 풀무에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풀무는 적어도 우리에게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풀무를 통해 우상을 버리게 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고, 순수하게 되지요, 풀무 불로 온갖 더러운 찌꺼기와 불순물을 다 태워 버리게 되지요. 내가 버리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 버리게 하시는 것이 고난의 풀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정신 차리게 만들어 주는 것이 고난의 풀무입니다. 거짓된 사람을 진실한 사람으로, 세상만 아는 사람을 하나님을 알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고난의 풀무입니다. 고난의 풀무에서 가치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바뀝니다. 고난의 풀무는 우리에게 복 중의 복입니다.
이를테면 늘 밖으로만 나돌던 몹쓸 남편들도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면 자기 아내만 찾습니다. 그제야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다. 형제도 알고 이웃도 아는 것은 어려움을 당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그 길뿐입니다. 고난의 풀무에 들어야 정신을 차리듯 고난의 풀무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10-11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을 믿으십시오. 연단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아야 합니다.
욥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이제 고난의 풀무에서 그가 나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내가 해야될 일을 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사랑해야 될 것을 사랑하게 하실 것입니다. 용서해야 될 것을 용서하게 하실 것입니다. 진실하게 하시고 충실하게 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는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의 손길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절망과 낙심, 고통과 시련, 실패와 불행의 때에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고난의 풀무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고난의 광야에서 당신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고난의 풀무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 하나님, 고난이 올 때 감사하게 하옵소서!
행복의 가치를 찾으라(엡 1:3〜14)
오늘도 예수 안에서 좋은 일들이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세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꼭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첫째, 지금까지의 신앙 경력을 접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왔던 신상생활을 무효화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나름대로 해왔던 신상생활을 고쳐보자는 뜻입니다.
둘째, 말씀을 사랑하는 싸움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들에게 믿음도 주지만 바른 믿음을 정확하게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동안 말씀을 붙드는 일에 열심을 다해 주십시오.
셋째, 성경적인 신자가 되기로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과서는 성경이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충실한 성도가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부탁을 마음에 새기며 본문을 보겠습니다.
먼저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주목하십시오.
복에는 두 개념이 있습니다. “땅에 속한 복”과 "하늘에 속한 복“이 있습니다. 땅에 속한 복이란 불안전하고 상대적이고 순간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 건강, 재무르 돈 등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복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요구하는 복이란 하늘에 속한 복으로 신령한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진정한 복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떠난 복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연습을 해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시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축복하셔야만 소득이 있습니다. 이 고백이 강할수록 믿음 좋은 신자입니다.
창세기 25:32절에 에서와 애곱의 팥죽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서의 결정적인 결점이 무엇입니까?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긴 것입니다. 장자권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팥죽 한 그릇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에서의 가장 큰 불행이 됩니다.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12:16절에 “망령을 떨었다.”고 평가합니다.
여기서 정리해 보십시오. 땅에 속한 복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며,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복이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 둘에 대한 싸움을 어떻게 하느냐가 신자의 사활을 건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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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1-7을 보십시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
무엇이 신상생활을 할 때 가장 어려운 시험거리입니까? 땅에 것에 눈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눈을 고정시킬 수도 없고, 속상하다고 뺄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요새 유행하는 말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 돈 액수 따라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짜 행복의 주도권을 돈이 쥐고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몇 평까지 아파트에 사느냐가 최대 관심사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뭘 해 놓고 사느냐에 말초신경이 자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무너질 장막 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아파트도 별 것 아니고 악세사리도 소용없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집!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살아야 될 살림집이 있습니다.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집! 이것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 같이 느껴지는 날이 옵니다. 그런 세계관을 열어 주시기 위해 성경이 있고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런 세계관이 열려있다면 이 세상살이의 태도가 훨씬 달라질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저자인 바울이 보는 세계를 여러분도 보십시오. 신령한 복을 보자는 것입니다. 신령한 복은 말하니까 엄청난 특별세계에서 사는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특별시에 산다고 특별한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지요. 신령한 복이라고 특별한 복이 아닙니다. 다만 나의 나됨을 알고, 그 나라를 바라보고 오늘을 만족하게 여기며 감사로 사는 신자를 신령한 복으로 사는 신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바쁘게 산다고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등심 먹고, 가제요리 먹고, 뷔페에 간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복을 갖고 사느냐를 깨닫는 사람이 정말 복받은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시 본분으로 가겠습니다. 왜 바울이 찬송으로 시작을 할까요? 신령한 복을 소유했기 때문에 찬송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이제 풀어보십시오. 신령한 복을 세 부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4-6절까지 과거의 복을, 7절은 현재의 복을, 8-10까지는 장차 누릴 미래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과거에 받은 신령한 복을 보십시오. 4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선택하셨다”는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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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복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감동적이며, 첫째 자리에 놓아야 될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내 행동이나. 내 노력이나. 내 공적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을 왜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3:10-12절을 보십시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서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요한복음 15:16절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나를 선택하셔서 예수를 믿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심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을 만큼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까?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절) 즉 완전한 자로 세워주기 위해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선택의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도는 반드시 성결한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을 계속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거룩하고 흠이 없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계속된 절제생활과 성령 충만의 생활에서 완전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선택하심이 복이라면 성결 되게 사는 것은 그 복을 생활에서 체험하며 사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받은 신령한 복을 생각해봅시다. “양자 삼으셨다”는 축복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사랑 안에서 예정하셨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으면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친자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다른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양자입니다. 당시의 로마법은 양자도 친자식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감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니 그것도 우연하게 된 것이 아니고 재수 좋아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정(5절)에 의한 계획 가운데서 되었다니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바울은 아들 됨에 대해 보다 확실한 근거를 7절에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돋 죄 사람을 받았으니.....”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은혜의 풍성함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은혜란 죄사람을 받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 피를 흘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구속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구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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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이란 값을 지불하고 속량해 준다는 뜻입니다. 용서해 준다는 뜻입니다. 마치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서 값을 지불해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피를 흘려 죽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예수를 믿은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차 누릴 미래의 신령한 복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고 현재는 아들이 되게 하셔서 그에 따르는 모든 기쁨과 의무를 갖게 하셨습니다. 이제 미래는 어떤 신령한 복이 있는가? 8-9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하나님이 알게 하신 계시된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은 때가 찾을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밀이 무엇일까요? 10절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하심이라.”즉 “통일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통일의 날입니까? 남북통일입니까? 3:1-6절을 보십시오. “....3절에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때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때가 찬 경륜의 때에 나타나는 비밀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는 통일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유대인에 비해 이방인은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었던 소외된 사람들이며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도 나는 유대인을 위해서 왔지 이방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여인의 간청을 외면했던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실 비밀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도 예수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장차 누릴 미래의 복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된 통일의 비밀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큰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흔들릴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어디에 오실까?
예수께서는 유대인 이스라엘을 특별 우대하시고 우리는 변두리가 아닌가? 그러나 너무나도 확실한 비밀이 공개되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우리는 후사요 지체된 한 몸이요 약속을 받을 자가 된 것입니다.
다시 본문 11절을 보십시오.“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할렐루야!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자입니다. 하늘나라가 내 집임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말씀 그대로 믿으십시오. 13-14절에 더욱 확인 시켜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당신이 진리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면 이런 신령한 복은 받드시 당신의 것입니다. 무엇이 근거가 됩니까? 성령께서 인쳐 주셨고, 보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었다면 아니 지금이라도 믿는다면 이런 과거의 복, 현재의 복, 미래의 복으 얻게 도비니다. 얼마나 당신이 복을 받은 사람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남았습니다.
6절에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2절에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에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3절의 시작이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런 복을 주시는가? 입니다. 공통된 단어가 둘이 있습니다. ‘영광’과 ‘찬송’입니다. 신령한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영광되게 살아야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선택하신 목적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 그의 뜻의 기쁘심을 따라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기업으로 삼으시고 소유로 삼으셨는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신분과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뜻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영광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자신의 의지력만 믿고 자신만을 찬양하고 싶은 욕망에 끌려 다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될 책임이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나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나를 천국 기업을 이을 자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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