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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징계(사무엘하 13장),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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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같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아버지의 매와도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자식의 잘못을 징계하는 것도 역시 부모의 사랑인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내리시는 징계는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역시 사랑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다윗에게 그와 같은 사랑의 징계를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하나님께서 회개한 다윗을 지옥에 보내시지는 아니하시지만 징계까지 없는 것으로 특별 대우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징계의 채찍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편견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축복과 징계를 너무 물량적인 것만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잘먹고 잘살고 오래 살고 출세하는 것인 반면, 하나님의 징계는 가난과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라는 공식으로 모든 인생사를 풀어가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윗은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변함 없는 축복을 받고 살아가는 특권층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징계를 경고하신 이후에도 다윗은 여전히 전쟁에서 패배가 아닌 대승리를 하였으며 집안과 신변에 별 이상이 없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쳐서 취하고 (삼하 12:29)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있는 면류관을 취하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어오고 (삼하 12:30)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삼하 12:31).

 

다윗은 백성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있었고 나라는 안팎으로 견고하여만 갔습니다. 그렇다면 범죄한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실종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계속 유효합니다. 다만 잠시 집행을 유예하셨을 뿐이고 다만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법으로 다윗을 징계하시는 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삼하 13:1)

 

여기서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징계가 있을 것을 경고하신 후 하나님은 먼저 변함 없는 사랑으로 다윗을 승리하게 하신 이후 변함 없는 공의로 다윗을 이렇게 징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식을 통한 징계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한 후 자녀를 갖게 되면 그 다음부터 삶의 중심 축이 자신이 아니라 자식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고하며 돈을 버는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 먹고 입을 것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집착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식 때문입니다.

 

부모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자신이 부귀권세를 다 소유한 성공자라고 할지라도 방탕한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에는 항상 어두운 그늘이 있는 까닭은 자식의 성공이 부모자신의 성공보다 더 기쁘며, 자식의 실패가 부모 자신의 실패보다 더 아픈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지고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그의 자녀된 우리에 대한 사랑도 부모의 사랑으로 나타내시기 위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의 물 붓듯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제 멋대로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을 얼마나 가슴아파 하시는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자기 감정대로 산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밧세바 사건이며 하나님은 그것에 분노하셨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삼하 12:10)

 

이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그의 아들 암몬과 압살롬의 사건을 통해서 뼈저리게 체험하게 하심으로 육신의 아픔보다 더 큰 고통을, 물질의 손해보다 더 큰 손실을, 자신의 죽음보다 더 비통한 자식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2. 잘못된 생각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아내와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아들 암논은 아히노암에게서 난 맏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인 마아가에게서 압살롬와 다말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암논과 압살롬과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요 다말은 이복남매간이 되는 사이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 같은 경우 결혼을 금하였습니다.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레 18:9)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레 18: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그가 사랑해서는 안될 다말에 대한 욕망을 마음에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암논 자신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상사병이 날 정도였습니다.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삼하 13:2)

암논이 해서는 안 되는 잘못된 욕망과 생각에 사로잡혀 상사병을 앓고 있을 때 악한 마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간교한 요나답을 붙여 주었습니다.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저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삼하 13:3).

여기서 간교하다는 말의 뜻은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에 있어서 지혜로운 것을 가리키는 말로 교활하다는 뜻입니다.

요나답은 이새의 셋째 아들인 시므아의 아들로서 암논과는 사촌관계인데 성경에는 그를 가리켜 친구라고 한 것을 보면 친척이상의 절친한 사이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이상적인 친구가 아니라 차라리 친구가 아니었으면 서로가 좋았을 악연이었습니다.

 

사자성어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이 어떤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활한 요나답은 암논을 부추기고 그 욕정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가르쳐 주는 모사꾼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이 간교한 요나답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암논에게 있었습니다. 암논은 더 이상해서는 안될 생각을 발전시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여 친구의 그릇된 말을 따라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도 예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한 두 명 이상의 친구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는 친구는 나와 어떤 사이며, 나는 그 친구에게 무슨 말을 나누고 무슨 일에 함께 어울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고 할지라도 그 친구를 따라 지옥에 가려고 하지말고 그 친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친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잠 17:17)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27:6)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징계를 경고하신 후에 어떻게 그것이 시작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살핌으로 올바른 축복관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외적인 전쟁에서 승리만을 축복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이 무엇입니까?

다윗과 그의 자녀들이 올바른 신앙, 올바른 생각, 올바른 친구를 사귀면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그의 아들들이 아무리 호의 호식을 하면서 살아갈지라도 해서는 안될 생각, 사귀어서는 안될 친구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큰 징계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3. 잘못된 행동

암논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쁜 친구 요나답이 가르쳐준 방법을 실행에 옮김으로 다윗의 가문에는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과 같은 본격적인 파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암논은 일시적인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 다윗을 속이고, 강압적으로 다말을 강간하였을 분 아니라 자기 욕구를 채우고 나서 후회를 하고 괴로워 한 것이 아니라 마치 다말이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강제로 추행을 하고 강제로 내쫓는 악독한 일을 하였습니다.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삼하 13:14)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삼하 13:15)

우리는 이와 같은 암논의 모습에서 누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의 아버지 다윗과 같이 욕정에 사로 잡혀 앞뒤를 분간 못하는 다윗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의 대물림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식에게 선을 가르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과 더불어 실패의 확률이 큰 반면, 죄는 가르치지 않고 매를 들고 막으려해도 잘도 배우고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둔 부모들이 왜 자기 기분이나 감정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악을 씨뿌리는 것이고 그 죄악을 대물림을 하고 재앙을 자초하는 일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적에게는 강한 다윗이 자기 자식 암논의 그 같은 죄악을 알고서도 분통만 터뜨리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나약한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죄값이라는 죄의식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버지로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자그마치 이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최대의 피해자 다말은 고통의 세월을 보내었으며 압살롬은 복수의 칼을 예리하게 갈고 있었습니다.

그 오라비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저는 네 오라비니 누이야 시방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이에 다말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삼하 13:20)

 

압살롬은 암논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다말을 강간한 것처럼 압살롬도 암논에게 복수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의 동네 잔치 날인 양털 깎는 축제의 날에 암논을 초대하여 잔뜩 술에 취하게 하여 방심한 사이에 부하를 시켜 죽이게 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암논이 저지른 죄에 대한 복수이지만 압살롬은 다윗이 두려워서 도망을 쳐버리고 다윗은 그와 같은 자식도 자식이라고 잊지 못해 그리워하며 그 아들 때문에 피눈물의 세월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이며 정의롭지 못한 분이라고 누가 망발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내리시는 가장 무서운 징계와 형벌은 불신앙과 부도덕한 생각과 생활을 하도록 방치해버리시는 유기인 것을

우리는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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