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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산상수훈 모음집

by liefd 2024.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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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심리학 전문지인 사이콜로지 투데이에서 "행복"에 관한 주제로 광범위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들이 이 설문 조사를 토대로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논문의 결과를 매우 간단했다고 한다. 그것은 행복과 삶의 조건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는 받는 사람들은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소원은 복권에,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원하는 돈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그들은 행복해졌을까요? 설문에 대답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조사에서 어디에서 사는가가 행복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쾌락도 행복과 무관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삶의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날 교회나 가정이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무엇인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방법이나 프로그램의 문제보다는 그것을 운영하고 지도하는 사람의 품성에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여건이 꼭 성공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지도력이나 환경의 문제보다는 그들의 품성 또는 성격의 결여 때문이다.

 

수년 전에 하버드 대학 출신 가운데 성공한 100명에게 성공의 요인이 능력과 학벌 때문인가 아니면 성숙한 인격 즉 품성인가?라는 설문에서 85%가 그 사람의 능력보다는 그들의 품성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스도인의 풍성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는 가난한 품성, 자기 죄를 회개하는 애통의 풍성, 자기를 정직하게 평가하는 온유한 품성, 자기중심이 아닌 이웃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긍휼함의 풍성, 복음을 이성이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과 청결한 품성, 그리고 분열과 싸움과 갈등을 하나가 되게 하는 화평하게 하는 품성, 그러나 핍박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천국을 보상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제까지 관심을 가지고 강조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에서 복과 천국이라는 부분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품성을 소유한 사람만이 복이 있다는 것을 무시했다. 그리스도인은 산상수훈의 원리대로 살때에만 세상은 교회에 끌린다. 산상 수훈은 우리에게 대안을 제시하며 선택을 촉구한다. 세상에 순응하지 말라. 너희는 다르다. 다르게 살아야 한다.

 

1. 그리스도인 모두가 주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소유한 사람만이 천국 시민이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바로 주님의 성품을 닮은 성품의 소유자이다 (벧후 1:4-7, 2:3).

2.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내야 한다.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여덟 가지 특성을 나타내야 한다.

3. 이 품성들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4. 이 품성들을 아주 이상적으로 배열해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또한 애통함이 없이는 심령이 가난하게 될 수 없고, 애통함이 없이는 심령이 깨끗할 수 없다. 그리고 온유하고 화평이 품성이 없이는 온유하고 화평한 행동이나 생활을 할 수가 없다.

5. 여덞 가지 품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4가지 품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나중 4가지 품성은 사람과의 관계이다.

 

산상수훈은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팔복으로 시작된다. 왜 팔복일까요? "복이 있나니"라는 표현이 여덟 번 나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바라보시고 인정해 주시고 기뻐해주시는 것을 말한다. 복있는 자의 삶의 모습이 바로 팔복에 잘 나타나 있다. 팔복은 산상수훈에서 서론의 역할을 한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산상수훈은 구약과 신약을 결합해 주는 역할을 한다. 산상수훈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5:1-2). 뿐만 아니라 당시의 무리들에게 또한 가르치셨다(7:28-29). 즉 산상수훈은 우리 모두를 위한 가르침이다.

 

산상수훈에서 복이 있다는 것은 좋은 환경이나 여건에 기초한 행복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자체로 복이 있다. 즉 가난, 나약함, 죽음에 종속되는 인간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 행복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16:22). 이것은 내적평안, 내적 지복, 내적 행복이다. 이러한 내적 기쁨은 환경이 주는 것이 아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인간을 그 존재의 바닥에서부터 감동시키는 성품을 말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만이 완전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벧후 1:4).

 

세상에 대항하라. 너희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옳은 것(이미, 평화, 사랑, 실제)을 찾지만 잘못된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장 의지해야 하는 곳은 그들이 통상 무시하는 교회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백성을 불러내는 것이고, 이 백성은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하며, 그분께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고, 이백성의 소명은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한 것, 즉 모든 견해와 행동이 거룩한 또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하시고 언약을 통해 그들을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셨을 때 바로 그 점을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18:2-4). 그들이 따라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주위 사람들의 기준이 아니었다.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예언한 바에 의하면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ㅇ으리로다" (23:9) 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주변의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되었다(106:35).

 

그들은 또한 모든 나라와 같이 그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하였다(삼상 8:5). 군주제를 요구한 것보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의 우상숭배였다. 그들은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과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고 말했다(20:32).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10:2). 에스겔을 통해서 너희는 애굽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20:7) 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이유는 똑같았다.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이방 사람의 규례를 행하였음이라. 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왕하 17:7, 8, 19, 참조, 5:7, 11:12).

 

신약 시대에도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시험받으신 직후, 구약 시대에 오랫동안 약속되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바야흐로 시작된다는 좋은 소식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고 외치셨다. 실로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마'4:23).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회개와 의를 묘사한다.

 

예수님은 제자들,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아야 했으며, 그래서 하늘 아버지의 진정한 자녀임을 입증해야 했다.

산상수훈의 핵심 본문은 그들을 본받지 말라는 마 6:8에 있다. 그것은 원래 전 이스라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곧 바로 연상시키신다. 너희는 ...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18:3). 다르게 되라는 것이다.

 

그들의 성품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달라야 했다(팔복). 그들의 의는 윤리적 행동에서나 종교적 헌신에서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했으며, 그들의 사랑은 이교들의 사랑보다 더 크고 그들의 야망은 이교도들의 야망보다 더 고상해야 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이방인이나 이교들과 대조시킨다. 이교도들은 서로 사랑하고 인사를 나누지만,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5:44-47). 이방인들은 중언부언 대충 기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로서 겸손하고 사려깊게 기도해야 한다(6:7-13). 이교도들은 자신의 물질적 필요에 몰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6:32-33).

 

또 어떤 때는 제자들을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교들, 이교도들이 아닌 종교적인 사람들, 그 가운데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대조시킨다. 분명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을 서기관들의 윤리적 궤변과 대조시키고(5:21-48), 그리스도의 헌신을 바리새인의 위선적 경건과 대조시킨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신 목적이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그를 따라온 수많은 무리(4:25)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 몇 달간 갈릴리 전역을 두루 돌아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그 결과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침을 받기 위해 병자들을 데려왔다(4:23-24).

그래서 그는 거기에서 벗어나셔야 했다. 조용히 기도의 기회를 확보하고, 또한 제자들을 보다 집중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팔복은 복을 받는 조건이나 또는 자격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앞에 나오는 마태복음 4장을 봐야 한다. 사망과 흑암에 앉아있던 자들에게 빛이 비친 것이지, 그들이 찾아간 것은 아니다.

 

일반종교는 자기가 믿는 신에게 어떻게 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느냐 하는 문제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자격과 조건을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찾아오는 종교이지 우리가 어떤 조건과 자격을 가져야 되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 거룩함은 신앙의 순종에 대한 문제이지 자격의 문제가 아니다.

 

산상수훈

1. 그리스도인의 성품(5:3-12)

팔복은 특히 하나님 및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성품과 행동의 8가지 특징과 이러한 특징들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강조한다.

 

2. 그리스도인의 영향(5:13-16)

 

소금과 빛의 두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이 팔복에 묘사된 그들의 독특한 특성을 유지한다면 공동체 안에서 발휘하게 될 선한 영향력을 나타낸다.

 

3. 그리스도인의 의(5:17-48)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크다고 일컬음을 받으려면 도덕적 가르침을 따라야 하며, 심지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조차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큰 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5:17-20).

 

그리고 나서 더 위대한 기독교적 의에 관한 여섯 가지 실례를 드셨다(5:21-48). 그것은 살인, 감음, 이혼, 맹세, 보복, 사랑과 관련된 것이다. 이 주제들에 대한 대조(...하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안이한 전통을 거부하셨고, 구약 성경의 권위를 재차 단언하셨으며, 하나님의 도덕법이 지닌 완전하고 정확한 함축들을 끌어 내셨다.

 

4. 그리스도인의 경건(6:1-18)

 

그리스도인의 경건 혹은 종교적 헌신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과시나 이교도들의 기계적 형식주위를 닮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무엇보다 진실성,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서 사는 자녀의 성실함을 지녀야 한다.

 

5. 그리스도인의 야망

 

우리의 경건 뿐 아니라 야망도 비그리스도인과 달라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재물과 소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킨다. 하나님과 돈을 둘 다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물질적 염려들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대신 하나님의 통치와 의를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즉 우리의 최고의 야망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영광이나 심지어 우리 자신의 물질적 안녕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먼저 구하는가의 문제이다.

 

6. 그리스도인의 관계(7:1-20)

 

그리스도인들은 복잡한 관계망 속에 얽혀 있다. 각 관계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에서 생겨난다. 일단 우리가 적절한 관계를 맺으면, 다른 모든 관계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 새로운 관계들이 맺어지고, 옛 관계들이 변화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을 비판하지 말고 그들을 섬겨야 한다(1-5). 단호하게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그 복음을 다시 전하려고 하지 말고(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계속 기도해야 하고(7-12), 사람들이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해야 한다(13-20).

 

7. 그리스도인의 순종(7:21-27)

 

산상수훈 전체에 드러난 궁극적인 문제는 권위에 관한 문제이다. 근본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내가 하는 말이 진심인가? 그리고 내가 듣는 것을 행하는가 하는 것사람이다. 이러한 순종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다. 오직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오직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집을 반석 위에 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집은 환경의 폭풍우나 심판의 폭풍우가 와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산상수훈의 의는 모든 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전혀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을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인간의 죄의 실상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 기준은 충분히 도달 가능하다. 하지만 중생 곧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말하신 그것을 경험한 자들만 도달할 수 있다.

 

그분이 산상 수훈에서 말씀하신 의는 내적인 의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디에 마음을 고정시키는가 하는 것이다(5:28, 6:21).

 

1.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성품(5: 3-12), 팔복

 

팔복은 그리스도인들의 균형 잡힌 다양한 성품을 제시한다. 팔복은 여덞 개의 서로 다른 제자 집단이 아니라 같은 집단에 속한 8개의 자질들로, 그 집단 사람들은 온유하고 동시에 긍휼이 많으며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애통하고 주리며 화평케 하는 자이고 박해를 받는 자다.

 

이러한 특징들을 보여 주는 집단은 보통의 그리스도인들과는 거리가 먼 소수의 영적 귀족들이 아니다. 이 모든 자질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함과 굶주림은 영적 상태다. 그가 복되다고 선포하시는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가난한 자는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둔 경건한 사람들이다.

 

복이 있다는 단어는 사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변치 않는 행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여덟 가지 성품을 말씀하시면서 이것들을 가진 모든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팔복은 예수께서 하신 가장 중요한 설교의 첫 머리에 위치해 있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원리들을 제시해 줍니다.

이 원리들은 그 나라 백성 모두의 행동을 주관해야 하는 도덕적, 윤리적, 영적 지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성품들을 가리켜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들이 참된 행복으로 가는 유일함 길이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담긴 진리가 그 당시 청중들의 마음에 충격을 준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즈음 사람들은 복음을 접하는 첫 순간에 행복을 맛보지만 그리스도의 계명을 진심으로 순종하는데서 오는 깊고 지속적인 기쁨은 맛보지 못하는 손쉬운 믿음(easy believism) 가운데서 살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손쉬운 믿음이 가진 잠재적인 문제점을 알고 계셨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서신서는 참된 신자의 삶을 편안하고 자기의 원대로 사는 것으로 절대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자에게는 순종의 삶이 요구된다. 성찬을 행하는 것은 거룩한 순종의 행위입니다. “이를 행하여 나를 가념하라”(22:19).

 

팔복은 완전한 자기 점검을 요구한다. 바울은 고후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성경은 참된 구원의 증거를 과거에 찾고 있지 않고 언제나 현재 삶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시험하라는 것은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현재진행형으로 계속해서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점검하라)는 뜻이다.

 

신자는 삶의 새로운 기준이 있다. 마태복음 520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디모데후서 2:19은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말씀한다. 그러면 누가 주님의 백성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불법에서 떠난 자들이다. 디도서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말씀한다. 순종이 없고, 의가 없고, 거룩이 없고, 불법에서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있다. 우리는 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나타날 때 우리는 죄를 미워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우리는 순종을 구할 것이다. 구원의 성경적 기준은 바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은 마음 깊은 곳의 숨겨진 것을 내어 놓고, 자신의 죄를 애통해 하며 다른 무엇보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여러분은 참된 그리스도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천국에 들어갈 뿐 아니라 여러분의 현재 증거도 팔복의 덕목들과 일치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천국자녀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순종이라고 하셨다. 우리를 하나님의 법을 갈망한다(5:17-19). 사실 마음이 평안하냐 불안하냐는 순종에 달려있다. 불순종할 때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린다.

 

당신이 정말 회심했다면 당신은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다른 마음을 가질 것이다. 에스겔3 6:26은 사람이 구원받으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굳은 마음, 완악한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천국자녀라면 바른 말을 할 것이라고 하셨다(5:33).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나타낸다. 순종은 여러분이 바르게 생각하고 있으며, 여러분이 입을 열 때 바른 말이 나온다. 이럴 경우 여러분의 행동은 바른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바른 생각, 바른 순종, 바른 말, 바른 행위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8:31).

천국자녀는 또한 바른 예배, 바른 섬김을 드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6:1-18). 참된 그리스도인은 또한 재물 및 세상과도 바른 관계를 가집니다(6:19, 6:25-34). 참된 천국자녀는 사람들과도 바른 관계를 가질 것이다(7).

 

누구에게나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깨닫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마태복음 5:3절로 돌아가 마음을 찢고 애통하며 의에 주린 심정으로 갈망하는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넓은 문입니다. 당신의 모든 공로, 자기 의, 고집, 예수님과 세상 양쪽 더 가지려는 양다리 걸치기 수법 등.

 

예수님이 제시하는 행복은 여러분이 기대하는 정확하게 그런 행복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팔복의 모든 것이 모순처럼 보인다.

팔복에 약속된 축복, ‘마카리오스를 행복한 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를 일으킨다. 행복은 주관적인 상태인 반면, 예수님은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느낄지(행복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며 그 때문에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선포하신다. 그들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 복은 무엇인가?

 

그들은 하늘 나라를 소유하고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애통하는 자들은 위로받고, 굶주린 자들은 배부르게 된다. 그들은 긍휼을 얻고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그들이 받을 하늘의 상은 크다.

여덟 가지 특질들이 합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갖는 책임을 구성하며, 8가지 복은 그 시민의 특권을 행사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누린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이 복은 현재 받는 것인가? 미래에 받게 되는 것인가? 둘 다이다. 첫 번째 복과 여덟 번째 복은 현재시제로 되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3, 10). 다른 여섯 개의 복은 단순 미래로 된 동사를 포함한다. “할 것임이요”.

 

예수님의 나머지 가르침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지금 받거나, 유업으로 받거나,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긍휼히 여김을 받거나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이생에서 우리의 굶주림이 채워질 수 있고, 우리의 목마름이 해소될 수 있다.

미래 시제는 단순히 미래성이 아니라 확실성도 강조한다. 예를 들면 애통하는 자는 참으로 위로를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산상수훈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에 대해 말씀하지 않고 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고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행할 수 없는 행위와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팔복은 하나님께서 그런 성품이 되도록 그 안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사람들에게 공로에 대한 상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복들을 제시한다.

 

팔복을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겸손한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로 드러나도록 깊이 슬퍼하는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는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복의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긍휼을 실천하는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복의 정의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로 인해 너희를 비난하고, 박해하고, 중상할 때 너희에게 기쁨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나님 안에 있는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같은 방법으로 박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팔복의 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희망에 찬, 기뻐하는 뜻을 가진 헬라어 마카리오이에서 유래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참여하는 기쁨을 뜻한다.

구약 성경에서 이 말은 보통 극심한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미래의 위로를 약속한다.

3절과 10절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다른 팔복의 내용들은 또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팔복과 관련된 세 가지 요점을 요약하면,

 

첫째, 여기 묘사된 사람들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이다.

 

둘째 여기서 권하는 자질들은 영적인 자질들이다.

 

셋째 여기 약속된 축복은 하나님의 통치라는 영광스럽고 포괄적인 축복이다.

 

팔복의 가장 단순한 구분은 처음 4 개를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그리고,

 

다른 4 개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계와 의무를 묘사하는 구분일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3)

아무 것도 아닌 자가 행복하다.

마이어는 심령이 가난한 품성을 천국 문을 여는 첫째 열쇠라고 했다. 행복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간절히 갈망하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처히 깨닫는 겸손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겸손한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가난하고 겸손해지는 것이 우리를 고결하게 만들어서 마침내 우리가 고결한 사람들을 위한 상을 받게 되는 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며, 가난하고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일까요? 물론 후자이다.

 

팔복은 제자들의 완전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 안에서 경험된,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헤에 기초한 것이다(13:31, 17:20, 4:31, 13:19, 4:8).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사야 611절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이다.

히브리어 아나웜은 가난한 자, 부유하고 권세있는 자들로부터 압제 당하는 자, 힘없는 자, 겸손한 자, 천한 자, 경건한 자를 뜻한다.

 

유대교에서 가난한 자란 절망적인 필요 가운데 있는 이들을 말한다, 마태가 말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종교적 상황에서 모욕과 거절로 고난을 당하면서 빈손으로 자신들의 희망과 구원이신 하나님 밖에 섬길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자들이다.

 

수많은 구약 성경의 본문들은 하나님이 가난한 다들을 깊이 염려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22:25-27, 23:10-11, 19:9-10, 삼하 22:28, 26:6, 3:12).

겸손해지는 것은 내가 얼마나 낮은 자인가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66:2).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심으로, 이사야 61:1-2을 성취하신다(4:16-21, 7;22, 5:3 이하, 11:5). 팔복이 전하는 복음은 가난한 자, 압제 당하는 자, 겸손한 자, 궁핍한 자, 약한 자, 낮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메시야이신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의 공동체적 실천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가난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물질적으로 궁핍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궁핍한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는 피난처가 없기 때문에(3:12), 가난함은 영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으며,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과 동일시되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궁핍함에 처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 곤고한 자라고 말한다. 구약에서 가난한 자는 괴롭힘을 당하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사람이다.

 

가난한 자는 또한 심령에 통회하며 떠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시며 그들과 함께 거하기를 기뻐하신다(57:15, 66:1-2). 그런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이다(61:1, 4:18, 11:5). 시편 34: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51:17은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세상은 자기를 주장하라, 자기를 자랑하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네가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할 때, 저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그 때 일하십니다.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에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자긍심이 너무 강해서 이것이 그의 믿음을 가로막았다고 말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3:17). 이 교회는 사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때에 부족한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가?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가난함, 실로 영적 파산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칼빈이 말했듯이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낮아지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절망적 상황에 대립해서 하나님 나라의 희망적 자신이 주어진 것으로 여긴다.

 

자신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젖 뗀 상태에 있다.

 

내 중심이 젖뗀 아이와 같도다(131:2). 포도 가지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가까이에 있는 아무 것이나 휘어 감는다.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둘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긴다.

 

그는 늘 영적인 결핍과 기근을 느끼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것을 해결한다.

 

셋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늘 갈급해 한다.

 

넷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한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한다. 빈 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 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갈보리 십자가 앞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게 되어 있다.

세리와 같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8:13).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오직 자기에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자만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사람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신 다음 성령의 은혜로 채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보통 쓰시는 방법이다.

천국은 누구의 것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이것은 현재형 동사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미래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영광이다. 은혜는 현재이며, 영광은 나중이다. 우리는 지금 그 나라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 속에서 다스리고 계신다. 그가 우리를 돌보신다. 그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신다. 그는 우리 마음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결과이다.

 

애통하는 자 (4)

 

사는 것이 힘들어서 애통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없어서, 억울한 소리를 들어서 애통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슬퍼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진정한 회개의 슬픔을 생각하셨다. 애통하는 것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 사람들은 애통하고 불행한 것을 피하기 위하여 쾌락과 돈과 즐거움으로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이 두 번째 복은 불행한 사람은 행복하나니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결백함, , 그들의 자존심을 잃어버려서 애통하는 사람이다. 사별의 슬픔이 아니라 회개의 슬픔이다.

여기서 애통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영적으로 파산된 상태임을 알고 애통하는 것을 말한다. 애통하는 사람은 신중한 사람이다. 삶을 심각하게 보는 사람이다. 삶을 영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계속해서 활기차고 기운 찬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산상수훈에 보면 화있을 찐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6:26).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보고, 심판과 죽음이라는 냉혹한 결과를 보며, 그리고 자신을 영접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성을 보며 우셨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니이다(119;136). 에스겔은 하나님이 신실한 사람들을 일컬어 예루살렘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여 우는 자라고 말씀하셨다(9:4).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녀 내라고 탄식하였다(7:24). 죄에 빠져 있는 고린도 교회에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않는가라고 기록하였다(고전 5:2, 고후 12:21).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3:18). 바울은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울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도 애통해야 한다(119:136).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였다(10:1). 우리는 또한 교회의 상처에 대해서도 애통해야 한다(137:1).

 

자신의 죄성에 대해 통곡하며 애통하는 자들은 그들의 비탄을 경감시켜 줄 유일한 위로, 곧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것이다. 모든 위로 가운데 가장 큰 위로는 죄를 뉘우치며 애통하는 모든 죄인에게 선포되는 죄의 사면이다. 죄에 대한 자각이 먼저 선행되고 그 후에 회심이 따라야 한다. 구원은 회개를 통해서 온다. 회개는 애통을 통해 온다.

 

애통한다는 동사는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낸다. 계속해서 애통하는 자는 계속해서 위로를 받는다. 어떻게 하면 애통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죄를 깨닫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는 것들, 성령을 거역하게 하는 것들, 우리를 무감각하게 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첫째, 절망이 주는 애통을 제거해야 한다. 유다의 애통이 여기에 속한다(27:3).

 

둘째, 위선적인 애통을 제거해야 한다.

 

사울 왕은 사무엘 신지자에게 범죄한 것에 대해 슬퍼하고 회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삼상 10:12, 삼상 15:24).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영예를 돌렸다(삼상 15:30). 그는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했다고 핑계를 대었다(삼상 15:24).

 

셋째, 억지로 하는 애통을 제거해야 한다.

 

가인이 애통이 그러한 것이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4:13). 그의 벌이 그의 죄보다 그를 더 괴롭혔다.

 

넷째, 외식적인 애통을 제거해야 한다.

 

아합의 애통이 그러한 것이다. 그 옷을 찢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왕상 21:27). 그의 옷은 찢어졌으나 그의 마음은 찢어지지 않았다. 그는 베옷을 입었으니 슬픔을 옷을 입지 않았다.

 

다섯째, 헛된 열매 없는 애통을 제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약간의 눈물을 흘리지만 여전히 속이고 더럽다. 이들은 울면서도 하나님을 모독한다.

 

그것은 우리가 고통보다 죄 때문에 더 애통하는 것을 말한다. 다윗은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부르짖었다(51:3).

참된 회개자는 죄의 부끄러운 결과만 가지고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지긋지긋한 죄의 본성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거기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20:43).

 

우리의 눈물은 우리를 더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애통할 뿐 아니라 또한 돌아서야 한다.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2:12). “그가 슬퍼하였던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 사람이 그가 범하였던 죄에 대해서 진실로 슬퍼하는 사람이다”(어거스틴).

 

우리는 죄를 금해야 할 뿐 아니라 죄를 소름이 끼칠만큼 싫어해야 한다. 얼마나 분하게 하며(고후 7:11). 참된 애통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하고 죄를 미워함으로 끝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더럽혔다면 꼭 용서를 빌어야 한다. 우리가 남의 재산을 부당하게 취급하여 손해를 입혔으면 최선을 다하여 갚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마음이 내킬 때까지 죄에 대한 우리의 애통을 미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애통을 서둘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애통해야 한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2:18). 우리의 영혼을 매일 회개의 소금물에 씻는 것은 병의 재발을 막거나 치료하는 최선의 길이다.

 

이러한 장애물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방법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을 성경에 나타난 죄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다(38:17-18).

 

또한 통회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가 애통하는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간단하다. 죄에 대해 민감한가?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죄에 대해서도 애통하게 된다(13:17)

 

우리가 애통하는 자인지 알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의식하고 있는지 보는 것이다.

 

우리 삶에 기쁨이 있는가? 우리가 용서받고, 깨끗한 삶에서 오는 참된 평안, 참된 행복, 참된 위로를 알고 있는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죄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하고 애통하는 사람이다. 이사야53:4절에 보면 주님도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도 심한 통곡을 하셨다(5:7).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우셨을까요? 성경에는 예수께서 세 번 우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류의 죄 때문에 피땀을 흘리시며 통곡하셨다.

 

우리 역시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슬퍼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애통해야 한다. 예수님은 로마군에 의해 멸망당할 예루살렘과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시고 우셨다(23:37).

 

애통하는 자가 받을 보상이 있다. 애통함에는 회개로 인한 소망이 있다. 진정한 위로는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 안에 있다. 우리가 기도 시간에 애통할 때, 나의 영적 파산을 바라보고 애통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기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것은 이들만이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구약 선지자들에 따르면, 위로는 메시야의 직무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그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칠 위로자가 될 것이다(61:1, 40:1). 시므온과 같은 경건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고대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위로는 영광의 최종 단계에서 완성된다. 오직 그때가 되어야만 죄는 더 이상 없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7:17)

 

온유한 자(5)

 

자신의 뜻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는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 열성당원들은 군사적인 메시야를 원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기적을 행하는 메시야를 원했다. 사두개인들은 물질적인 메시야를 원했다. 에세네파는 금욕주의적인 메시야를 원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온유한 메시야를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헬라어 형용사인 온유한(프라우스)는 점잖은, 겸손한, 사려 깊은, 예의바른, 또한 이러한 자질들에 필수불가결한 절제를 행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두 가지 온유함이 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온유와 사람을 향한 온유가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말한다(1:21). 온유는 사람에 대해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온유는 급한 마음과 반대된다(7;9). 온유는 악의와 반대가 된다(요일3:15). 온유는 보복과 반대된다(12:19). 온유는 악한 말과 반대가 된다.

 

온유한 사람은 또한 인내심 있고, 순종적인 사람입니다. 온유는 예수님의 성품이이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meek, 온유하여) 나귀 곧 멍에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온유함은 연약함이 아닙니다. 제어된 힘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우고, 낮추며, 마음을 찢는데서 오는 부산물이다.

 

온유함은 무기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온유함이다(16:32).

온유한 자는 자신의 소유가 약탈당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더 나은 영구한 산업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10:34). 그는 결코 자신의 상처나 손실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원한을 품지 않는다.

 

온유한 자는 결코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다.

온유함은 비겁함도 아니며 자신감의 결여도 아니다. 온유함은 인간적인 천질함도 아니라 온유함은 이렇게 말한다. “나 스스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베드로전서 2:23은 예수께서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특하시며.”이것이 온유함이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다. 오직 하나님만을 변호하셨다. 자신이 죄임임을 깨달을 때 ,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게 된다(12:10).

 

로이드 존스 박사가 온유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를 나타낸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솔직해져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말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지 모른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온유함은 본질적으로 자신에 대한 참된 견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태도와 행동으로 표현된다....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줄 수 있고 그렇게 잘 대해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다.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마다 온순하고 겸손하고 민감하고 인내심 있게 만들어 준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에 기초한 지속적이며 참된 기쁨이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우리는 그 반대라고 예상한다. 우리는 온유한 사람들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함부로 다루고 발로 짓밟기 때문이다.

 

온유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1:21). 온유함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벧전 3:4).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전하는 데에도 온유함이 필요하다(1:21, 벧전 3:15).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모함하는 아픔 속에서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깨닫는다(8:28). 다윗이 압살롬에게 좇겨 피난할 때 시므이는 감람산에서 다윗을 저주했다. 그때 아비새가 시므이를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으니, 저주하도록 내버려두라고 말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설사 그가 아무 것도 없는 자라 해도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후 6:10).

구약시대에 악인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 거룩하고 겸손한 사람들은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시편 37편에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37:1, 11, 22. 34).

 

온유한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에게 재산과 권리를 빼앗길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다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땅을 누리고 심지어 소유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롭게 되는 날에 그들이 유업으로 받을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이다(19:28, 벧후 3:13, 21:1).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게 된다(37:11). 온유한 자는 풍부한 화평 때문에 이 땅에서 소유한 것이 많든 적든 강에 그것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 마음으로 만족하게 된다. 온유한 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한 권리를 누리게 된다. 온유한 자가 천국을 누릴 자격을 갖추고 있다.

 

크리소스톰은 온유한 자가 땅만 기업으로 받는다면 어떻게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온유한 자는 땅을 잠시동안 머무는 집읋 소유하지만 천국은 그들이 영구히 머물 집으로 소유하게 된다.

어떻게 온유함을 가질 수 있는가? 먼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바라보라. 또한 하나님께 당신의 심령을 온유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벧전5:10).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6)

 

의에 주리지 않고 목말라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외로 많다. 그들은 결코 어떤 공허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의로 가득차 있다(10:3). 라오디게아 교회는 배가 불러서 그리스도의 황금도 안약도 받아들일 위가 없었다(3:17). 의에 목말라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대용품으로 채우려고 한다. 음식이나 오락이나 다른 쾌락을 더 좋아한다면 그들은 의에 거의 주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사람이 실천보다 논쟁을 더 좋아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주리지 않고 있다는 표시다.

 

성경은 불의한 것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을 책망하고 있다.

 

첫째, 성경은 다른 사람의 땅과 소유물을 갈망하는 자를 책망한다(5:12, 삼상 12:3, 33:1, 왕상 21:19, 17:11).

둘째, 성경은 보복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을 꾸짖는다.

셋째, 성경은 정욕을 만족시키기는 데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책망한다(4:19, 삼하1 3).

 

마리아의 찬가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주린 자를 연관시키며, 둘 다 복되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다고 했다. 선한 욕망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가장 좋은 증거이다.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다. 그런 영적 굶주림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닌 특징이다.

 

성경에서 의(dikaiosuna)는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법적, 도덕적, 사회적 측면이다.

첫째, 법적 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썼으며,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다(9:30-10:4). 바울은 율법 그 자체에 충성하므로 하나님의 진정한 의를 역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올바른 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바울은 훗날 고백하기를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고, 그리스도 자신이 되시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9:30-10:4).

 

둘째, 도덕적 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품과 행동의 의다.

 

예수님은 팔복에 이어서 그리스도의 의를 바리새인들의 의와 대조시킨다(20). 후자는 규칙들에 외적으로 복종하는 것이고, 전자는 마음과 뜻과 동기의 내적 의다. 우리는 이것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셋째, 성경적 의는 사회적 의도 포함한다.

 

사람들이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구하는 것과 함께 시민의 평등권, 법정의 정의, 사업상 거래의 정직함, 가정과 가족 간의 존중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위해 인간 공동체 전체에서 의에 주리는 일에 헌신한다.

 

성역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두 가지를 가리킨다. 구원과 성화가 그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보고, 자신의 거역을 보며,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는 마음을 찢고, 애통하고, 온유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간절히 바란다. 그는 용서를 원하며, 따라서 구원을 통해서 오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다. 이사야는 거듭 의를 구원과 동등시한다(45:8, 46:12-13, 51:5, 56:1, 61:10).

 

또한 우리는 성화, 즉 거룩의 증가에 주리고 목말라 있다. 그리스도를 점점 더 많이 닮으려고 하는 주림이 있다. 난 이미 이르렀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3:13-14).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순종해야 한다. 계속해서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처음 네 복은 영적 진전으로 나아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전적으로 영적파산 상태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 원인인 우리의 죄들에 대해, 곧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부패함에 대해, 그리고 죄와 사망이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도 애통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온유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겸손하고 온순하며, 우리의 영적 가난함에 따라 하나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넷째로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애통해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인정한다 해도, 그것을 그냥 놔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죄에 대한 고백은 반드시 의에 대한 주림으로 이끌려야 한다.

 

팔복 후반부, 마지막 4개의 복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내가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자신이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에 늘 가슴 아파하십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의 징후이다. 외적인 것이 당신을 만족시킵니까? 의에 대한 주림은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 질 수 없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맛있어서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15:16).

하나님의 것들이 당신의 입에 달게 느껴집니까? 잠언 27:7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당신의 주림과 목마름은 무조건적입니까? 예수께 와서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싶어했지만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젊은 부자 관원을 기억하십니까? 그의 주림은 조건적이었고, 그 주림은 채워지지 않았다.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하므로 내 마음이 상하니이다”(26: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은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리오니”(26:9).

너희 목마른 자들이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

 

주리고 목마름 같이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영의 양식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심각하게 사모해야 한다. 어떤 사랑의 대상을 애타게 갈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경험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는 고백으로 승회되어야 한다(42:1).

주리고 목마르게 사모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자기 신뢰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린 영혼을 어떻게 채우시는가?

첫째, 하나님은 은혜로 주린 영혼을 채우신다.

 

은혜가 우리의 영혼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은혜로 채워주신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다(7:55).

 

둘째, 하나님은 평안으로 주린 영혼을 채우신다.

 

"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15:13).

 

셋째, 하나님은 최고의 복으로 주린 영혼을 채우신다.

 

영광이 바로 채워주시는 복이다. 그리스도인이 죽음의 잠에서 깰 때에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스러운 빛이 그의 위에 비취므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17:15)..

 

성경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주린 자들에 대한 약속들을 말한다. 배부르다는 것은 동물에게 먹이를 잔뜩 주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완전히 만족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107:9).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1:53).

 

다윗은 또한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34:10)고 노래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1), 내 잔이 넘치 나이다(23;5). 예레미야 31:14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요한복음 4:14에서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네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의에 주린 자는 만족으로 배부르게 된다. “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먼족케 하리라(31:14).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63:5). 하나님은 먼저 영혼의 갈망을 여시고 그 다음에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81:10).

 

팔복에 포함된 모든 자질들과 마찬가지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영속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7:16-17).

 

의를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자에게 하나님은 영적 욕구를 충만히 채워 주신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만족이요 행복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7)

예수님이 설교하셨을 당시의 고대사회는 긍휼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던 시대입니다. 유대인들은 교만했고, 이기적이었으며, 독선적이었고, 비난하길 좋아했습니다. 헬라인과 로마인들은 자비와 긍휼을 나약함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정의와 용기를 칭송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잘 아는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노예를 살아있는 연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삶에서 어떻게 긍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긍휼은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에베소서 2:4-9ㅈ절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긍휼의 품성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덕입니다. 긍휼이란 공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 입장에서 상대방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상대방의 마음으로 생각하며 상대방의 느낌으로 느끼게 하는 감정입니다. 긍휼이란 처지를 바꾸어 놓고 이해해 보려는 마음입니다. 결국 긍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태도의 표현입니다. 긍휼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불쌍한 생각과 고통을 제거하려는 의욕이 합쳐진 것을 의미합니다.

 

긍휼은 궁핍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긍휼(엘레오스)은 언제나 우리가 고통, 불행함, 비탄함 등 죄의 결과들을 어떻게 보는지와 관련된 단어이다. 그리고 은혜(카리스)는 언제나 죄와 범죄 자체에 관련된 단어이다. 전자는 구제를 베풀고 후자는 죄 용서를 베푼다.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크신 하나님이시며, 끊임없이 긍휼을 보이신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시민들 역시 긍휼을 보여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3:22)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은 긍휼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사람들의 고통과 재난에서 자신을 차단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곤궁함을 보고 마음이 녹아져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도움이 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영혼을 불쌍히 여길 때는 죄인들을 충고하고 권면하게 된다.

솔로몬은 인자한 자(merciful)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11:17). 정말 비참해지고 싶으십니까? 긍휼을 잃으십시오. 정말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까?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십시오. 누가복음 6:36절에서 주님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긍훌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순종하지 않는 죄인들을 책망하는 것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은 그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영혼에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긍휼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해서도 긍휼히 여겨야 한다.

 

당신에게 해를 입힌 자에게 긍휼을 보여줘야 한다.

 

긍휼은 부드러운 동정을 말한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58:10). 후한 사랑은 동정에서 시작된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인색하지 않은 기부에 있다(15:7, 25:35, 1 9:9).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가르치기 위하여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교훈하셨습니다(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어서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하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미국 조지아 주에 살던 한 소년이 순간의 잘못으로 죄를 지어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기에 부모님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습니다. 감옥에 들어와 보니 너무 후회스러웠습니다. 이 소년은 소년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했습니다. 부모님이 글을 쓸줄 모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반신반의하면서 부모님이 나를 용서하셨을까?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형이 다 끝날 즈음 부모님께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 아빠, 엄마, 정말 저를 용서하셨다면 제가 집에 가는 날 뒷마당 사과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세요. 그러면 저를 용서해주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께요.” 얼마후 소년은 출소하였고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리본이 달려 있을까? 부모님이 나를 용서하셨을까?’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차마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기차가 자신의 집을 지날 즈음, 용기를 내 눈을 떴습니다. 자신의 집 뒷마당에 있는 사과나무는 온통 노란 리본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긍휼함을 입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실천하는  방법

1. 구제는 아낌없이 주는 것이어야 한다(15:7)

 

2.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으로 주어야 한다(58:7).

 

3.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라(1:6)

 

4. 긍휼을 베푸는 자는 겸손하게 행해야 한다(25:37, 6:2)

 

5. 자선을 신중하게 처리하라(112:5).

 

6. 감사한 마음으로 베풀라.

 

7. 죄인들을 충고하고 권면하라

 

8.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을 복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마지막 심판날에 받게 되지만 세상에서도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긍휼 사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긍휼함이 없으면 사랑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긍휼은 용서를 낳습니다. 긍휼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긍휼은 사람을 나하 되게 합니다. 긍휼은 화평하게 합니다. 긍휼은 긍휼로써 보상을 받습니다. 긍휼은 타인에게 베푸는 것 같으나 나중에는 자신과 자기 후손에게 그 보상을 받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8)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냉혹하고 아주 엄격한 율법 제도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가했습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대신 전통을 지킴으로써 양심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엄격한 율법의 요구대로 행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들 가운데 몇 가지만 지키면 하나님만 하나님이 이해해주시리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못할 율법 때문에 좌절했고 엄청난 죄책감과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짐을 벗어놓을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들으러 광야로 몰려왔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교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인간 성취의 종교입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적 성취의 종교입니다. 저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습니다.

 

왜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야 하는가?

마음의 청결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곧 창세전에 우리를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성결하기 때문에 택하신 것이 아니고 성결하게 되도록 택하신 것이다.

 

마음의 청결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변화된 마음을 찾으십니다(51:10).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73:1).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에게 선을 행하십니까? 마음이 정결한 자입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더러움과 죄악을 씻다는 것입니다. 또한 청결하다는 것은 다른 어떤 요소도 더하거나 섞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심이 없는 순수한 동기를 뜻합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6:21).

 

마음에 죄악을 품은 사람은 청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60:18).

불신앙의 마음은 창결하지 못한 마음이다(16:14, 41:24).

탐욕스러운 마음은 청결하지 못한 마음이다(딤전 6:10).

신실한 마음은 청결한 마음이다(32:2).

 

청결한 마음은 악은 모양이라도 피한다(살전 5:22).

청결한 마음은 거룩한 사명을 거룩한 방법으로 실행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7:1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곳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발견하고 회개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요한일서 1:9절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의 청결함은 내적 청결함, 모든 도덕적 더럽힘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을 말한다.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여호와의 산에 오르거나 그이 거룩한 곳에 설 수 없다(23:3-4)

 

그래서 다윗은 주님이 중심이 진실함을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종한 마음을 창조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24:3-4, 51:6, 73:1, 15:9, 딤전 1:5).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논쟁하실 때 그들이 외적, 외식적 정결함에만 치중하는 것을 책망하셨다(11:39, 23:25-28).

 

또한 청결한 마음은 한결같은 마음, 진실함을 뜻한다. 손이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은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다(4). 즉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거짓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전적으로 진실하다. 그들이 삶은 온통 공적인 것이건, 사적인 것이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투명하다.

 

마음의 청결은 일회적이 아닌 끊임없이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15:9에 보면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셨다는 말씀의 동사시제를 보면 진행형으로 계속 깨끗해져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디도서 3:5절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새롭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청결할수록 마음에 있는 더러움을 더욱 잘 깨닫게 되며, 그것을 더 슬퍼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습니가?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잠언 20:9절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5:9절은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깨끗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에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만날 수있다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이 아니라 청결한 마음의 망원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청결한 마음을 얻기 위한 방법

1.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라(15:3)

 

2. 회개의 눈물과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으라(7:38, 13:1)

 

3. 믿음을 가지라,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하게 하사(15:9).

 

4. 성령으로 청결케 하라(7:38-39)

 

5. 악인과의 친밀한 교제를 주의하라, 악인은 진흙과 같다(57:20)

 

6. 청결한 사람과 동행하라(13:20)

 

7. 마음 청결을 위하여 기도하라(14:4).

 

그러면 하나님을 본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맑은 물은 물 속 깊이를 볼 수 잇지만 흐린 물은 그 깊이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적 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이후로는 그분의 영광을 볼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스가랴 13:1절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리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5:3절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화평하게 하는 자(9)

팔복의 배경을 볼 때, 이 말씀을 폭력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기를 희망하는 열심당원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으라고 하셨습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 있는 사람들이나 밖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믿는 복음과 다른 방식의 이해를 가진 자들을 뽑아내거나 제외시켜서는 안되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13:24-30, 37-43).

 

성경은 에덴 동산의 평화에서 시작해서 영원한 평화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에덴 동산의 평화를 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평화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죄로 상실된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평화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화평케 하신 자로 부르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절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디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는 바른 관계를 낳는 의의 실재입니다. 평화는 그저 전쟁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는 의를 낳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인사, 샬롬은 전쟁이 없으시길이란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의와 선을 가지기길이란 뜻입니다.

 

평화는 결코 의를 희생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3:17). 화평함과 거룩함은 분리할수 없습니다(12:14). 평화와 의는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85:10).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불의와 거짓입니다. 예레미아는 인간의 마음은 거짓되다고 말하며(17:9), 이사야는 그 때문에 평강이 없다고 합니다(48:22).

러분의 생활에 의와 청결함과 거룩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의가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평하며, 인간과 화평하며, 여러분 자신과 화평합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근원이시며, 예수님은 평화의 현현이시며, 성령은 평화의 대리자이십니다(5: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29:11).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우리는 평화의 사자들입니다(고 전7:15).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받았습니다(고후 5:18-20).

 

어떻게 하면 화평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과 화평하십시오(6:15).

 

평화의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엇도다”(고후 5:17). 이 말씀 다음에 어떤 말씀이 나올까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습니다(고후 5:18-19).

 

하나님과 원수된 자의 삶은 멸망입니다.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워도,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하나님과 원수된 자의 삶은 멸망의 길을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가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2.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하도록 도우십시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순간, 그는 우리와 화평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화평케 하는 일입니다(10:15).

 

3. 사람들끼리 화평하게 하십시오.

 

소펜 하우어의 짧은 우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고슴도치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한 겨울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상의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 추위를 견딜 수 있을까? 그러던 중 좋은 방안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서로 껴안고 자는 것이었습니다. 한 고슴도치가 다른 고슴도치를 껴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시 때문에 껴안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내 안에 가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이 서로 손잡게 하십시오. 당신이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우리가 원수들과도 화평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습니다(12:18).

 

나와 다른 사람과의 화평도 중요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과의 화평도 중요합니다. 좌파와 우파,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지역과 지역, 남과 북의 분쟁 등.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먼 산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적극적으로 까ㅣ어들어서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지닌 특징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것이 화평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언제나 화평해질 것입니다. 명절에 기분좋게 집에 갔다가 가족간에 한 바탕하고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갈등의 중심에 꼭 그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가정에 파탄이 있고 갈등이 있고 다니는 교회마다 늘 문제가 생겼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참된 화목에는 열려 있음과 진실함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공동체 안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 합당한 존재가 되려면 우리는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보다 주님을 가장 사랑하고 가장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스스로 충돌을 추구하거나 충돌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라야 한다(고전7:15, 벧전 3:11, 12:14, 2:18).

 

화평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는 것이다(1:20,  2:15).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받는 특별한 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여러분을 향한 개인적이고 영원한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왕자로, 왕으로, 제사장으로, 상속인으로 삼으십니다. 시편 16:3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한 자라고 부르십니다. 디모데후서 2:2절1에서는 귀히 쓰는 그릇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며,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그의 영원한 진리를 계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가 가지신 모든 것의 상속자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이든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은 영원한 멸망에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천국을 주십니다.

 

곧이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5:44-45), 그들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서 그들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화평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심지어 독생자의 보혈의 대가까지 치르고 화평을 이루셨다. 참된 화평과 참된 용서는 희생을 요하는 보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가 똑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든 용서하라(17:3). 어떤 상처를 받았을 때 상대방이 그것을 인정하지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서로 사이가 나빠지고 불화하는 두 사람이나 집단을 화해시키려 애쓰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들어주는 고통, 편견을 제거하는 고통,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둘 다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애쓰는 고통, 오해나 배은망덕 혹은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그러나 또한 그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되고 진리 안에 있기를 기도하셨다.

화평하지 못하면 믿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어떻게 화평할 수 있을까?

먼저 화평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라.

외적으로는 수군 수군하는 것(1:29), 고자질 하는 것(19:16)을 제거해야 한다.

내적으로는 자기 사랑(딤후 3:2), 교만(요삼 9), 시기(딤전 6:4), 쉽사리 믿는 것(14:15).

성경은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16:17).

 

화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자가 되라

믿음은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붙잡아 매고, 화평으로 우리 형제들과 굳게 결합시켜 준다. 성도의 교제를 계속하라.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려고 하지 말고 그들의 장점을 보려고 하라.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누리는 복이 무엇일까요?(5:9)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평가를 받고 존중히 여기심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질 것이다(1:76).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양자로 택하심과 은혜 부어주심으로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신다(43:4, 62:3). 신자는 땅에 있는 존귀한 자이다(16:3). 귀히 쓰는 그릇이다(딤후2:21).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사랑을 부어 주신다(시 103:13).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하신다(고후 12:14).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하여 위험을 막아주신다(121:4, 91:11).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율법의 크고 놀라운 것(48:17)을 보여주시고 행하게 하신다(36:27).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기도의 담대함을 주신다(11:13).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복을 주신다(61:19).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신다(8:28)

하나님은 자녀들을 멸망으로부터 지키실 것이다(5:24, 10:28, 8:1).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처신하자

순종하는 자식처럼 행하자(벧전 1:14)

겸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처신하자(벧전 5:5).

절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처신하자(살전 5:8).

말에 있어서도 분별력있게 해야 한다(4:6).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견에 있어서도 절제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옷차림에 있어서도 절제해야 한다.

근면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스스로 처신하자.

 

통이 큼과 대답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스스로 처신하자.

신성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스스로 처신하자(벧전 1:16).

즐거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스스로 처신하자.

거룩한 소망과 기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스스로 처신하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10-12)

 

신앙생활은 회개의 눈물과 핍박의 비용이 듭니다. 참된 신앙생활에는 대개 핍박이 따른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14:22).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이라고 하였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자에게 던져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화형을 당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동불 가죽을 씌워놓고 사냥개가 갈기갈기 찢게 했습니다. 펄펄 끓는 납 물이 부어졌습니다. 가장 부드러운 신체 부위들이 달군 쇠로 지져졌습니다. 두 눈이 뽑혔습니다. 손과 발이 불에 타워졌습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영국 제도에서부터 유브라데강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로마는 독일 북쪽 끝에서부터 북부 아프리카에 이르는 전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전 로마 제국의 하나 되게 할 것인가를 고심하던 끝에 로마 황제 시이저를 신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모든 사람들은 매년 한번씩 의무적으로 기저에게 향을 피우면서 시이저가 주님이시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향을 피운 사람에게는 리벨루스라는 증명서가 주어졌습니다. 일단 이 증명서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어떤 신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벨루스를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이나 잘못된 신앙자세나 태도 때문에 당하는 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어떤 대의명분이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한 박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처럼 살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15:18-20).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는 것은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핍받을 받습니다.

우리는 처벌과 박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처벌은 나의 잘못으로 당연히 받게 되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5-16).

 

처벌이 정당한 사람들이 잘못한 사람에게 가하는 것이라면, 박해는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에게 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들은 팔복대로 살면 핍박할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의 방식과 팔복의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고,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세 가지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역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즉 욕을 먹는 것, 핍박받는 것, 너희를 거스리는 모든 악한 말을 듣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들겨 맞고, 걷어 차이고, 갇히고, 돌에 맞고, 난파당하고 학대를 당했습니다(고후 11:23-27).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아닙니다. 의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1 5:21-24).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 바울은 누군가 자기를 때릴 때마다 그들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때리는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고통과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분쟁하게 하는 자가 됩니다(10:34).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리라(4:29).

 

예수님이 화평하게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곧바로 박해로 넘어가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우리가 아무리 화해하려고 해도 우리와 화평하게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결점이나 특이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의를 위한 것 때문에(10), 나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다. 즉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박해는 단지 조화될 수 없는 두 개의 가치체계 간의 충돌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반응하기를 기대하셨는가? 불신자처럼 보복해서는 안되며, 어린아이처럼 부루퉁해서도 안된다. 또 개처럼 자기연민에 빠져서 상처를 핥아서도 안되고, 금욕주의자처럼 그저 씩 웃고는 참고 견뎌서는 안된다. 더구나 자기 학대에 빠진 사람처럼 그것을 즐기는 척해서는 더욱 안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12). 기뻐하고 뛰놀아야 한다(6:23).

 

부분적으로는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 모르지만, 하늘에서는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하지만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받는 것은 아니다. 보상에 대한 약속은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또 부분적으로는 박해가 진정성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2).

 

그런데 우리는 상급의 의미에 대해 혼동합니다. 동기로서의 상급과 선한 행위의 결과로서의 상급을 종종 혼돈합니다. 즉 우리가 상급을 바라고 의를 행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한 일에 대한 결과로서 상급을 아주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그 상급은 무엇입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팔복대로 살다가 박해를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한 깊숙한 관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더 감사하게 되며, 주님이 내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주된 이유는 주님의 기준에 충성하고 고난을 받기 때문입니다(11). 사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기뻐하였다(5:41).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대를 예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칭찬하면 화가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6:26). 고난은 참된 제자도의 표시다.

틸리게가 말하듯이 누구든 예수님과 교제를 원하는 사람은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분명히 구원받았음을 가장 잘 보증해주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박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1:29). 우리는 핍받을 받더라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살전 3:3).

우리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을 산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분개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계속 핍박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세상방식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거기에는 대가가 지불된다는 것을 말해줄 것입니다.

 

성도는 핍박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핍박하는 상대방을 원망해서도 안됩니다. 용기가 꺾여서는 안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누리는 축복은 무엇인가? 천국의 저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8:18).

 

요셉은 의를 위하여 형들에게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의를 위하여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시고 바벨론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그의 의로운 삶 때문에 지하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사 누구보다도 존경받는 선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핍박은 있지만 그 핍박을 기꺼이 견딜 때 약속은 우리 것입니다.

우리는 핍박 가운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을 때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는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12). 이 상은 크고 풍성하고 영원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전의 선지자들도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선지자를 핍박했던 것처럼 당신이 핍박을 당한다면 그러한 부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고 나의 진리를 전하며 나의 진리대로 살면서 핍박을 받느냐? 그렇다면 너희가 선지자들에게서 내려오는 의로운 계보에 속한 것을 기뻐하라

 

핍박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보상(12)

1. 나의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하게 됩니다.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2, 박해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나타내게 됩니다.

 

3.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신분이 되기 때문에 기뻐하게 됩니다.

 

4.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은 장차 우리가 갈 처소가 하늘 나라임을 밝혀주시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5. 하늘의 상급이 크기 때문에 기뻐합니다(고후 5:10, 11).

 

6. 핍박받는 크리스찬은 거룩한 순교자들과 함께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8:18).

 

분노 다루기

 

전통적 의 : 살인하지 말라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21)

 

악순환에 대한 진단 : 분노와 심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2)

 

하나님은 분노를 없애지 않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시면서 그가 분노를 옳게 처리하고 잘 다스릴 것이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경고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분노를 없애지 않는데서 오는 현실적인 위험에 대해 경고하신다. 예수님은 할 걸움 더 나아가 분노를 옳게 처리하고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네 형제를 찾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화목하라고 하였다.

화평하기를 싫어하는 마음과 결함된 분노는 형제와 자매들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한다.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 : 화평하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하(5:23-26).

화평을 이루기 위해 형제를 찾아가는 것은 정확히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행하신 일이다.

 

예수님은 해결되지 않은 분노 때문에 해를 입을 수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노한 대상과 화목하기 위해 먼저 다가가라고 가르친다. 개인적인 권고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다른 한 두 사람에게 효과적인 의사 전달을 위해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 다른 한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이야기가 좀 더 온전히 표현되고 잘 듣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법이 효과가 없다면 ㅠ다음 단계로 소그룹 상담이나 대면의 방법을 취할 수 잇다. 여기서 신앙 공동체의 대표가 분쟁을 중재하도록 한다.

 

성적인 유혹과 정욕 다루기

 

전통적 의 :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27).

예수님은 간음이라는 외적 행동뿐 아니라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내적 욕망을 다루는 계명을 인용한다(20:17).

합비인 시므온 벤 라키는 이렇게 말했다. “간음 행위를 하는 자신을 마음 속으로 상상하는 자도 간통자로 불린다.

 

악순환에 대한 진단 : 소유욕과 중독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8).

예수님은 내적 욕망 자체를 금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생각 속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정욕을 품는 모든 사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여인을 욕망의 표적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말씀하신 것이다.

포르노 영화는 정욕으로 바라보는 것의 한 예다. 포르노 영화는 강간과 살인을 저지르기 쉬운 형태로 만든다.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 : 책임지고 존중하라

 

만일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5:29)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5:30).

구원의 방법이 오른 눈을 빼어 내버리라는 말씀은 충격적인 효과를 위한 극적인 표현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가 유혹의 원인을 근절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목한 결혼생활 유지하기

 

전통적 의 : 합법적으로 이혼하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5:31)

모세는 신명기 24:1-4절에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면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

 

악순환에 대한 진단 : 깨어진 관계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5:32)

악순환에 대한 진단을 내려 보자. 이혼은 간음을 초래한다. 가까운 친구들이 이혼한 것을 본 적이 있거나, 당신 자신이 이혼한 경험이 있다면, 혹은 이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심각한 상처와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자녀들이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 : 화목하라, 서약을 지키라

 

여기서는 어떤 변화를 시작해야 할지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다. 아마 예수님이 마태복음 5:24절과 같은 변화의 시작을 가르치셨음에 틀림없다(먼저 가서 네 아내와 화목하라). 고전 7:10-11절에서 바울은 화합하라고 명령한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율법적인 금지사항이 아니라 우리를 악순환에서 구원하는 변화의 시작에 관한 것이다.

 

진실 말하기

 

전통적 의 : 거짓말 하지 말라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33)

구약 성경은 분명하게 거짓 서원에 대해 지적한다(19:12, 30:2, 23:21-23, 8:17 참조). 전도서 5:5절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악순환 : 속임수와 배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그므이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5:34-36)

 

맹세는 언제나 거짓된 주장으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지배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이용한다.

23:16-22절에서 말하는 관행은 진실성 있게 들리는 서약을 하지만 약속을 실제로 이행할 생각이 없음을 은밀히 드러낸다.

 

이것의 잘못된 점은 무엇보다도 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속임수로 상대방을 조종하고 지배하려고 사람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셋째, 남을 속이고 조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약속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마다, 그리고 맹세를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 : 진실을 말하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5:37).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맹세를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퀘이커 교도들도 이를 거부함으로써 법정을 모독한 죄로 처벌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면에 있어서는 좋은 평판을 받았다.

 

이 본문은 맹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다른 사란들에게 진실해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진실을 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타 시작되어야 한다. 아기들은 일찍부터 부모와 밀착된 환경에 있으며, 부모와 아기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특성은 매우 중요하다.

 

화평 이루기

 

전통적 의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38)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복의 악순환이 중단되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받은 손해와 똑같은 정도의 불이익을 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4:24).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과 이스라엘 군대의 암살 공격이다. 하지만 보복은 폭력 뿐 아니라 영속적인 증오를 확대시켰다.

 

악순환 : 보복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5:39)

이 말씀은 원한을 품은 보복, 혹은 폭력적인 보복에 참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7-21절에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 : 선을 따르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5:39-42)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황금률과 일치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6:31). 이것은 원수의 정당한 관심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가 주리거나 목마를 때 음식이나 마실 것을 주어 주도권을 잡으라고 우리에게 명한다. 그것은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을 깨트린다.

 

1. 예수님은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오른뺨을 친다면 왼뺨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신다.

 

(당시의 문화에서 왼손으로 다른 사람을 만지거나 접촉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왜냐하면 왼손은 불결한 일에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비누가 아직 통용되지 않을 때였고, 사람들은 온갖 더러운 일을 할 때 왼손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른 손으로 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친다는 것은 손등으로 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존심에 대한 모욕입니다.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단순히 모욕을 참는 정도가 아니라 같은 정도의 존엄성을 돌려대는 것이다.

 

2.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져가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속옷은 쉽게 말해 당신에게 마지막 남은 것을 취하려고 당신을 고발했다는 것이다. 당신은 너무 가난해서 가진 것이라곤 속옷과 겉옷 뿐이다. 그 사람은 당신의 겉옷을 취하기 위해 고발할 수는 없다. 성경은 이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22:26-27, 24:12-13,2:9). 욕심많은 채권자는 당신이 가진 단한 벌뿐인 속옷을 갖고자 당신을 호소한다. 그런 경우에 겉옷과 속옷을 벌거벗은 채로 서서 그 사람에게 모두 주라는 것잊다. 이는 벌거벗음으로써 고발한 자의 탐욕을 드러내는 행위다.

 

3. 당시 유대와 이스라엘을 점령한 로마군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짐을 지워 5리를 가게 할 권리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점령당한 현실을 원망했고, 짐을 져야 하는 현실을 원망했다. 그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훗날 열심당원이 된 시카리는 점령세력에 폭력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폭력적인 주도권을 주도하였다. 오히려 10리가지 짐을 날아주라고 하였다.

 

원수 사랑하기

 

전통적 의

 

마태복음 5:43-48절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구약 성경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 사해 부근에 살앗던 쿰란 공동체의 두루 마리에서 나온 말이다.

 

악순환 : 쉬운 사랑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5:46-47)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은 당파성, 편파주의, 족벌주의, 인종주의, 국가주의의 배타적인 이기심이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식사규례에 의한 정결함을 주장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규정된 방식에 따라 손을 씻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했다. 세리들, 여인들, 이방인들, 부정한 사람들,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배척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또한 십일조를 엄격하게 실천하는 것이 정결함과 의로움에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심지어 향신료로 사용되는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식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외인을 배척하고 타락을 이방인의 탓으로 돌리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이 로마인들에 대한 증요를 낳고 로마 군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반란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염려하셨다(23:23-24).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거룩함이 분리와 배척을 뜻한다고 가르쳤다. 예수님은 거룩함이 긍휼과 자비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기 위하여 일부러 세리들, 여인들, 심지어 창녀들과 식사를 하였다. 주님이 우리들, 유대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회개로 초청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더럽히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질투, 비방, 속임, 탐욕, 살인, 그리고 원한 관계를 말한다(7:18-22).

 

이것이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들보다 나아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다. 우리의 의는 이웃 사랑의 공동체에 다른 이들을 포용함으로써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한다.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 :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5:44-45).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22:39)는 말씀은 레위기 19:17-18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네 이웃이 누구냐(10:29)라는 의문을 가졌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하나님이 해와 비를 하나님의 원수된 자에게도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고 사랑을 베푸는 이웃 공동체에 원수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태도나 감정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정당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행동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대접하라고 요청하신다. 바울은 이 가르침에 대해 로마서 12장에서 원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이 함께 슬퍼하고 그들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라고 말한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로마 점령자들을 이웃이 아닌 원수로 생각했다. 거짓 메시야가 출현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추종자들을 모았다가 로마인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예수님은 원수에 대한 그러한 증오를 경계하셨고, 화평을 이루는 법을 알지 못하는 지도자들을 보며 예루살렘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다.

 

의의 실천

 

전통적 의 : 회복과 정의를 구하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6:2), 너희는 기도할 때에(6:5), 금식할 때에( 6:16)

여기서 말하는 의는 개인의 의가 아니라, 회복의 정의, 구원의 정의( 힘없는 자, 버림받은 자 구원).

구제는 구원과 회복의 정의에 대한 실천이다.

 

힘없는 자들을 위한 정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 마음을 맞추는 것이다.

금식은 이 세상이 굶주린 자들에 대해 우리의 탐욕과 무관심을 회개하도록 한다. 이 세 가지 실천은 빈곤하고 부당한 대우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에 참여하는 것이다.

 

악순환 : 잘못된 의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2, 5, 7, 16)

예수님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기대하면서 유혹과 악순환에 굴복하는 일에 대해 경고하신다.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 :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은밀히 행하라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벚디께서 갚으시리라(6:4, 6:6, 17-18)

만약 예수님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크게 기도하고 사람들의 시선에 쓰지 말라고 가르치셨더라면 그것응 아마 따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구제와 금식을 사람들 앞에서 행할 때에도 그들이 생각하는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임재만을 인식하라고 가르치셨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도 금식할 때에도 구제할 때에도 은밀하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바른 투자의 실천

 

전통적 의 : 탐욕스럽게 재물을 쌓아 두지 말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6:19)

이것은 생계 유지를 반대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또한 모든 소유물을 버리라는 뜻도 아니다. 이 말씀이 금하는 인색함과 탐욕 그리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섬기기 보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수입을 축적하는 것이다.

 

악순환 :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김

 

19절은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는니라는 악순환을 보여준다. 24절에 나타난 악순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다. 여기서 악은 우리가 땅에 쌓아둔 보물이 조만간 좀이나 동록에 의해, 혹은 도둑에 의해 없어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보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음은 그 보물이 자신에게 좋은 것들을 가져다 주리라는 기대를 할 때 나타난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 가치있는 사람이 되는 것, 존경받는 것, 어떤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 등이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이다.

 

예수님이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실 때 지적하신 문제는 탐욕,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무관심, 인생이 성공이 소유에 달려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어리석은 부자가 했던 말은 전부 나에 관한 내용뿐이었다(12:15-21). 부자의 어리석음은 탐욕수러운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며, 그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한 정의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 :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정의에 투자하라

 

우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돈주고 산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신다(19:24).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33절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회복의 정의에 투자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이것을 일단 먼저 하고 다른 것을 하라는 듯이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 이것을 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마음이 소유를 따른다. 우리가 교육이나 선교에 돈을 투자한다면 에이즈와 굶주림과 가난을 예방하는데 돈을 투자한다면 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정의와 자비에 우리의 소유를 터치하면 우리의 마음도 그곳에 투자될 것이다.

 

사이더는 미시건주 오타와 군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 선교회에서 한 교회당 5-8명 정도로 관계사역 팀을 구성하고 이들을 각각 가난한 한 가정과 연결시켜 준다. 그들은 사랑, 정기적인 만남, 감정적인 지원, 기도, 정부기관에서 지원할 수 없는 개인적인 돌봄 등을 조화롭게 잘 제공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아파트를 구하는 일, 법적 문제의 해결, 차를 수리하거나 구임하는 일, 비상식량과 의복, 직장을 구하는 일,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는 일, 빛을 갚는 일, 재무설계에 대한 도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소인 우정을 제공한다.

사이더는 성경이 가난한 자들에게 정의를 헹하는 것이 왕의 책임임을 반복해서 선언하고 있다.

 

비판하지 말고 용서하기

 

전통적 의 : 비판하지 말라

 

다른 누군가를 비판한다는 것은 마치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나 자신을 그의 감독자로 정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고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다(11:4).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그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겸손과 회개와 감사의 태도를 지닌 존재로 변화된다.

 

악순환 : 변명과 자기 방어

 

왜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 있는 들보에 대해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모른체 하고 남의 작은 결점들을 지적하려는 성향이 있음을 재미있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확대시키고 자신의 잘못을 축소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변명거리를 늘러 놓고 우리의 행위를 방어하고 정당화하려는 욕구로 왜곡되어 버린 시각을 가리킨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며, 자기 정당화라는 안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사도바울은 헬라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했다.

 

이어서 바울은 유대인들 가운데 책망받아야 할 우상숭배에 대해 언급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기 의를 믿고, 속임, 악의적인 말, 저주, 악독, 폭력,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함도 알지 못하는 악습들로 가득한 그들의 모습을 지적했다(3:10-18).

 

바울은 우리 중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판력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자기 정당화로 인해 몹시 어두워졌기 때문이다(3:9)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 : 회개하고 서로 도우라

 

네 눈에서 들보를 빼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의 요청이다( 7:5). 변화에 대한 필요를 깨닫고 실제로 변화를 향해 나아가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은 은헤를 통해 자기 의의 악순환을 바로 잡는다.

 

본회퍼는 이렇게 썼다. “나는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입을 다무는 죄를 범했다. 나는 위협적인 폭력 앞에서 진실하지 못하고 위선을 행하는 죄를 범했다. 나는내 이웃의 극심한 빈곤이 나와 관계있음을 무자비하게 부인하는 죄를 범했다. 나는 배신하여 그리스도를 떠나는 죄를 범했다. 그는 교회가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죄, 우상숭배를 반대하지 않은 죄, 권력자들의 이데올로기에 아첨한 죄를 상세하게 고백한다.

 

교회는 희생자를 위한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그들을 돕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찾지 않은 채 압제, 증오, 살인 들을 목격해왔음을 고백한다. 교회는 가장 약하고 가장 방어력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의 생명에 대해 죄를 범해왔다. 회개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이자, 교회적 차원, 심지어 국갖벅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비판적이고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용서하는 신앙을 지닌 기독교 공동체는 기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 섬기는 것을 강조한다.

루이스 스미즈는 용서의 기술(규장각)이란 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서의 질문에 답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루이스에 의하면 용서의 마음을 일으키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불공평하고 부당하게 상처 입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차 없이 드러내고 정직하게 비판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용서의 두 번째 단계는 증오와 보복의 욕구를 극복하는 것이다.

 

용서를 일으키는 세 번째 단계는 상대방과 공감하는 부분을 찾는 것이다. 이는 상처를 준 행위 자체에 공감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 역사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용서의 과정을 마무리하는 네 번째 단계는 우정의 자유와 행복을 회복하는 일이다. 혹은 최소한 상대방을 긍정적인 관계로 다시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과 같이 너희는 서로 받으라(15:7).

 

충성에 대한 실천

전통적 의 : 거룩한 것을 로마인들에게 주지 말라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항상 이방인 개개인이 아닌 전체 이방 국가들을 가리켰다. 돼지는 일반적으로 로마를 지칭하는데 아마도 로마인들이 돼지고기를 먹고 정기적으로 돼지를 축성하기 위해 제물로 바쳤기 때문일 것이다.

 

악순환 : 돌이켜 상하게 함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밝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 가 염려하라. 예수님은 여기서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경고하셨다. 로마와의 부당하곻 폭력적인 로마 권력 구조와의 타협을 지적하고 계신다.

 

변화의 시작과 구원의 길 : 하나님을 신뢰하라

 

당시에는 명성, 권력, 재물을 얻게 위해 로마제국에 충성과 신뢰를 바치는 것이 1세기에 사람들이 당면한 현저한 유혹거리였다. 당시에 사두개인과 대제사장들은 로마의 부패한 새력과 타협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과 명성을 비합법적으로 획득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모가 자녀들을 돌보듯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신뢰, 충성, 기도를 바치라고 가르치셨다.

 

황금률과 사랑의 모습

 

1.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첫 번째 측면은 상대방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를 인지하는 길이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선물들을 주시듯 우리도 남에게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오신 것처럼,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 참여하고 적대감이 있는 곳에서 조차 다른 사람을 향한 주도권을 가진다.

 

자기도취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시각을 긍정할 수가 없다. 즉 자신의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시각을 위협하는 다른 모든 방식들을 거부하거나 혹은 다른 시각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시각을 부정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의 지각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각까지 포함하여 지각하는 방법을 권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할 때 우리는 더 풍요롭고 더 현명한 자아를 발달시키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공감하는 사랑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향상시킨다.

 

2.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두 번째 측면은 사랑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려 깊은 행동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공감하고 그것에 대해 실제로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이 사랑의 모습에 관해 가장 상세하게 가르치신 것은 긍휼히 여기는 사마리아인의 이유다(10:29-37).

 

3.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세 번째 측면은 사랑이 사랑으로 헹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일을 포함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상처입은 사마리아인을 그냥 지나친 제사장들과 사마리아인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유대인들에게 직접적으로 대항한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공동체에서 배척하는 이들에게 대항하는 어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4.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네 번째 측면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구하는 것이다.

 

사랑은 많은 사람들이 불의로 인해 상처받고, 배척당하고, 지배당하고, 압제당하고 있음을 안다.

킹은 자신의 책,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에서 세상의 수많은 어린이들의 성장과 미래를 저해하는 인습과 정책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에게 감동적인 도전을 준다, 그는 어린이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온전히 성숙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불의를 없애기 위해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긍휼히 여기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다른 인종 집단을 훌륭한 사회와 인간적 성취로부터 배제하는 불의에 대항하도록 도전을 준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는 금언은 진리입니다(폴리니)

그래서 주님의 천 선언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너희가 매우 강조되었습니다. 너희만이 소금이다.

세상은 타락해사는 것을 스스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오직 외부에서 들여온 소금만이, 즉 그리스도인만이 그 부패와 타락을 막을 수 있습니다.

 

소금의 특성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짠맛은 다른 것과 구별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9:50)

너희의 자녀와 가정에 부도덕한 부패를 막기 위해 소금을 쳐서 방지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 국가의 부정과 불의를 막기 위해 모든 성도는 소금의 구실을 다해야 한다.

소금은 맛을 내어야 한다. 성도는 맛을 내어야 한다.

소금에 염화나트륨을 섞으면 맛을 잃게 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5:14-16)

나를 믿고 따르는 너희들만이 빛이다.

우리의 착한 행실에 의해 우리의 빛이 발하게 된다. 착한 행실이란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것, 행하는 것, 그리스도인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 세상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빛이어야 한다.

빛이 착한 행실로 묘사된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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