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자녀들이 부모와 같이 있는 것이 싫어서 방을 따로 얻어서 살아가는 자녀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둘째아들도 집을 멀리 떠나 독립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쓰면서 불효를 행하더니 유산을 건네자 며칠이 안되어 먼 나라로 이민을 갔습니다.
아마도 둘째 아들은 농사 짓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아마 큰 도시에 나가서 장사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팔아서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신명기 21장 17절 재산 상속 분배규정에 의하면 장자에게 전 재산의 2/3를, 차자에게 1/3을 나누어 줄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을 물려 받았을 경우 상속자는 이를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상속자가 그 재산으로 장사를 해서 이익금을 남겼다 해도 그 이익들을 임의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돌려야 했습니다.
한편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 순종하는 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집에서 잘 하면서도 억울하게 느끼고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쌓여만 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당연히 둘째 아들은 불효자식으로 여기고 수근거렸을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아버지에게 더욱 잘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을 가리키고,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킵니다. 둘째 아들은 재산을 창기와 더불어 다 탕진하였습니다. 살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자기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그것도 모자랐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키면서 잘못 살아왔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소록소록 생각이 납니다.
드디어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고 방향을 잡습니다. 물론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이유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그런 결단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아버지 집으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도저히 자격이 없어서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부탁하러 가는 것입니다. 품꾼은 일종의 아르바이트나 비졍규직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부끄러워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실패하고 후회스런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살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이 초라한 모습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회복의 주도권은 아버지의 긍휼하심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자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본래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말했는데 여긴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인즉 그 말을 하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당치도 않은 말을 한다고 가로 막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빠졌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순간 그래 앞으로 잘 하는 것 봐서 아들의 자격 고려해 보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고 둘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시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반을 신기십니다. 아들의 자격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합니다.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즐거워하자.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이렇게 기뻐하십니다.
첫째 아들은 밭에서 일하러 갔다가 집 가까이에서 풍악과 춤 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상속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해서 밭에서 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것입니다. 한 종을 불러서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있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 종이 대답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서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당신의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첫째 아들은 분노가 치밀어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고 첫째 아들에게 그만 집에 들어가자고 권면합니다. 그때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섭섭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내가 그동안 아버지의 말씀이면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있습니까? 그는 아들의 자격으로서 섬기지 못했습니다. 나한테는 지금까지 염소 새끼라도 잡아서 내 친구들과 즐기게 하신 적이 한 번도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탕진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십니까? 자기 의를 내세우는 우월감과 자만심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을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러한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내적으로는 오히려 그가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자기 동생을 향하여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사랑의 관계를 느끼지 못합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께 항변하는 이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첫째 아들이 섭섭해 할만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애야,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잖아. 내 것이 다 네 것이잖아.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나한테 뭐 해준 게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헤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첫째 아들은 자신은 대우를 받는 것이 마땅한데 왜 나한테는 그렇게 해주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편애한다고 불만을 터트립니다. 두 아들 모두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들을 잃어버리면 가장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잃어버린 아들일까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일까요? 아버지를 떠난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주님은 더 고통을 당하십니다. 셋째 아들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을 비교하면 누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까?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둘째 아들과 비교해서 억울하다고 투정을 부리는 것입니다. 자기 동생이 사고 치고 돌아왔지만 보고 싶은 마음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도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하면서 신범생인 것 같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훨씬 악한 죄인으로 여기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얼쉽게 분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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