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선택했을 때 발생할 세상 염려에 대한 지침(指針)을 교훈한다.
목숨을 위하여 - '목숨'으로 번역된 '퓌스케'는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서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이 '퓌스케'는 죽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10:28).
따라서 이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물질적인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세상 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염려의 늪에 빠지게 되면 인생의 참된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고민하여야 할 대상은 물질적인 문제에 앞서 먼저 영적인 문제여야 한다.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분열되어 영적인 문제를 망각(oblivion)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다. 음식은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지 생명이 음식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생명 그 자체보다는 목숨에 소용되는 음식물에 집착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때가 있다.
새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미래의 자기 생존에 관해 염려하지 않는다. 새들은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다.
이 말씀을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새들도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거두지도 않고'란 말은 먹을 것에 대한 지나친 고민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천부께서 기르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질서있게 경영하고 계신다. 우리는 자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섭리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이것들보다 훨썬 더 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연계 피조물의 창조주이시지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선자는 새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중한 존재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귀하다'란 말의 원뜻은 '다르다', '구분된다'로서 새와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염려한다고 해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키'로 번역된 '혤리키안'은 '신장(身長)의 길이'나 '생명의 길이' 모두를 뜻할 수 있다. 키를 '한 자'나 더 한다는 것은, 신장의 길이를 나타낼 때는 약 8인치 가량 늘인다는 의미가 된다. 어느 누구도 염려함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목숨의 연장(延長) 여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ㅓ. 앞에서 주님은 주로 음식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의복을 통하여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와 부차적 관심사를 구분해 주고 계신다.
들에 피는 풀 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앞 절의 '공중의 새'와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땅과 하늘 그 어디나'라는 간접적인 강조로 이해할 수도있다.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한다. 공중의 새들이 먹을것을 찾아다니되 염려하지 않는 앞 절의 대구적 어구와는 조금 다르다. 즉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이 너무도 보잘 것 없으며, 또한 그 생명까지 짧아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백합화는 길쌈도 아니한다. 인간은 자신의 치장을 위해 '옷감을 짜지만' 그 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만 못하다. 아름다운 백합화의 그 자연스럽고 찬란한 모습은 그 어떤 예술가도 창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며, 그 어떤 디자이너도 그와 같이 꾸밀 수 없는 조화롭고도 완벽한 치장이다.
왜냐하면 꽃 하나 하나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범칙이 숨쉬고 있으며 신적(神的)인 기운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솔로몬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가는 솔로몬의 궁전과 대조되는 황량한 이 들판을 강조하여 들판의 영광이 궁궐의 영광보다 뛰어남을 대비시키는 데
더 강조점을 두었다.
옉수님음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조용히 꾸짖으신다.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不信)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이다. 한편 잠언은 환난날에 낙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잠 24:10),
특히 우리 신자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한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31절에 나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25절과 맥을 같이 하는 명령으로서
특히 본문의 '하지 말라'는 말은 부정 과거 시상으로 표현되어 '조그만치도 염려하지 말라'는 절대 금지(禁止)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무가치해 보이는 극히 작은 것이라도 크나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 이상의 말할수 없는 풍부하신 관심으로 신자들을 돌보고 계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즉 굶지나 않을까 헐벗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과 걱정을 온전히 떨쳐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계속적인 염려는 당신 백성들의 요구를 미리 아시며(8절) 풍족히 채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신자가 세상일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될 몇 가지 있다.
첫번째는 앞에서와 같이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 없이 생활하는 이방인들의 행위와 같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크나큰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갈단해야 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및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된 메시야적 왕국에 대한 복음을 듣고 또 순종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뜻이다. 또한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에서의 칭의(稱義)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께서 줄곧 강조해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내적인 바른 관계를 지니고 외식을 피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선(善)을 행할 것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 '먼저'는 이방인들이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세속적 욕망과 세상적 노력이 모두 이차적이요, 부차적인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정녕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히 선결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결국 경건(piety)에도 자아 중심과 하나님 중심의 두 종류가 있듯이 포부(aspiration)에도 두 종류가 있다. 곧 자신을 위한 포부와 하나님을 위한 포부가 그것이다. 제 3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둘 중 무엇을 먼저 선택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 이 어구의 강조점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판타'에 놓여져 있으며, 이는 언급한 전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필요로하는 모든 종류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포부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영혼의 만족과 평안을 주시며 또 인생의 필요 조건을 충분히 채우신다.
오리겐은 본문에 관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조그마한 것들을 덤으로 주겠노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겠노라'고 말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우리들 마음에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일시적인 지상의 소모품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양식이어야 하며, 신자들은 이방인의 염려의 대상인 먹을 것, 마실 것에 지배받지 말고 아버지께서 이미 필요한 것을 아시는 만큼 주실 것을 믿고 하늘의 뜻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고 추구한 모든 것 위에 '덤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다(딤전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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