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아마도 많은 남자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 여성은 좋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 남자라는 말에는 인물이나 학벌이좋고 여자에게도 잘 해주고 돈도 많이 버는 남자라는 의미가 들어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소극적 행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 행복입니다. 소극적 행복은 그것이 없으면 고통스럽고 불행하지만 많이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구두가 없으면 많이 불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두가 많이 있다고 해서 그만큼 더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돈도 마찬가지이고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물질의 행복은 없으면 불편을 느끼지만 많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비해 적극적 행복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습니다. 즉 기쁨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습니다. 사람도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소중한 마음도 많을수록 더 좋습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줄 몰라 이 세상의 복만으로도 만족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의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풍 병이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합니다. 암은 초기에 발견해서 수술하고 치료를 받으면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풍 병은 초기에 발견하기도 어렵고 한번 뇌의 혈관이 터지면 죽든지 아니면 반신불수가 되기 쉽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집에 몰려들었습니다(1절). 이전에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것부터 시작하여 많은 환자를 고쳐주셨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더 많은 환자가 치료를 받으려고 예수님이 계신 집에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도”를 가르치셨습니다(2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상번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직 병 고치시는 것을 보기 위해 몰려 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병은 고치지 아니하고 “도”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더 전하려고 애를 쓰셨던 것입니다.
갑자기 한순간에 긴장을 깨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뚫고 한 중풍병자를 들것에 달아 내린 것이었습니;다. 아마 거기에 섰던 사람들은 갑자기 지붕이 뚫어지면사 한 사람이 박줄에 매여 내려오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사실인즉 그 중풍병자는 아주 병이 심해 스스로 일어날 수 없고 움직일수도 없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혼자는 올 수 없으니까 누군가가 이 환자를 들 것에 실어 네 사람이 들고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꽉 차 있어서 도저히 뚫고 들어간 것 것입니다. 이 환자의 생각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 앞으로 가기만 하면 치료받을 수 있을 텐데, 예수님께 가는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데리고 온 사람들은 하다 못해 집 지붕 위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지붕에 구멍을 내고 환자를 줄로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오게 된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온 것은 오직 중풍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람은 죄 용서받는 것은 전혀 기대조차 하지 않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5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이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가슴이 뜨거워진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이 사람의 병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선포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먼저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5절). 문제는 병 고치러 왔다고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지붕을 뜯은 것이 과연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행동은 참으로 무례한 것이며 이기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집 안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늦게 온 주제에 남의 지붕을 부수고 지붕을 타고 내려 왔습니다. 이것은 대담한 시도이고 용기 있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이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무례한 일이고 남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이기적 행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문제만 가장 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중심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많은 경우 심한 중풍 병은 잘 치료가 되지 않지만 그 당시는 더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이 병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메시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에 고칠 수 있는 병은 기도해도 도저히 희망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은 기도하면서도 의심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불치의 병을 고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메시야는 우리의 모든 고통과 질병을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금방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다음에"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음에 은혜받고, 다음에 고침받고, 다음에 성령받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믿음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절망을 이기고, 반대를 이기고 장애를 이기고 예수님께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체면을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나와 예수님 사이만 생각하고 어떤 방해나 반대나 어려움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을 고쳐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기대하지 않는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5절). 예를 들면 한 사람이 갑자기 중풍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교도관이 “아무 개 죄수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사람은 중 병에 걸린 채로 감옥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감옥에 있는 채로 중 병이 낫는 것이 더 나을까요? 아니면 중풍병에 걸린 채로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나을까요?
지금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에게 갑자기 죄사함을 받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의 죄를 직접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너무나 가르쳐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면 죄 사함의 선언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모든 죄로부터 사면을 받게 됩니다. 또한 죄 사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됩니다.
예수님이 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준다는 선언을 했을 때 당시에 서기관들은 “참람하도다” 고 반응을 합니다(6-7절). 왜냐하면 당시에 죄를 사함 받는 방법은 오직 성전에서 소나 양으로 제사 드리는 방법 밖에 없었고 그때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감히 다른 사람들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화를 내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에서 “어느 것이 더 쉽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역으로 어느 것이 더 어렵겠습니까? 서기관들에게는 둘 다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중풍병에 걸린 사람에게 “네 병이 나았으니까 일어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낫지 않았는데 어떻게 합니가? 더욱이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죄를 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과 “네 병이 나았느니라.”는 말은 사람들에게는 둘 다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유익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병 고침을 받는 것이 더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죄 용서 받는 것은 그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병 고침을 받는 것보다 죄 용서함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 용서함을 받아야 모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는 어느 것이 더 쉽겠습니까? 예수님에게는 병 고치는 것이 훨씬 더 쉬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어느 병이든지 다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 사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하고 다시 살아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께도 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증거로 즉시 말씀 한 마디로 그 병자의 몸을 께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10-12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절대로 사람들의 죄를 사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자리를 들고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사람의 죄를 사하신 것도 진짜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한평생 살면서 죄의 사실에 묶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없고 이 세상에서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복을 구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함 받고 의로운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죄 용서 받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해결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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