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란 구약의 히브리어 ‘아하브’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사랑’이란 최고 극한의 희생을 나타내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용어입니다. 예레미아 31장 3절입니다. “네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신약에서 사랑은 헬라어 “아가페”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남에게 주는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랑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을 보여 주는 사랑입니다(호 2:16, 20). 신약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증입니다.
둘째,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인간의 죄사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셋째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서로가 자기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나아가 이웃 사랑은 원수까지도 포함됩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3절입니다. “내가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심지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사랑이 아닙니까? 과연 사랑이 없다면 이러한 구제와 헌신을 할 수 있을까요? “
그런데 성경은 사랑이 없어도 구제와 헌신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과연 우리의 사랑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랑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로마서 5장 5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 우리에게 부어지는 지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할 때입니다. 요한일서 4장 15-16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로마서 5장 5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약속대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그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7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신 그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해주신 그 사랑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을 때 부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사랑입니다. 즉 아가페적인 사랑은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부어지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부어지는 사랑입니다.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부어지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부어지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까지 보여주신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봉사를 행할 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헌신하고 힘을 다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흔히 사랑하는 만큼 실망도 크고 상처가 크다고 합니다. 물론 인간적인 사랑은 이렇게 끝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것이 아가페적인 사랑이 되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분명히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아직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그가 나에게 입힌 상처가 분노라는 죄를 다스리지 못해 생긴 것이 아닌가?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저히 용서가 안될 만큼 원수와 같이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지 않은 지 점검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랑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에게 아가페 사랑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이 바로 당신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흘러가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십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수준과 세상 사람들의 사랑의 수준은 어떻게 다를까요? 누가복음 6장 3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어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래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사람은 계속 미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조차 사랑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혹시 당신도 미워하는 사람은 계속 미워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당신의 성격이라고 고집하고 있다면 빨리 고쳐야 합니다. 또 금방 사랑하다가 금방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행한 대로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단순히 내가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기분입니다. 그러면 아가페적인 사랑이 무엇일까요? 사랑의 동기와 출발이 다릅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아가페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하게 되는 것이 단순한 인간의 동정이나 나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바로 우리들에게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즉 우리는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지, 그렇다면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이렇게 사랑해야지.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 역시 교회를 위하여, 주의 종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이 바로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과연 어떠한 수준의 사랑일까요? 요한일서 3장 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가페적인 사랑은 단순히 상처와 위로에 좌우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그런 사랑도 아닙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같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마땅하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그런 수준의 사랑을 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시험 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요? 요일 3장 21-2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만약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책망을 받아 거리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사랑 안에서 담대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대로 응답받게 됩니다. 사랑과 기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고 기도하면 좋은 일이 많이 크게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지식에 근거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 9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됩니다. 무지한 사랑은 나중에 후회와 상처로 남게 됩니다. 무조건 잘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를 깊이 이해하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차e참된 사랑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2장 5절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계속 공급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떨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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