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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은혜

by liefd 2024.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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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은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가능하다.

내게 기독교는 생기가 없어 보였다. 신자가 되면 개성과 창의력, 탁월함과 열정을 잃은 것 같았다.

경제나 스포츠, 정치, 교육, 기타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런 시각은 본래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주신 삶과는 반대다.

그분은 우리에게 비범한 삶에 대한 갈망을 넣어 주셨다(1:26-28).

사실 하나님은 당신이 비범하게 살기를 바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도록 당신을 갖추어 주셨다.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자기 본연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어떤 대단한 일을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보다 더 사랑하실 수 없다.

거꾸로 우리가 무슨 나쁜 짓을 해도 그분은 우리를 덜 사랑하실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가는 다른 이야기다.

 

그러므로 여기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더 없이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고후 3:9).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도 없고 변질도 없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약해지거나 없어질 수가 없다.

그 근거가 당신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신실하신 성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의 값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무엇으로도 사실 수 없을 만큼 비싸다.

하나님은 비싼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사셨다(고전 6:20).

예수님은 자신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

놀라운 사실은 만약 당신과 나의 가치가 예수님의 가치보다 1원만 덜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근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선택들이다(고 후5:9).

이 최고의 목표를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면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풍성한 기쁨과 만족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된 동기는 그분을 향한 사랑이다.

우리가 그분을 사모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마음이 그 사랑으로 충만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큰 만족은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심을 알 때 온다.

그것을 알면 다른 무엇도 그 기쁨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주님되신 그리스도께 자신의 마음과 삶을 드리면 사탄의 법적 소유권이 무산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야 했던 심판 또한 완전히 충족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이유는 어느 날 그분이 우리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죄로 인한 영원한 심판은 예수님의 피로 없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자신의 수고에 대해 상이나 해를 받는 것이다(고전 3:11).

 

영원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우리가 십자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로 결정되지만, 영원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신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로 결정된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면 그분을 항상 기쁘시게 할 능력이 생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비범한 목표를 정해 두셨지만, 그 목표는 기도와 믿음과 부지런한 수고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 인생을 향한 그분의 뜻을 구하여 찾기를 원하신다(5:17) .

우리는 다 비범하고 독특한 길을 가도록 지음을 받았다.

 

인간은 누구나 세 가지 이미지가 있다. 투사 이미지, 지각 이미지, 실제 이미지다.

투사 이미지는 내가 바라기에 남들이 나를 이렇게 보았으면 하는 이미지다.

지각 이미지는 남들이 인식하는 이미지다.

지각 이미지는 실제의 내 모습이다.

 

인간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섬기에 되어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결국 사람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대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말을 거역하기가 힘들다.

특히 내가 그 사람의 사랑이나 우정을 원할 경우는 더욱 그렇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신의 투사 이미지 보다 실제 이미지, 하나님이 보시는 나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다른 사람이 비난하고 거부할 때도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었다(1:10).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그 이상이다.

그분께 합당한 영광, 존귀, 공경, 감사, 찬송, 높은 자리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

거룩한 두려움은 그분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가든 안가든 무조건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씀이 우리 내면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대해 추상적 지식만 남는다.

그나마 그것도 잠시 뿐이다. 그러나 믿음을 애써 의식하지 않게 되면 자신의 고백과 정반대가 되는 행동이 나온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다.

이 모두를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벧후1:3) .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 일에 주목할 때이지, 우리가 그분을 위해 주목할 때가 이니다.

하나님은 삶의 제반 상황이나 여건에서는 우리 각자를 똑같이 나누어 주시지만(므나 비유),

특별한 사명이나 소명의 영역에서는 사람마다 다르게 갖추어 주신다(달란트 비유).

 

은혜 안에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에 어울리는 모든 것을 기적적으로 받았습니다(벧후 1:3).

그 능력의 원천은 은혜이다.

구원받는 것도 은혜요, 구원의 혜택을 계속 누리는 것도 은혜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그 은혜로 구원이 유지된다.

 

회심한 후에 구약 율법의 규정과 계율과 요구를 지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은혜의 혜택을 잃게 된다.

하나님은 명령을 주실 때 반드시 명령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 우리의 은혜의 능력으로 그렇게 살 수 있다.

신약 성경에 가장 자주 쓰이는 은혜라는 단어는 카리스로, 대략 150번쯤 나온다.

카리스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호의다.

 

은헤는 죄 사함으로 그치지 않는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기도 하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는 길이다.

스트롱 그리스어 사전은 “은혜는 마음을 거쳐 삶으로 나타나는 신적 영향력”으로 정의한다.

전 더반은 은혜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 하나님 앞에 서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상의 일까지 하게 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았으니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12:28).

 

은혜는 진리를 행하게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능력으로 당신에게 그것을 주셨고, 그 능력은 다른 아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것은 제안이나 강한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그리고 그 명령은 은혜를 통해서만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다 그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6-17).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은혜가 만능 덮개인 줄 안다. 물론 은혜를 죄를 덮어주지만 아울러 은혜는 우리 마음에 미치는 하나님의 영향력이며, 그 능력은 우리의 삶으로 나타난다. 은혜가 우리가 진리 안에서 살아갈 능력을 준다.

율법 아래에서는 자신이 말한 대로 하겠다는 의도를 맹세로 표현했다. 인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아직 없고 인간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 조항을 만들었는데, 이 경우에는 진지한 약속과 말뿐인 약속을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왜 지금 이렇게 도덕적 실패가 많은가? 너희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죄인인 뿐이다. 용서받았을 뿐이다.”와 같이 에 어긋나는 메시지를 가르치고 전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의 성품에서 나오는 능력 안에서

승리할 수 없게 된다.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폐하며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7:13).

 

은혜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 온다.

은혜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와 천국의 약속뿐 아니라 그분의 능력도 포함된다는 것을 깨닫고

내 삶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우리가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12:28).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기되 받으실만하고 기쁘시게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값없는 선물이다.

 

은혜는 우리를 들어 비범한 삶으로 들어가게 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잇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 이상 우리에게 죄가 자리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들어섰고 예수님 자신의 본성을 지녔다.

 

그렇다면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그런 죄에 지배당하며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죄를 이길 능력이 있다. 예수님의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계속 죄짓고 용서받으라고 당신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게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은 당신이 정말 죄에서 해방되어 예수님처럼 참된 거룩함 가운데 행하게

하기 위해서다.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범한 삶을 살아갈 능력을 준다.

그러나 새로운 본성 가운데 행하지 않고 계속 죄에게 굴복한다면 우리는 다시 노예가 된다.

한 마디로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다(6:16-18).

 

신약의 회개는 구약의 회개와 다르다. 구약시대에는 자신의 진심을 보이려고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썼다.

역시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렇게 외형적으로 자신을 낮춘 것이다.

신약의 회개는 진리의 문제이며, 마음이나 생각의 온전한 변화를 가리킨다.

 

회개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했음을 깊이 뉘우치며, 이제 이 부분에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은혜는 절대로 받지 못할 것을 받는 것이고, 자비는 마땅히 받을 것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에게 살아갈 능력을 주고, 자비는 우리를 다시 죄의 손아귀 속으로 끌어들이려하는 죄책과 정죄와 수치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자비는 우리가 실패한 일, 회개한 죄에 대해 주어진다. 그러나 은헤는 우리를 돕고 능하게 하려고 주어진다.

 

은혜는 거룩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참된 거룩함 가운데 행하면 최고 수준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것은 건강한 삶이며 인생의 모든 영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은혜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거룩함이다.

우리가 특히 성적인 부분에서 거룩하게 살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음행, 간음, 동성애, 포르노, 기타 성적인 부정함에 노예가 되어 있는 경우,

그 속 마음을 들여다 보면 대개 더 깊은 문제가 있다. 교만, 반항심, 권력욕, 원한, 시기 기타 악일 수 있는데,

무엇이 됐든 항상 그 뿌리는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데 있다.

 

용서받고 천국에 간다는 불완전한 복음만 있고, 죄의 지배에서 해방된다는 온전한 복음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선물인 은헤는 우리에게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거룩함의 기본 특성은 하나님의 정결함을 공유하고 세속적 더러움을 삼가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 성별, 헌신하는 것이다.

 

거룩함은 분리와 정결함 이상이다. 거룩함은 초월적인 정결함과 분리다. 고결한 삶으로의 부름이다.

거룩함은 그분이 사는 것처럼 사는 것,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다.

참된 거룩함 가운데 행하면 최고 수준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것은 건강한 삶이며 인생의 모든 영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성화(거룩함)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성화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믈론 은혜에 협력하여 우리도 일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는 우리에게 자신을 께끗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우리가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12:28).

은혜는 우리를 의롭게 해줄 뿐만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있는 능력도 준다.

 

은혜는 믿음과 협력한다.

우리는 은혜의 능력으로 자신의 사고와 육신을 지배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정신 기능과 지각을 재훈련할 수 있다.

 

참된 거룩함 가운데 행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죄의 소욕을 의지적으로 반복해서 따르면 우리는 죄에 억매여 다시 죄의 종이 된다(8:12-13).

의의 말씀(5:13-14)은 목적과 사고와 행동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차원이다.

의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은혜로 구원받고 거듭났다고 고백은 하지만 삶속에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이루고자 그 은혜와 협력하지 않는 시대다.

은혜는 하나님 나라를 진척시킨다.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은혜의 능력으로 우리는 평범함을 초월하여 살 수 있다(고후 9:8).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면에 계실 것이라고 가르치셨다(14:17).

큰 은혜와 큰 권능이 연결되어 있다(4:33).

 

한 사람이 한 달에 두명 씩만 전도하면 전 세계가 복음을 듣는데 3년도 채 걸리지 않는다(19:9-10).

하나님의 나라를 진척시키기 위한 큰 은혜는 사도들에게만 아니라 평범한 교인들에게도 임했다(6:8).

예수님은 믿는 자들 곧 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을 주신다고 구체적으로 밝히셨다.

스데반도, 아나니아도 바로 그 능력 곧 은혜로 움직여 하나님 나라 진보를 위하여 큰 기적을 행했다.

은혜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아갈 능력과

우리 자신의 힘을 초월하는 능력이다(고후 12:9).

 

믿음으로 은혜에 접속하라

은혜의 선물은 믿음을 통해 얻는다(5:1-2).

믿음은 은혜의 송구관이다.

믿음의 파이프를 연결하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다.

믿음과 결부된 말씀만이 효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 우리 존재의 핵을 꿰뚫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의식적 사고나 지성이나 감정을 뚫고 지나가, 참믿음이 싹트는 곳인 우리 존재의 핵에 들어갈 수 있다.

 

참 믿음은 믿음대로 말할 뿐 아니라 그에 맞게 행동하여 결국 은혜의 능력을 드러낸다.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116:10). 믿음이 먼저이고 말은 그 증거로 따라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의 복은 내 힘으로 계명을 다 지켜야만 받을 수 있다고 잘못 믿고 있다.

 

은혜에 접속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믿으면 그 결과로 능력을 입는다.

육체로 살지 않고 은혜의 자리인 성령 안에 머물기로 선택하는 한 우리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 한 주일 동안은 삶이 변했다. 그러다 다시 이전의 삶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왜 경건하게 살 수 없었을까요? 답은 간단하다. 은혜로 능력을 입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개는 있었지만 은혜가 없었다. 믿음으로 내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한 죄의 본성이 여전히 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은혜 안에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라

정탐꾼 열 명은 거인들이 얼마나 큰 지를 보았고, 전투에 대한 전망의 근거를 인간의 힘에 두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적에 비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지를 보았고 판단의 근거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두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열 명은 교만했고, 단 두 명만 겸손했다(14:11: 1 7:5, 7). 하나님을 믿으려면 진정한 겸손이 필요하다. 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 믿는 자들 안에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1:18-20).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귀신들은 당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당신이 깨닫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예수께서 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14:12).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8).

우리는 믿음으로 담대히 행동하기 보다는 그냥 하나님께 별로 구하지 않는다. 실망을 좌초하지 않고 싶어서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생각과 말이 진리를 대신하도록 방치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

믿음의 송수관

죄사함

거룩한 삶

병 고침

필요를 채우는 자원

생명 안엑서 통치함

다른 부분들

 

믿음이 은혜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믿음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에서 그분을 가장 슬프시게 한 것이 무엇인가?

가장 기쁘시게 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사람들이 단순히 믿을 때 가장 기뻐하셨고,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으실 때 가장 슬퍼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반응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믿음에만 반응하신다.

 

바디매오를 하나님의 은혜에 접속시킨 것은 그의 믿음이었다.

수보니게아 여인은 처음에 요청은 필요에서 나왔지만 주님의 거절에 대한 반응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루어지리라고 기도하고 명할 때, 바로 그때가 우리가 믿는 때이고 구한 것을 받는 때이다.

우리의 신앙이 느낌이나 감정이나 지식적 정보에 이끌릴 때가 너무나 많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죽인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내려오지 않는다. 천국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60:1-5).

 

마음의 밭에 말씀의 씨를 뿌려라

우리 마음은 영적 전쟁터다. 마음의 화면에 무엇을 채우고 믿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난다.

리가 날마다 듣고 주의하는 말이 우리 마음의 화면에 그림을 그려낸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죄 사함 이상이다. 은혜는 우리에게 진리의 요구대로 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다.

바울은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그분께 순종할 마음도 주시고 그분을 기쁘시게 할 능력도 주시나니(2:13)

마귀는 믿음이 자기의 일을 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싫어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빼앗을까요? 마귀는 주로 실망스런 경험, 인간이 만든 기독교 전통, 인간의 논리, 우리가 고수하는 잘못된 신념 따위를 사용한다.

마귀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정상적으로 보이게 하고 자신의 지혜를 정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가장 많이 사용하며 사람들에게 잘먹히는 전략이다.

하나님이 기대를 저버리신다는 이유를 묻는 사람들은 결정적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문제를 더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믿지만 문제가 생기면 곧 자신의 얄팍한 믿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깊이 믿으면 고생을 참고 견디게 된다(8:15).

어둠의 세력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머리에 든 말씀이 아니라 마음에 심긴 말씀이다.

염려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당신 마음의 화폭에 그리다 못해 아예 영화로까지 상연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존재의 내면에 들여놓는 것이 핵심이다(고후 10:4-5).

 

믿음은 육신의 소욕을 이긴다.

히브리서 기자는 혼과 영이 만나는 부분을 마음이라 했다(4:12). 마음에는 혼과 영이 둘 다 포함된다.

혼은 우리의 가장 깊은 생각, 신념, 목족, 동기다.

영은 어떤 면에서 흔히들 말하는 직관과 잠재의식이다.

몸이 죽으면 영은 혼과 함께 떠나 영원한 집으로 간다.

 

영과 혼과 몸의 구원

인간의 영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새로워진다.

영은 순식간에 그분의 형상으로 변한다(요일 4:7).

혼의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그 과정이 시작된다.

혼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순종을 통해 구원 또는 변화를 받는다(1:19, 21, 22).

 

장차 우리가 입을 몸은 예수님의 몸과 다르지 않다(6:5, 고전1 5:53).

우리도 부활한 몸을 입으면 한 곳에서 사라져 불쑥 다른 곳에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영원함 본향인 새예루살렘은 넓이와 길이가 각각 2250킬로미터이다.

우리가 죽을 몸을 떠나면 우리의 존재 전체(영혼, )가 온전해진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22:4).

지구에는 중력이라는 자연법이 존재한다. 중력은 지구가 지표면이나 근처에 있는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물리적인 물체는 무엇이나 마찬가지며, 모든 인간은 이 법의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1700년대에 다니엘 베르누이가 발견한 다른 법이 있다. 바로 양력의 법이다.

비행기가 날 수 있는 능력이 이 법에서 나온다.

일정한 속도로 엔진에 충격을 가하면 비행기는 중력의 법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양력의 법이 당신을 중력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육신의 충동을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8:10-11)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영 안에 주시는 능력으로 육신을 물리친다.

우리 몸에 미치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힙입는다.

너희는 일상적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

성령께 반응하고 성령의 인도와 통제를 따르라

우리가 영의 일을 생각하면(영에게서 양분을 받으면) 성령께서 너희 죽을 몸에 생명을 주시리라.

우리가 성령의 감화로 영의 양분을 받으면 육신의 부정한 욕망에 데헤서는 자동적으롷 매력를 잃게 된다.

 

은혜의 삶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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