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궁핍하게 살고 고난 가운데 충성된 교회였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가 나온 교회인데 진리를 떠나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약 100킬로미터 되는 곳에 위치한 아시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에베소와 서머나가 경제의 중심지였다면, 버가모는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버가모에 있던 의과대학에는 20만권의 두루마리 책이 소장된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버가모는 책을 만드는 종이, 양피지의 생산지였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처한 상황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가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따르지 말아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버가모교회는 외부적으로는 우상숭배의 핍박이 심했고, 내부적으로는 혼합주의 신앙으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버가모 교회에 주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말씀의 칼이 나왔습니다(계 1:16). 주님께서 날선 칼을 가지신 것은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총독은 검은 가진 총독과 검을 가지지 못한 총독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검을 가진 총독을 사람은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버가모 총독은 검은 가진 총독이었습니다. 그래서 반역자를 처형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실제로 순교자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좌우에 날선 칼을 가지신 분으로 모든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 자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자가 있는 데나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버거모 교회의 성도들에게 나는 네가 어디 사는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버가모 교인들이 사는 주소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버가모 교인들이 지금 처해 있는 온갖 어려움을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버가모 교회가 얼마나 영적으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사회에 있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당시 버가모에는 아테네 신전이 있었는데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숭배하였습니다. 그 앞에 주신인 제우스 신이 벼랑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치료의 신이라 불리는 아에스쿨라피우스라는 치료의 신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상징이 뱀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영국 군의관들의 모자에는 이 뱀의 형상이 남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이 황제숭배였습니다. 버가모는 황제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이 제일 먼저 지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에 산다는 것 자체가 영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였습니다. 그만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어디에 사는지 안다고 하시면서 거기는 사단의 권자, 사단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버가모가 황제 숭배와 온갖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기에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1.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가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여러 가지 우상과 황제 숭배의 강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신자들 대부분은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많은 유혹과 핍박이 있었습니다. 우상숭배가 만연된 곳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옛 생활로 돌아가도록 압력을 받고 믿음을 부인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고난과 순교 가운데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은 한 사람 안디바를 칭찬하셨습니다. 본문 13절 하반절입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안디바는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믿음의 순결을 지키고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당시 안디바는 명성 높은 버가모 감독이었는데 황제숭배를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혀 화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안디바를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칭찬하시고 그렇게 불러주셨습니다. 증인이란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불신 세상에서 주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으로 사는 그 자체를 주님은 기뻐하시고 칭찬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우상숭배하고, 타락하고, 음란하고, 부도덕하게 살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안디바처럼 현실을 도피하지 말고 사탄이 활개치는 그곳에서 믿음을 지켜내야 합니다. 불신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믿음의 순결을 지키며 사는 것 자체를 주님께서 칭찬하십니다.
2.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여기서 발람의 교훈은 니골라당의 교훈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 책망할 것이 두어 가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무엇입니까? 모압의 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게 하였습니다. 발람은 불의의 삯을 좇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따라갔습니다(벧후 2:15).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고 도리어 축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도 발람은 재물이 탐이 나서 미디안 여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여 바알브올을 섬기고 음행하도록 유혹하였습니다(민 25:1-3).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한 축제에 참여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이 죽게 됩니다.
따라서 발람의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방사람들과 잡혼을 하게 하고 우상 숭배하는 일에 타협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당시 버가모도 특히 우상 숭배가 많은 지역이었고,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음으로 세상과 타협하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버가모 교인들이 우상 숭배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15절입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블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발람의 길을 따라는 것은 바른 진리를 떠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유다서 1장 11절입니다. “화 있을 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다고 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우상숭배에 참여하게 되고 그 신전에서 행하여졌던 음란한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버가모에서는 동업조합인 길드가 발달하였다고 합니다. 그 길드는 종류에 따라 다양한 우상을 섬기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그 길드에 참여하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타협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말씀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가치관에 미혹되어 세상의 관습과 도덕에 타협하는 것이 발람의 교훈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에 따라 살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자들이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단들이 갖가지 형태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캠퍼스에는 불신동아리가 생겼습니다. 안믿는 사람들이 안믿도록 전도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복음 진리를 지키려고 하다가 성도들 간에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반면에 버가모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려다가 진리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만약 회개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급히 가셔서 그 입의 겁, 하나님의 말씀의 검,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과 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의 추종자들을 심판하신 것처럼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민 31:8).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돈을 벌기 위해, 현실적으로 손해보기 싫어서 발람의 교훈을 좇고 있지 않은가? 불의한 줄 알면서 죄와 타협하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결단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3.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주십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교회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만나를 주시고 흰 돌을 주십니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란 어떤 자일까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자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해도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잃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어떤 상급이 주어질까요?
첫째 감추었던 만나를 주십니다.
발람이 살던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만나로 먹고 살았습니다. 만나를 넣은 항아리는 언약궤에 보관되었습니다. 히브리 전승에 의하면 주전 6세기경 솔로몬 성전이 파괴될 때에 예레미야가 언약궤와 만나를 감추었는데 장차 메시야 왕국의 잔치에서 공개되어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감추었던 만나는 신령하고 참된 양식,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실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둘째,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주십니다.
흰 돌 위에 새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그 이름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흰 것과 새 것은 장차 천국에서 맞게 될 축복을 상징합니다. 당시 재판할 때에 배심원들이 모든 심문 과정을 지켜보면서 유죄와 무죄를 표시하기 위해 흰돌과 검은 돌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흰돌이 많으면 무죄, 검은 돌이 많으면 유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흰돌을 주신다는 것은 승리한 자에게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흰돌은 신앙의 정절을 지킨 승리자에게 천국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초대장을 주신 것입니다.
새 이름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인격과 삶을 인정하는 표시로 주시는 이름입니다. 흰돌과 새 이름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새로운 자임을 인정해 주시는 표시로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모든 축복을 받을 자격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흰돌을 주신다는 것은 죄와 더러움에서 깨끗해지고 새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름이 적힌 흰돌을 받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격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버가모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사는 그 자체가 큰 고통입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을 지키는 것 자체를 주님께서 매우 기뻐하십니다. 밖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핍박을 믿음으로 감당하고, 내부에 파고드는 발람의 교훈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충성된 증인,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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