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

상처 많은 거라사 광인(마가복음 5:2-5),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5. 23.
반응형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친 사건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방 지역 거라사에서 일어난 치유사건은 다른 어떤 사건보다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은에 동시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의 중요성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내담자의 비밀보장을 위함이었는지 세 군데 모두 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아능력을 상실했던 거라사 광인

 

귀신들림에 대해 마귀의 전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현대인들이 과학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마귀의 존재나 귀신들림의 역사를 부인하게 하는 기만 전략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마귀의 능력에 대해서 과대평가하거나 귀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강박적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하게 되고 불안하게 하는 전략입니다.

 

전자는 일반 정신과 의사들과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태도입니다. 후자는 모든 현상을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일부 목회자들과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양극화 생각은 분명히 성경적인 세계관에 기초하지 않은 왜곡된 태도입니다.

 

거라사 광인은 정신분열증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지만 그것과는 독특하게 다른 증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를 단순하게 정신분열증 환자로 진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지식과 인간에게서 볼 수 없는 괴력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귀신들린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귀신들린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귀신들렸다가 축사를 통해 완전히 치료되는 경우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축사를 통해 완전히 치료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증상이 비슷한 경우에도 원인이 심리적인 혹은 두뇌의 생화학적인 변화에 있는가 아니면 영적인 존재의 개입에 있는 가에 따라 단순한 정신질환인지 아니면 귀신들린 사람인지를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임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자아능력이 있는 사람이 귀신에게 전인격적인 통제를 받는 경우는 드뭅니다. 거라사 광인은 귀신들이 그를 통제하기 번부터 자아능력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거나 정신질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신질환이 청년기에 겪은 어떤 외상후 트라우마로 발병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니면 역기능적인 부모와의 대상관계 속에서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촉발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대개 정신분열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심리치료사들은 아무래도 심리학적인 요인을 중요시 하는 반면에 정신과의사들은 생물학적 요인들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두 요인들은 서로 배타적이기 보다는 보완적으로 이해하고 치료할 때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군대"라는 귀신이 들렸습니다. 여기서 군대란 돼지 이천 마리를 호수에 수장시킬 정도로 수많은 악한 귀신들에게 오랫동안 전인격적인 지배를 받았습니다. 거라사 광인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왔을까요?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정신분열증적인 삶을 살게 하였을까요? 어떻게 하다가 귀신들린 삶으로까지 연결되었을까요?

 

그는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그의 가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를 치유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너의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을 통해서 적어도 그에게 가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족치료 분야의 선구자, 보웬은 1950년대에 정신분열증을 앓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뒤에는 건강하지 못한 가정과 부모가 있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거라사 광인은 어린 시절부터 성장했단 가정은 정서적인 억압과 혼란스럽고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 심한 열등감, 부모와의 심각한 갈등, 한쪽 부모의 과잉보호나 학대 등이 있는 가정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라사 광인이 언제부터 귀신들의 지배를 받았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당시에 그는 귀신들린 지 오래된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마을사람들도 그를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을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공동묘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림의 증상 외에도 환각현상, 망상 장애, 편집증, 사고장애, 정서적 마비, 사회적 철퇴, 특이한 행동의 반복과 같은 정신 분열증의 증상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고 타인들을 공감할 수 없으며 격리되어 자기 내면의 환성 속에서 살고 있었을 가능성입니다.

 

거라사 광인이 가진 증상들의 의미

 

왜?라는 질문보다는 "무엇"이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당시에 증상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상태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타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나체로 돌아다니는 이 청년의 행동은 가족들과 거라사 마을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둘째 ,거라사 광인을 통제하고 제어하기 위하여 그의 손과 발에 쇠사슬과 쇠고랑을 채워 여러 번 격리시켰지만 그는 곧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깨뜨리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이 증상은 가족들과 동네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끼게 하였을 것입니다.

 

셋째, 거라사 광인은 밤낮 무덤사이에서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과연 무슨 소리를 질렀을까요? 귀신들이 그의 혀와 뇌를 통제하여 그의 자아가 원치 않고 인식하지도 못하는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밤낮으로 고함지르는 행동에는 그 어떤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분노와 저주의 소리, 한이 맺힌 소리, 자신도 원치 않는 욕설 등을 허공을 향해 내뱉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정상적인 수면 사이클이 깨뜨려져 밤에도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팔레스타인의 추운 밤을 견뎌야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 없는 상태로 그는 고통스럽게 살고 있었습니다.

 

넷째, 거라사 광인은 소리 지리며 자신의 몸을 상해하는 자학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멍이 들고 상처난 모습 속에서도 계속 강박적이 충동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과는 더 이상 더불어 살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포기한 거라사 광인은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분열적이며 자폐적인 삶을 삽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조차 인식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

 

놀랍게도 가족과 세상이 포기했던 거라사 광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귀신들을 몰아내심으로 그는 전인적인 치료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통제할 수 없었던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벗은 몸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고 옷을 입는 그에게서는 이제는 현실능력을 회복한 정상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해방과 살롬, 회복과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도 다시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로 돌아갑니다. 더불어 그는 열 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데카폴리스 지방을 다니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최초의 현지인 선교사가 됩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그것도 온전하지 못하여 구제 불능에 있는 양을 찾아 나선 선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쁜 사역 가운데서도 밤새도록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이방 거라사 지역 공동모지에 살고 있는 한 버려진 소외된 인간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치유적인 사랑의 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라사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무덤 속에 살고 있는 귀신들린 사람을 찾아가신 예수님은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이에 대해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나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5:19)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