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 심장병자의 얘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매우 부유하고 덕망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구상하며 부지런히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심장병이 찾아왔습니다. 가끔씩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심장발작은 언제나 그로 하여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했습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눈 앞에 캄캄해지며 더 이상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발견하곤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야고보서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시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 너희가 마땅히 말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요,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니라"(약 4:15).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순간 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일까요? 자기 사업? 아니면 처 자식? 그는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돈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가장 먼저 그의 머리에 스쳐지나 간 것은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때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죽으면 그 어떤 것도 이 죽음을 돌이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만다. 시간, 단 5분의 시간만이라도 있다면... 이대로 끝난다면..."
아마도 그때 그의 살아온 모든 날들이 떠올랐는지 모릅니다. 그 수많은 기회의 나날들... 그러나 이렇게 단 한 순간에 나의 인생은 끝나는구나... 은혜의 날들은 끝이 나고 이제 나의 앞에는 영원한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습니다. 그가 여느 사람같이 그 위기상황만을 모면하려 했다면 즉, 여전히 "내일"을 외치며 살았더라면 그가 기다리던 "내일"은 결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것은 환경도 아닙니다. 그것은 뒤로 미루고 연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실 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재앙이 내리는 순간마다 바로 왕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재앙은 개구리 재앙이었습니다. 이 개구리 역시 애굽인들의 Totem 종교의 대상이 되는 우상이었습니다. 애굽인에게 개구리는 무엇의 상징이었는가? 나일강에 수천마리씩 떼를 지어 사는 개구리들은 애굽의 고대신앙에서는 풍부와 다산(多産)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술객들도 자기들의 술법으로 동일한 이적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잠시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기는 했지만 역시 다시 강퍅해졌습니다. 바로는 일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기로 약속합니다. 모세는 개구리들을 언제까지 없애줄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때 바로 왕의 대답은 어떠했을까요? (10절) 지금 당장 없애달라고 하지 않고 내일 아침까지로 대답합니다. 아마, 바로는 혹시 오늘 밤 안으로 없어질 수도 있으려니 생각한 것같습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언제 개구리를 없애드리면 좋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은 내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했습니다. 누가 그 개구리를 없애는데 더 기다리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역시 바로 왕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좋은 줄 알면서도 그것을 미루고 좋아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있는 대로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죄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어려움, 의심, 무거운 짐, 고통, 슬픔, 두려움, 혼란, 절망, 비탄의 개구리들, 이것들 모두가 다 우리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까? 모든 이들에게 닥치는 슬픔과 어려움의 개구리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우리의 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죄 때문에 생겨나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개구리들을 제거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파라오와 같이, 우리들 대부분은 "내일 제거해 주십시오. 부디 하룻밤만 더 개구리와 함께 묵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라오는 "내일"이라고 말했으나, 성령님께서는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 노엽게 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히 3:7,8)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파라오는 "내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오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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