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M.R, 코디가 쓴 『신뢰의 속도』라는 책에 보면 “우리가 사람을 신뢰할 때 그의 성실성과 능력을 믿는다. 반면 불신은 의심을 낳는다. 우리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을 때 그의 성실성, 의도, 능력, 실적을 의심한다. 또한 우리는 경험을 통해 신뢰에 기초한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에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크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신뢰 수준이 내려가면 속도도 올라가고 비용은 내려간다. 신뢰수준이 올라가면 속도도 올라가고 비용은 내려간다. 자기 신뢰, 대인관계 신뢰, 조직신뢰, 시장신뢰, 사회 신뢰의 수준 어느 정도입니까?
성경에 보면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꼽으라면 저는 요셉을 추천하겠습니다. 요셉은 철저한 배신과 버림을 당하면서도 불행에 매몰당하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야곱의 가족 전체가 애굽에 이민을 오게 되고 17년간 행복하게 살다가 아버지 장례식을 다 마친 후 어느 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형들이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신 후에 요셉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혹시 자기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말씀하셨던 것을 전해줍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시매 요셉이 그들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습니다(창 50:15-17).
형들이 지나간 죄들에 대해 이미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갈등하는 것을 보고 요셉은 마음이 찡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아직도 지나간 잘못에 눌려서 은혜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오랫전에 요셉에게 했던 말들과 행동들이 다시 떠올라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요셉이 단지 아버지 때문에 복수를 하지 않고 미룬 것이 아닐까? 형들은 이전에 요셉이 했던 말을 믿지 못하고 동기를 의심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순전한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라고 응수합니다. 형들이 악을 행하여 나를 해하려 했다는 것 나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사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선과 악에 대해 기준이 무엇의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떠 먹은 후에 인류는 선과 악에 대한 갈등으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선이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이 악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은 지나치지 않는 중립 지대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모든 말과 행동이 선이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모든 말과 행동이 악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악하게 태어났다고 말하는데 반해, 사람들은 선하게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선의를 갖고 상대방을 대하면 상대방도 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북한은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는 것은 그들이 확증편향에 젖어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확증편향이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현상입니다.“ 이것이 옳다고 믿는 것 자체가 위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에 악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진단합니다.
코로나 사태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 바로 가치관의 부재입니다. 이사야 5장 20절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사람은 화 있을진저.“ 선과 악을 왜 구태여 구분하고 선을 그어야 할까요? 적당하게 넘어가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죄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신억간에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받기 때문입니다.
과연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일까요?
창세기 50장 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대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악을 저질러도 결국에는 선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의미를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내가 저지른 악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한 것은 악입니다. 상처를 주는 것은 악한 것이지만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즉 형들이 요셉에게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애굽에 노예로 팔려왔지만 그는 자신이 받은 상처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인해 감옥에 갇혔지만 국무총리가 된 이후에 보복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가치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을 보면 위기 극복의 비결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요셉은 국제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의 이름은 므낫세입니다. 므낫세는 자기 형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을 잊어버렸다는 의미로 그렇게 지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번창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로 기억하고 싶은 과거의 상처를 잊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받은 상처에 매몰당하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어디를 가든지 신뢰받는 자, 쓰임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인맥이나 배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이 행한 악으로 인해 상처받고 눌려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악을 상대하지 않고 피하는 자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과 같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기면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준 손해나 상처 때문에 불행해져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에게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분노나 미움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선으로 악을 갚는 것이 최고의 보복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아무 죄가 없으신 그분이 억울하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 악이 만연되어 있다고 해서 선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누가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실까요?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실까요? 선으로 악을 갚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오직 선으로 악을 갚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정치는 또 다른 악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다윗의 정치는 보은보상이 정치입니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찾아서 은혜를 베푸는 정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그렇게 힘들게 했던 시므이, 압살롬, 요압 장군, 그리고 사울 왕에게도 보복 정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나발이 양의 털을 깎는 날에 부하들을 통해서 잔치 음식을 달라고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나발의 집에 남자를 다 죽이려고 보복을 결심합니다. 그때 나발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다윗에게 나아가 용서를 구하자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내가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다고 고마워합니다(삼상 25:33).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악에게 쉽게 지고 힘을 잃게 맙니다. 믿노라 하면서 별 것도 아닌 일에 시험들곤 하지 않습니까? 때로는 고독하고 외롭게 느껴져도 강해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순간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이겨냅니다. 그렇다고 원수가 저지른 악에 져서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야 합니다.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대하는 것은 악과 싸워서 이기는 것입니다. 은혜로 원한을 갚으며, 사랑으로 미움을 대하여 선으로 악을 대하는 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힘들었던 쓴뿌리가 있을 수 있지만 거기서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고통스럽고 아프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생각지 못한 은혜로 바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정말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계속하여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죽음이 찾아올 때 존재하는 것이라곤 지옥과 공포뿐입니다."
찰스 스윈돌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기쁨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만이 있을 뿐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힘들어 하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우리의 역할을 잘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고 힘들어도 쓰임받는 자가 됩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요셉과 같이 최악의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는 기호가 됩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교회들을 통해, 성도들을 통해 놀라운 우리는 선으로 악을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으로 이기면 악으로 고통받는 것 까지도 우리에게 유익하게 바꾸어주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절망했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떤 예수 믿는 직장인이 있었는데, 그의 상사는 너무 성격이 못 되고 괴팍했다고 합니다. 걸핏하면 사소한 일을 갖고도 부하직원에게 화를 내고 서류를 집어던졌습니다. 그는 신앙을 가졌지만 직장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병이 날 것 같았다. ‘이 직장 사표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성경을 읽다가, 롬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를 읽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가슴에 부딪혀왔습니다. ‘내가 이 말씀대로 한 번 실천해 보자’ 결심했습니다. 그 다음날 이 성도가 직장에 갔는데 상사가 자기한테 잘 해주었을까요?
다음날 직장에 갔는데, 상사가 여전히 자기에게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때 그는 속으로 ‘주님, 저 분을 축복해 주세요!’ 이렇게 축복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또 자기에게 신경질을 쏟아낼 때, 그는 계속 상사를 축복하며 속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상사가 변화될 줄로 굳게 믿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사는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놀라운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니, 그 상사가 더 이상 밉지 않은 것입니다. 신경질을 내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데.. 자기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더 진실한 마음으로 그 상사를 위해 기도해 주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상사는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위대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상사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선으로 악을 갚을 때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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