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타락 이후에 노아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그만 육체가 되어서 자기 욕심과 계획대로 살아갔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를 통해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은 심판 가운데 구원을 받았지만 또 다시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인류의 분산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셋의 계열에 아브람이란 인물을 통해서 구원과 축복에 이르도록 개입하셨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가문에 시집을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입니다. 데라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아브람, 나홀, 하란입니다(창 11:25). 그런데 막내 하란이 먼저 결혼해서 손자 롯을 데리고 어느 날 나타났습니다. 당시에 작은 아들이 형들보다 먼저 결혼하는 것은 아버지 데라에게 큰 불효였습니다. 게다가 하란은 아버지 데라 보다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죽게 됩니다. 이 사건은 데라의 가정에 커다란 비극이었습니다.
결국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를 가게 됩니다. 그런데 큰 아들 며누리 사래(나의 공주)가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당시에 여자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은 큰 불행이었습니다. 사래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것은 집 안을 번성케 하지 못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집 안의 대를 끊어 놓고 마는 문제로 치닫게 됩니다. 고대 중동 지방에서 여인이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 이상이었습니다. 아예 저주받은 여인으로 단정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서 24장 2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람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편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삼겼으나.”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강 저편'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으로,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거주했던 '갈대아 우르' 지방을 가리킵니다(창11:31). 여기서 '다른 신(神)'들이란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섬겼던 우상으로, 당시 갈대아 우르 지방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섬겼던 월신(月神, moon-god)을 가리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나안 땅에 기근이 찾아옴으로 아브람은 남방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결국 아브람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창 12:10).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고향을 떠났지만 그에게 찾아온 현실은 매일 매일 식사꺼리를 챙기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내와 조카 롯과 함께 동행한 식솔들에게 미안해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집트까지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래가 너무 예쁘다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내의 미모 때문에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가 있다는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 보면 아브람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부르겠다고 합니다. 사라는 이에 대해 아무 말이 없습니다. 남편이란 자가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지가 마누라 덕에 대접받으면서살겠다고 벼르고 있지 않은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아브람이 잘 살아오던 고향을 떠나자고 할 때에도 사래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후 얼마 있다가 이집트로 내려가서 살자고 했을 때에도 말이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 가부장적 제도가 뿌리 깊은 사회에서 그래서 그런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닙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이 말에는 누가 와서 당신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아도 나는 상관않겠소“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사래가 아브람에게 대들며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래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결국 바로의 신하들이 사래를 바로의 궁으로 데려다가 아내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창 12:19).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 집 안에 무서운 벌을 내리십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람을 치시지 않고 바로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바로의 입을 통해서 아브람의 잘못에 대해 책망합니다(창 12:19).
사래가 가나안 땅에 머문지 10 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에 태기가 없자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민족을 이루기는커녕 대가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당대의 관습을 따르려고 합니다(창 16:2). 하나님께서 자녀를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방법으로 가져보겠다고 안달합니다. 사래의 제안에 아브람은 묵묵히 따릅니다(창 16:2). 사래는 여기서 또 한 번의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방법으로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자신의 몸종 하갈을 씨받이로 사용해서 후손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중동의 불씨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와 사라를 통해서 아들이 태어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창17:16). 이에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마음에 이르기를 백세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이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이제는 현실의 상황 속에서 그래도 가능한 것을 믿을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이삭이라는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창17:19).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두 천사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고 찾으십니다. 내년 이 맘 때에 네 아들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라가 이 소식을 장막 문 뒤에서 듣고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속으로 중얼거렸을 망정이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습니다. 사라의 생각에는 자신이 아기를 밴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라의 판단은 “어떻게 내가 아이를 밸 수 있을 것인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상식과 한계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이맘때에 사라에게 반드시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사라는 어떤 반응을 나타냅니까? 사라는 자신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을 따라 웃었습니다(창18:12). 그동안 자녀 문제 때문에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는데 이제 신경을 다 끈 상태인데 이제와서 다시 왜 그 문제를 끄집어 내십니까? 라는 뤼앙스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다 끝난 문제입니다. 그냥 이스마엘이나 잘 봐주십시오. 아브라함은 이제 상처를 지나 고집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이제 신경을 끈 상태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끄집어내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에는 먼저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능력만을 계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지만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 이 구절에는, 하나님의 재약속으로 말미암아 생긴 사라의 신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이 때의 사라의 신앙이 인정되었습니다(히11:11). 그러면, 사라의 신앙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한 태도로 증명됩니다. 이와 같은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경외(敬畏)였습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한 말씀은, 겉으로 나타나게 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속으로 웃은 사실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도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한(15절 초두) 사실을 보니 그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셔서 사람들에게 약점이 있을지라도 그들의 신앙은 신앙으로 인정하여 주십니다.
로마서 4장 19-21절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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