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에게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 속하여 세상 풍속을 따를 때에는 어두움에 속하여 열매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 참 빛으로 오신 우리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작은 빛들이 되었습니다. 빛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제 우리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착함”이란 ‘일종의 관대한 정신으로 온유하고 도덕적인 성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인격적인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의로움”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공정하고 올바른 삶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은 곧 이웃과 형제들에게도 인정받는 삶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로마서 14: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우리가 빛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진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게 착하게 사는 것입니까?
'착하다'는 말은 관대하고 온유하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삶을 말합니다.
내 욕심만 챙기려는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 줄줄 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착함은 곧 하나님의 성품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선함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그리스도인은 관용한 사람입니다. 모나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가 무서운 것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중심적인 사람,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합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입니다. 그는 자기의 욕심, 자기의 소원을 채우려고 하고, 그 욕심을 채우면 그것으로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이웃을 만나게 될 때,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하고, 악한 것을 막아 주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한 사람 착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라고 하면서 화목케 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아마 이러 저러한 뜻이었을 거야”라고 하면서 긍정적입니다. 밝고 명랑하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원망 불평을 일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착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합니까?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도저히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말 듣고도 가만히 있어?”라고 하면서 불화케 합니다.
부정적입니다. 매사를 비뚤어지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평, 불만, 원망을 일삼습니다. 착하고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은 접촉하는 사람도 서서히 감화시킵니다. 그러나 착하지 않고 부정적인 그리스도인은 접촉하는 사람도 서서히 물들어 가게
합니다. 우리 모두 악하고, 나쁘게, 비뚤어지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고,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힘쓰십시다.
간교함이나 간사스러움이 없는 착하디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힘쓰도록 하십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의롭게 사는 것입니까?
빛의 열매 두 번째는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이란 법적인 개념을 가지게 하여 준다는 의미에서 선함과 다릅니다.
‘의’란 법적으로 준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착함보다는 더 좁은 의미를 갖습니다.
벽돌을 쌓을 때, 혹은 문을 세울 때, 수직으로 잘 서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림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의’의 개념을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판단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코 자기의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눈치나 경험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정당한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에 의해서 판단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누군가가 말한 시류, 소위 시대 조류를 따라서 살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적인 불의한 수단 방법을 모릅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처세술에
능하다면, 그는 의로움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미련할 만큼, 우직스러울 만큼 곧은 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편견이나 독선과는 결코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의롭게 산다'는 것은 공정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요즘 매스컴을 보면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모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정한 돈을 받아먹고, 큰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회사를 키워왔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신앙인이라고 예외는 아닌 듯 싶습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사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돈을 좀 적게 벌어도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야 합니다. 조금 늦게 출세를 해도 편법을 써서는 안됩니다.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빛된 삶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까?
빛의 열매 세 번째는 진실함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그 안에 속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춘 것이나, 숨긴 것이나, 정직하지 못한 것이나,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이며,
투명하고 명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진실함 때문에 그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너무도 진실치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편 12:1-2에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도다.”고 탄식한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8에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도 중요하지만, 사람 앞에서의 진실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도의 인격, 성도의 언행은
그 나라 그 사회의 양심의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성도의 세계를 떠나, 그 어디서 보다 나은 진실을, 보다 깨끗한 양심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불신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성도의 말 한 마디면 보증수표보다 더 신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세상 사람들은 차치해두고라도, 신자들에게서 마저 불신을 받고 있는 현실이고, 성도들 세계에서도
불신풍조는 만연되어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어떠한 오해나 억측이라도 성도들 끼리 만나서 한 마디 해명하고
밝히면, 그 진실성 때문에 모든 오해가 풀어져야 할 터인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진실치 못한 사람들끼리의 만남에서 무슨 신뢰가 생기겠으며, 무슨 사랑이 싹트겠으며, 어떻게 단합된 신앙 공
동체가 형성되겠습니까? 사랑, 사랑하고 백 번 천 번 부르짖지만,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무조건 경계하는 데서는, 온갖 거짓과 불신만 무성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성이 없을 때, 그 신앙은 생명력이 없는 죽은 것이고, 언행에
거짓이 많을 때, 그 인격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언건대 신앙과 인격의 생명력은 진실한데 있음을 확신합니다.
'진실하게 산다'는 것은 순수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순수한 삶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남을 속이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역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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