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2개월간 출애굽하고, 1년 동안 말씀 가르쳐 놓고 1년 2개월 후에 싸움을 위한 인원계수를 하였습니다. 말씀을 준 후에 싸움 얘기를 하는데 이것은 사단은 말씀을 미혹시킵니다. 전쟁에서는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에 전쟁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겨야 합니다.
민수기 1장 3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남자들을 계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싸움에 나갈 만한 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전쟁입니다.
하지만 싸움의 대상에 따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 먼저 분별해야 합니다. 가령 그 싸움이 사람과의 싸움이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싸움이 마귀와의 싸움이라면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잡은 악의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마귀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유다서 1장 3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는 느꼈노니.”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얻은 구원은 잘나고 똑똑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나 의로운 자나 병든 자나 건강한 자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인종이나 민족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를 인하여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믿음의 도는 한 마디로 정확하게 말해서 창조의 목적입니다. 이 믿음의 도를 위하여 누구와 싸워야 합니까? 우리의 싸움은 목사와 장로의 싸움이 아닙니다. 성도와 성도의 싸움이 아닙니다. 교회와 교회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마귀는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못하도록 미혹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믿음의 도를 위하여 미귀와 힘써 싸워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 보면 마귀는 만국을 미혹한다고 하였습니다.
유다서 1장 4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마귀가 어디에 들어왔다는 말입니까? 성도들 가운데, 즉 교회 안에“ 마귀는 사람을 통하여 교회 안에 역사합니다. 즉 마귀는 옛적부터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꺼리로 바꾸어 놓게 하였습니다. 마귀가 교회 안에 들어와 믿음의 도를 미혹시킵니다.
그런데 마귀의 미혹을 분별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요한일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에 따라서 마귀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이하나님의 말씀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사람의 뜻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몇 명이 될까요? 내 기분에 맞으면 아멘이고, 내 기분에 맞지 않으면 노멘입니다. 내 자존심이 상하면 노멘입니다. 네게 좀 유익이 되면 아멘이고 유익이 없으면 노멘입니다.
유다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앞까지 천사장 루시퍼 시건에서부터 유다서가 기록될 당시까지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믿는 사람들 가운데 멸망당한 사건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멸망당한 이유가 가만히 들어온 마귀 때문인 것을 증거해 줍니다.
유다서 1장 5-7절에 보면 마귀의 공격이 주로 세 가지로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로 마귀의 공격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믿고 나서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5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다들을 멸하셨으며.” 여기서 믿지 아니하던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킬까요? 히브리서 3장 18-19절에 보면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가 믿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만드는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누구일까요? 에베소서 2장 2절에 보면 지금 불순종의 아들 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영이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입니다. 곧 마귀가 불순종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불순종하다가 저주받고 말았습니다. 그들 역시 마귀에게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마귀의 공격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고 부추깁니다.
유다서 1장 6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자기 자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본래 천사장 루시퍼는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려고 하다가 결국 타락하게 되고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종교적 지도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자기의 영광을 구하고 있으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자신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도록 몸부림쳐야 합니다.
셋째로 마귀의 공격은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살라고 유혹합니다.
유다서 1장 7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월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말세에 성적인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파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 시대에도 육체의 정욕대로 살다가 홍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육체의 정욕대로 살다가 불과 유황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말세에도 육체의 정욕대로 살다가 불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마귀의 공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간파해야 합니다. 유다서 1장 15-16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의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팍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이와같이 마귀의 공격은 대부분 말을 통해서 진행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와에게 말을 건넵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힘들 때마다 그들은 말로 원망하였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미혹이라는 사실 조차도 깨닫지 못했습니다(시 95:10).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 마귀는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로 부추겼습니다.
마귀의 공격은 사람의 생각을 통해서 진행됩니다. 마태복음 16장 21-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통하여 우리를 미혹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육의 생각인지 영의 생각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분뱔할 수 있을까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6). 고라의 길, 발람의 길, 고라의 길은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멸망을 좌초한 사람들입니다(유 11절).
에베소서 6장 10-13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옛적부터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믿음의 도를 미혹하는 마귀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히 12:4).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25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이기기를 다투는 자는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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