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묻곤 합니다. 예람교회가 무슨 뜻이예요? 예람교회란 예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영어로는 yeram community church입니다. 우리 교회의 로고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J는 Jesus, P는 People, C는 Church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예배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곳입니다. 새로 나온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부탁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옳게 여겨 주셨습니다. 저는 찬송가 189장 4절에 부를 때마다 얼마나 힘이 나고 은혜가 되는 지 모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나 같은 죄인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 앞에 절대로 옳다함 받을 수 없는 존재인데 옳다고 여겨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한번 찍히면 영원히 찍히는데. 우리는 그렇게 잘못할 때가 많았는데 이제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을 없는 거로 해주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실력이 있어야지 인정을 받지 그렇게 되기를 믿는다고 해서 인정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옳게 여겨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부탁까지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군가 나를 필요할 때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가정에서 식구들끼리 서로를 필요로 할 때 느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학교에서 서로의 필요를 느낄 때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왕따를 당하면 비참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직장에서 서로를 필요로 할 때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에서 서로의 필요를 느낄 때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만약 교회에 나와서 예배만 드리고 돌아간다면 우리는 그렇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당신은 내가 꼭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 나라의 대통령이 장관들을 임명할 때 미리 부탁하는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당신이 교육부 장관을 맡아 주시면 좋겠소. 내가 부탁하니 꼭 들어주시면 좋겠소“. 그러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 나라에 제일 높으신 분이 부탁하니까 거절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물며 온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부탁을 하지 않으시고 복음을 전하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4절). 최근에 하나님의 부탁을 잘 수행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해리던맨입니다. 그는 복음 전도를 위한 불타는 사명과 열정을 지닌 평신도였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돈을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주기를 좋아했습니다. 그의 은사는 전도였고 그의 평생에 수천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여러 가지 많은 갈등과 싸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2절). 이외로 적잖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하면서 복음 아닌 것 때문에 시험이 드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 아닌 것 때문에 신경을 쓰거나 힘을 쏟게 되면 결국은 헛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복음 전할 부탁은 받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4절). 단순히 교회 부흥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거룩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서 인생의 죽음을 맞게 되면 지옥의 형벌이 얼마나 참혹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지옥에만큼은 보내서는 안된다는 무거운 중압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단순히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간교한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3절에 보면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4절에 보면 “어떤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꼬시거나 자기의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교회에 나오게 하기 전에는 잘 해주다가 일단 교회에 나오면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신자들 가운데 자기밖에 모른다는 인상 때문에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신자들이 사람을 만날 때에 어떤 이유를 가지고 만난다는 선입견이 불신자들에게 분명히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하도 이용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복음을 전하는 순간에도 그런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부탁을 받고 순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난 후에 누구에게든지 인정이나 영광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에게 영광을 구하고 취한다면 믿음이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을 가리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겠나”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몇 명의 영혼을 나에게 붙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혼을 만나 복음을 전했고 믿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어떤 부탁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학생들은 학교에 무엇 때문에 다니고 계십니다. 물론 공부하기 위해서 다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닙니다. 주부들은 가정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십니까? 물론 살림을 잘하기 위해서 주부의 역할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부는 가정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남편들은 직장에 무엇을 위해 다니십니까?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통한 보람을 얻기 위해서 다닙니다. 그러나 남편들은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회를 포착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때를 얻는지 못얻든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전공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우리의 부전공입니다. 혹시 우리는 전공 과목을 이수하지 못하신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 예람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복음 전할 부탁을 성실히 이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마치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해야 합니다(7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거칠어지기 쉽습니다. 비판하거나 정죄하기가 쉽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마귀의 자식인양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조차도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마치 아이를 기르는 유모와 같이 언제나 사랑 가운데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조차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해산의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에 자신을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창 32:3-28), 김덕선 목사 (0) | 2024.02.28 |
---|---|
하나님의 작정과 선택(엡 1:4, 11), 김덕선 목사 (1) | 2024.02.27 |
복음에 미친 사람(행 20:24), 김덕선 목사 (0) | 2024.02.25 |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창 1:27-31), 김덕선 목사 (0) | 2024.02.25 |
성령께 이끌리는 삶(엡 5:15-18), 김덕선 목사 (0) | 2024.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