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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요엘서 강해집

by liefd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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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 강의, 손석태

 

서론: 여호와의 날

 

1. 제목

히브리어 요엘은 여호와를 뜻하는 와 하나님을 뜻하는 의 합성어이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반대로 엘리야라는 말은 하나님은 여호와이다라는 뜻이다.

 

2. 저자

11절에 브두엘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요엘서에 성전, 제사장, 대중적인 집회, 예루살렘에 대해서 애정 어린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저자가 아마도 유다 사람이요, 예루살렘이지 않을까 추측된다.

 

3. 정경에서의 위치

히브리 성경에서 요엘서는 에스겔서, 호세아서 다음, 아모스 앞에 놓여 있고, 후선지서에 속한다. 한글 성경에는 다니엘서, 호세아서 다음, 아모스서 앞에 놓여 있다. 한글 성경에 구분에 따르면 소선지서에 속한다. 요엘서는 여호와의 날의 선포를 주제로 하며, 성령의 약속을 담은 책이다. 이 비전과 예언은 신약의 오순절 성령세례로 이어진다.

 

4. 저작연대

주전 6세기 포로로 잡혀가기 직전이 가장 적합한 연대로 사료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요엘서 2장은 바벨론에 대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둘째, 33절 하반절에 나오는 유다가 흩어졌다, 나뉘었다 등의 표현은 주전 597년 포로로 사로잡혀간 사건(왕하 24:10-16)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115, 21-11절은 주전 586년의 유다 최후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다(왕하 25:1-21).

 

넷째, 요엘의 여호와의 날이 주전 586년의 성전파괴를 언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5:17).

 

5. 저작목적

첫째,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둘째 유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여호와의 완전한 회복을 약속하고 선포하기 위함이다.

 

요엘서 1장은 앞으로 있게 될 역사상 전무후무한 메뚜기 재앙에 대해서 말하고, 이에 대비해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울며,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다.

 

1장 울어라 부르짖으라

1: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있었던 여호와의 말씀(마소라 사본 번역),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개역성경)

 

2-4: 여호와께서 백성을 향해 그의 말씀을 듣고 말하라고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은 첫째로 늙은 자들이다. 둘째는 땅의 모든 주민들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할 대상은 다른 아닌 그들의 자녀들이다. 너희는 이 일을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그 자녀는 후시대에게 고할 것이니라.“ 자손 대대에 걸쳐 여호와의 말씀을 알려주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역사를 아는 백성들이었고,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민족적인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4절 : 말해야 할 내용, 메뚜기의 재앙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은 성경에 언급된 아홉 종류의 메뚜기 중 네 종류를 언급하고 있다. 팟종이, 메뚜기, , 황충이 등은 모두 메뚜기의 일종으로 갉아먹는 메뚜기이다. 메뚜기 재앙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네 번이나 반복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 메뚜기가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괴롭히는 대적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네 종류의 메뚜기를 이집트인, 앗수르인, 헬라인, 로마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엘서 1장의 메뚜기 재앙이 실제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요엘서의 메뚜기 재앙은 침공해 오는 바벨론 군대에 대한 1차적인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메뚜기 재앙은 이미 출애굽기 102, 6절에서도 나왔다. 여호와께서 애굽에 내린 여덟 번째의 재앙이다. 하나님께서는 메뚜기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신명기 2838, 42절에는 여호와의 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저주로 메뚜기 재앙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성경에서 메뚜기 재앙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보여주기도 한다. 요한계시록 92-12절을 보면 여호와의 날에 황충, 곧 메뚜기가 무저갱에서 올라온다, 황충은 전쟁하는 자처럼 무장을 하고, 군마를 타고, 금관을 쓰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빨은 사자의 이빨처럼 강하고, 머리털은 여자의 머리털과 같고 가슴에는 철호심경을 달고 어깨에서는 소리가 난다. 무갱의 사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늙은이들과 모든 백성들은 다가오는 메뚜기 재앙에 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후손들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울어라(1:5-13)

메뚜기 재앙이 다가오는 이때에 여호와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향해 울라 고 하신다. “너희는 울지어다라는 말이 5절에 두 번, 8, 9, 11절에 언급되고 있다.

 

메뚜기가 와서 모든 곡식을 먹어 치워버리고 남은 것이 없는 황폐한 상황 속에서 어느 누구인들 울지 않을 수 없다. 본문은 울어야 할 사람들과 그들이 울어야 할 이유를 열거하고 있다.

 

첫째, 취하는 자들아 울어라(5-9)

 

5절은 취하는 자들과 포도주를 마시는 자 너희는 울지어다너희는 곡할지어다가 서로 병행하여 표현되어 있다.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상징이다. 반면에 기근은 심판을 상징한다. 포도주를 마식도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인생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포도주를 마실 수 없게 될 것이다. 단 포도주가 그들의 입에서 끊길 것이기 때문이다.

 

6-7절은 포도주가 그들의 일에서 끊기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여기서 말하는 한 다른 민족은 메뚜기를 말한다. 메뚜기는 그 수가 많고 파괴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전쟁을 하러 쳐들어오는 만족에 비유된다. 225절에 여호와께서 이 메뚜기 떼들을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도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다.

 

또한 메뚜기 떼들은 사자와 암사자에 비교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메뚜기를 강한 이빨로 온갖 동물들을 잔인하게 찢어발기는 사자에 비유한 것이다. 메뚜기들은 풀이나 잎사귀만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밑둥치나. 가지의 껍질까지 벗겨 먹기 때문에 그들이 지나간 자리의 가지는 모두 하얗게 돼버리고 만다.

 

12절은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재앙이 몰려오고 있지만 사람들은 포도주에 취해서 비틀거린다. 자신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게 엄청난 재앙이 몰려오고 있지만 감지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탐닉하고 술독에 빠져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울고, 곡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이들은 정신을 차리고 재앙의 심각성을 깨닫고 눈물을 흘려야 할 사람들이다.

 

8-9절은 술을 마식도 취한 자들이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같이 할지어다.” 고대 셈족 사회에서는 부모들이 자식들의 배필을 정했다. 그런데 뜻밖에 정혼한 남자가 죽어버리는 경우 정혼한 처녀는 결혼도 해보지 못하고 과부 신세가 되어버린다. 면사포를 쓰고 신방을 꾸며야 할 처녀가 갑자기 상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운명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하고 처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오열을 삼키고 통곡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술 취한 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처녀의 심정으로 울라고 말씀하신다.

 

둘째, 농부들아 울어라(9-12)

9-12절은 황폐해진 논밭을 보여주며 농부들에게 울라고 한다. 먼저 요엘은 시선을 여호와의 전으로 돌려 제사장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 첫 열매를 제일 먼저 여호와께 드리고 소득의 십일조를 냈다. 제사장들은 아침 저녁으로 그것을 하나님께 소제와 전제로 드리고 그 남은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이제 더 이상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없게 된다.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가 끊어진 것이다.

 

포도나무가 시들고 무화과나무가 마르고 석류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은 모든 나무가 시들어버린 상황 속에서 인간에게 무슨 희락이 있겠는가? 농부는 이 황폐한 밭을 바라보며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도원지기는 통곡하게 된다(11). 12절을 보면 인간의 희락이 말랐다고 했다. 이제 먹을 것이 떨어진 상황이 되다 보니 인생 가운데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셋째, 제사장들이 소제와 전제가 끊겨 슬퍼한다.

13절은 제사장을 향해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퍼 울지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을 가리켜 제단에 수종드는 자,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라고 하며 이들에게 슬피 울며 밤이 새도록 누우라고 말한다. 제사장들에게 성전에서 밤샘을 하라는 말이다.

 

부르짖으라(1:14-20)

1) 금식을 선포하라(14)

첫째 여호와께서는 금식일을 정하라고 하신다.

 

먹고 마시고 취한 사람들에게 이제는 울며 금식을 섬포하라는 것이다. 금식은 영적인 은혜를 구하기 위해 물질적인 음식을 먹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열어 놓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다. 그래서 금식에는 기도, 슬퍼함, 회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함, 경건 등이 포함된다.

 

둘째, 금식은 회개의 표현이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고난을 당할 때 함께 모여 금식하고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때 금식을 한다.

 

셋째, 금식은 경건의 훈련이다.

 

금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때 위선으로 보인다(6:16-1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생활은 이사야 583-6절의 위선적인 행위보다는 오히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2) 성회를 소집하라(15)

금식을 선포한 후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성회를 선포해 장로들과 이 당의 모든 주민들을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는 것이었다. 성결의식에 따라 명절을 준비하기 위해 모든 일을 멈추고 사람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왕하 10:20).

여기서 말하는 성회는 죄인들이 스스로 성별하고 여호와게 나와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모임이다(29:35).

 

3) 여호와께 부르짖으라(15-20)

금식하며 성전에 모여서 이들이 할 일은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이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여호와께 나아와 자신의 힘든 형편을 불평하며,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첫째, 여호와께 대한 불평(15-17)

 

여호와께 대한 불평은 오호라라는 탄식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재앙의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부른다. 재앙으로 말미암은 멸망의 진원지가 바로 여호와시며,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일의 주관자이심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악의 세력, 특히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입제하는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의 날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다만 대적하는 이방인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언약 백성에게도 임한다.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은 그의 언약 백성의 존재를 위협하는 날이다. 그러나 회개함으로 이날은 심판의 날이 아니라 축복의 날로 바뀔 수 도 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날도 일종의 여호와의 날이다(주전586). 이 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먹을 것이 끊어지고, 씨가 썩어버리고, 곡식이 시들었다. 창고는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다. 하나님의 전에서는 더 이상 기쁨과 즐거움이 있지 않다(16).

 

둘째, 여호와께 대한 기도(18-20)

 

금식을 선포하고 성전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딱한 형편을 여호와께 불평하며 현 상황을 아뢰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로 시작되는 이 기도는 20절에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덕거리오니로 끝난다. 가뭄이 몰려오고 그로 말미암은 기근이 덮쳤다. ‘들짐승도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생물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함축하고 있다.

 

 

이상을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메뚜기 재앙의 주관자이시다. 가뭄과 기근을 주관하는 분이시다. 여호와께서는 창조주로서 그의 백성에게 때를 따라 비를 주고 양식을 주며, 모든 악한 짐승이나 이방의 적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보호하는 분이시다.

 

그러나 본문의 여호와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의 백성에게서 양식을 빼앗아 굶어 죽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주어 기근과 한발로 사람은 물론 짐승까지도 다 배고프고 목말라 죽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왜 그런 재앙을 내리시는지 정확한 이유는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역사적인 정황을 미루어 볼 때 그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언약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까닭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복만 주시는 분이 아니다. 제앙도 내리시는 분이시다. 주신 축복을 언제라도 거두고 적신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1:21).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본문은 재앙의 날이 다가오기 때문에 금식을 선포하고 성화로 모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한다. 금식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슬퍼하며 울고 금식함으로 자신의 육체적 소욕을 죽이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경건에 힘쓰는 행위다. 하나님의 백성은 부요할수록 경건해야 한다.

 

2강 여호와의 날(2:1-32)

 

요엘서 2장은 여호와께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고 공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때에 이 땅 거민들은 놀람과 두려움 속에서 낯빛이 하얗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회복을 약속하신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1. 군대를 이끌고 나오시는 여호와(2:1-11)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함을 알리는 나팔소리로 시작한다. 이 나팔소리는 여호와의 거룩한 산, 시온으로 퍼져나간다.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해 오시는 것이다.

 

1) 여호와의 날(1, 11)

"여호와의 날"은 나팔과 호각 소리로 시작된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그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땅 거민들에게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어두운 날이다. 어둡고 캄캄하며, 빽빽한 구름이 낀 날이다(2).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는 날이다(10). 어둡고 캄캄한 날은 심판의 날이다. 이 날은 땅이 진동하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은 세상에 어둠이 임하는 하늘의 천기변화가 일어나는 날일뿐만 아니라, 땅이 진동하고 불과 화염이 온 땅을 뒤덮는 날이다. 그날에는 지진도 일어나고 산사태나 해일도 광풍도 일어날 것이다. 특히 3절에 보면 많고 강한 백성이라고 일컫는 여호와의 군대에 앞서 불이 땅을 가르고, 불꽃이 그들의 뒤를 따르며 태운다. 여호와의 날은 불이 세상을 태우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천군 사령관으로 하늘의 군대를 지휘하고 공격하는 날이다. 본문은 많고 강한 백성이 군대의 대열을 짓고, 성읍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4-6, 7-9) 이들을 총지휘하고 있는 자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11절은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라고 적고 있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천국 사령관으로서 그를 지휘하며 대적을 향해 진군하고 공격하는 날이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집행하는 날인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군대가 오는 이 여호와의 날을 가리켜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1:11).

 

2) 천군 사령관, 여호와(11)

성경은 여호와의 전쟁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 여호와는 전쟁의 신이다. 하늘에서는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지상에서는 이스라엘을 그의 군대로 선택하셨다(6:26, 12:41).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이 잘 순종하고 따를 때에는 그들을 위해 싸우시지만, 배반할 때는 다른 민족을 택해 그의 백성을 공격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실 때는 우박이나 천둥번개, 폭우 등을 천군으로 이용해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은 다만 노략물을 탈취하게 하신다. 요엘서의 메뚜기도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을 공격하기 위해 부리신 여호와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는 여호와께서 앗수르와 바벨론을 그의 군사로 부리셨다. 이렇듯 여호와께서는 신적 천사 혹은 천군 사령관으로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신다.

 

첫째, 여호와의 군대가 진군하는 모습

 

4-6절은 여호와의 군대가 진군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모양은 말과 같다. 달리는 모습은 기병과 같다.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마치 병거가 평지를 달리는 소리나 들풀이 불에 타는 소리 같다. 강한 군사다. 전투태세를 갖추어 줄을 벌이고 싸우는 모습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무장한 군병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백성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둘째, 여호와의 군대가 공격하는 모습

 

7-10절은 4-6절에 이어 여호와의 군대가 공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달리는 모습은 용사와 같다. 성을 기어오르는 모습은 무사와 같다. 그들은 각기 자기 길을 가고 줄을 이탈하지 않는다. 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 적과 대면하지만 피차에 부딪히지 않는다. 적군의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지만 상하지 않는다(8). 뛰어 들어가며 성 위를 달린다. 성읍을 공격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순식간에 집에 뛰어들고 창문으로 들어간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여호와의 군대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들 같다. 장애물을 통과해 버린다. 장애물을 통과하면서 전혀 상처를 입지 않는다. 세상에 이들을 당할 자가 없다.

 

셋째,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이상을 살펴볼 때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그의 천군을 몰고와 그의 대적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날이다. 본문에 여호와의 군대는 마치 인간의 군대로 묘사되어 있지만 인간 이상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군대다.

 

\1장에서는 메뚜기 재앙을 기술하고 있으며, 2장은 1장을 근거로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곧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세상을 심판할 날을 그리고 있다. 이 날은 이리 이루어진 점도 있고, 또 앞으로 이루어질 날도 있다. 말일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도 분명히 우리가 맞을 수밖에 없는 여호와의 날이다. 그날도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21:10-28, 24:3-21, 13:3-27).

 

2. 회개를 촉구하시는 여호와(2:12-27)

21-11절은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의 대적을 심판하기 위해 내달려오는 여호와의 날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개서는 이 날을 대비해 그의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요엘을 통해 촉구하신다.

1)내게로 돌아오라(12-14)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향해 12절에서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13절에서는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라고 간청하신다.

 

첫째, 돌아오는 시기 / 이제라도(12)

 

여호와께서는 이제라도...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이르지 않다. 하나님께 돌아가야겠다고 느끼는 그때에 바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둘째, 돌아올 준비 / 금식하고(13)

 

여호와께 돌아오기 위해 금식하라는 말씀이다.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12)고 말씀하신다. 울며 애통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슬퍼하는 행위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라는 표현은(14 :2, 5:4, 21-24) 단순한 제사나 외면적인 경건이 아닌 진정한 회개를 하라는 뜻이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과 뜻을 돌이키는 것이다.

 

셋째, 돌아오는 자에게 주시는 여호와의 약속 /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13).

 

여호와의 성품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분으로 그려진다(34:6-7, 4:2). 여호와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에 그에게 돌아오는 자에게는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는 주님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켜 그 뒤에 복을 내리시고 하나님께 다시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시지 않겠느냐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제사를 드릴 수 잇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한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은 회개하는 자를 받아들이고 아니하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에 속한 문제이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기계적으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든가. 인간의 회개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2) 성회를 소집하라(15-17)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는 것이다. 이 나팔은 1절과 달리 사람이 부는 나팔이다.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를 몰고 진군하시므로 파수병으로 하여금 나팔을 불어 백성들이 경계하도록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나팔이 울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성회로 모이라.

 

성회에는 어른으로부터 시작해 어린아이, 심지어 젖 먹는 아이까지 다 포함된다. 예외 없이 급히 모이라는 것이다(16). 젖 먹이는 어머니(삼상 1:21-24, 왕하 11:2-3), 갓 결혼한 신랑은 적어도 1년 동안은 모든 종교적인 의무나 국가적인 의무를 면제받도록 율법에 정하고 있다(20:7, 24: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소집하라고 하신다. 그만큼 여호와의 날이 급박하게 차별없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둘째, 성회를 거룩하게 하라

 

성회를 거룩하게 하라는 것은 성회를 특별히 구별하라는 뜻이다. 일상 모이는 성회가 아니라 특별한 목적과 특별한 마음 자세로 모이는 성회를 뜻한다. 여기서는 회개하고, 하나님이 임박한 심판에 대해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성회다. 각 사람의 마음이 간절하고 거룩해야 한다.

 

셋째, 성회에 기도하라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울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가(17).

 

그의 기업인 주님의 백성을 이방인들에게 넘기지 말라는 것이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다. 이러한 기도는 시편 423, 10, 7910, 1152, 미가서 710절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주님의 명예를 붙들고 하는 기도다.

 

3. 회복시키는 여호와(2:18-30)

모든 백성이 성회로 모여 금식하며 울며 기도할 때 여호와는 그 기도를 들으신다. 18-29절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첫째로 메뚜기 재앙으로 말미암아 황폐된 땅과 백성들의 생활을 회복하는 것이며 둘째는 황폐한 백성들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회복이다.

 

1) 육체와 만족을 주시는 여호와(18-27)

첫째, 곡식과 평화를 주시는 여호와(19-20)

 

여호와의 회복은 그의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먼저는 곡식과 새 포도주의 기름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19). 메뚜기 재앙으로 황폐화된 토지를 회복시켜 다시 곡식이 나게 하고, 포도와 올리브가 생산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들을 침략했던 북쪽 군대들을 멀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신다는 약속이다(20).

 

출애굽 때에 애굽 군대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처럼 그들도 동해와 서해로 빠져 들어가며, 거기서 송장이 썩는 악취가 올라올 것이라고 했다. 거기서 송장이 썩는 악취가 올라올 것이라고 했다.

2)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여호와(21-27)

21절에 보면 땅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하신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22절에서는 들짐승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들의 풀이 싹이 나서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기 때문이다.

 

23-27절에서는 시온의 자녀들에게 기뻐하라고 외친다.

 

그 이유는 첫째 여호와께서 이른 바와 늦은 비를 예전처럼 주시기 때문이다(23). 이른 비는 10-11월에 내리는 비를 말하고, 늦은 비는 3-4월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둘째, 밀과 포도주를 풍성하게 주시기 때문이다(24). 마당에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포도주와 기름이 넘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적절한 때에 비를 주신 결과다.

 

 

 

요엘서, 김서택

 

1

 

요엘 선지자는 본론을 이야기하는 대신 사람들의 관심부터 모으고 있습니다. 지금 요엘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먼 과거까 기억하는 노인들도, 이방 어떤 사람들도 경험하지 못하고 들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잔뜩 긴장시킨 다음에 하는 말이 무서운 메뚜기 재앙이 여러번 닥쳐서 유다 땅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어린 메뚜기부터 늙은 메뚜기까지

 

메뚜기 재앙에 대해 예언하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듣고 현재의 잘못된 영적상태를 고치려는데 있습니다. 예언은 운명이 아니라 삶을 고치면 피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메뚜기의 공격은 유다 땅 전부를 초토화, 그중 제일 타격을 입는 것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입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 전제는 포도주로 드리는 제사인데 드릴 수 없게 됩니다.

 

요엘 선지자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축복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실 것과 철저한 파멸이 올 것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요엘은 앞으로 논이나 밭에서 수확의 기쁨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렇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편안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설교를 듣기 싫어했습니다. 죄에 관한 말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알려줍니다. 언약의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으로 나갈 때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성실하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변할 정도로 하면 안됩니다.

 

제사장은 당장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감수하고 앞으로 닥칠 결괴를 내다보고 미리 바른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자꾸 경고의 나팔을 불어서 파멸이 오기 전에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합니다. 교인들은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서 성공한 사람을 별로 못본 것입니다. 말로는 믿음으로 복 받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인정도 받고 성공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은혜가 없어지면 안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초조해지고 신경질적이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한 사람도 예외없이 유다백성들이 하나님께 모여 회개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없었다고 부르짖지 말고 제물이 없어서 제사가 중단되었다고 부르짖지 말고 자신들 가운데 은혜가 사라지고 성령의 역사가 소멸된 것을 두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참된 회개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래 있었어야 할 위치와 가졌어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거기서 얼마나 멀리 떠내려왔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눈물이나 애통이 나오지 않습니다. 무회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없어졌다고 우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제사장들이 바른 말씀을 가르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요엘은 삼중으로 회개를 촉구합니다. 제사장들이 울지어다. 단에 수종드는 자들이 곡할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밤이 맞도록 울지어다. 제사장부터 누워서 통곡하며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참된 회개에 필요한 것은 겸손을 되찾는 것입니다. 유다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은 그들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베옷을 입고 금식일을 선포하라는 것은 참된 겸손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참된 회개에 필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생활을 바꿀 것인지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것입니다. 왜 위기가 생겼습니까? 하나님보다 덜 중요한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방법으로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정직하게 나아갑니다.

 

2. 어두운 여호와의 날(1:15-2:11)

유다 백성들에게는 학수고대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날이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오기는 올 텐데, 그날은 그들의 기대처럼 밝고 복된 날이 아니라 어둡고 캄캄한 날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는데 싹이 나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흙덩이를 들추어 보니 씨가 다 썩어 있습니다. 망연자실하게 흙덩이를 들고 서 있는 농부의 모습을 배경으로 양식을 먹지 못해 울부짖는 가축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선지자가 탄식합니다. 그 탄식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들판에 불이 붙어서 모든 것을 태우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가뭄이 너무나도 극심한 나머지 자연발화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그 모든 것들이 불길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그 불길이 다 사그라 들기도 전에 엄청난 군대가 몰려오는 바퀴소리, 창날 부딪히는 소리가 산을 타고 내려옵니다.

 

여호와 날의 성격

115절부터 211절까지 주제는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115절에서는 오호라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라고 하면서, 앞서 말한 메뚜기 재앙은 우연히 닥친 불행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은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떻게 할지니라고 하면서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유대 백성들이 기다리던 밝고 유쾌한 날이 아닙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몰랐던 것이 무엇입니까? 불의를 행한 자들은 자기 자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바로 자기 자신들이 멸망하는 날이라는 사실입니다.

 

메뚜기 재앙은 우연히 닥친 재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판의 서곡입니다. 반복적으로 유다 땅을 휩쓸고 간 메뚜기 떼의 공격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강한 원수들을 끌고 와서 그들을 모두 진멸하시기까지 그 진노를 거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되겠다고 싶을 때 어려움을 주십니다. 그 어려움은 지금 그 길은 바른 길이 아니니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의 묘사

여호와의 날에 대한 묘사는 오호라 그날이여라는 애통의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오호라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으로서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라(1:15).

 

16절을 보면 그들이 아직도 메뚜기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즉 메뚜기 재앙에서 채 회복도 되지 않았는데 짐승들의 헐떡이는 소리가 들립니다(1:20).

 

23절은 이 가뭄이 그치기도 전에 들불이 일어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싹 가문 땅에 자연적으로 불이 붙어서 온 땅을 태우고 있습니다(2:5).

 

아주 놀라운 기동성을 가진 군대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바벨론 군대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 군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26절과 7절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그들이 용사같이 달리며 무사같이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그들은 아무 집이나 마구잡이로 들어가서 노략질하고 약탈합니다(2:9). 그들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하늘도 빛을 잃고 밤에도 별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2:10). 이것은 메뚜기 공격을 당할 때 이미 겪어본 상황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 군대를 지휘하는 대장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2:11). 여호와께서 메뚜기도 불러오시고 가뭄도 불러오시고 들불도 불러오십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바벨론 군대를 불러오시는데, 그의 명령이 얼마나 강력한지 아무도 거역할 수 없고 아무도 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유다백성들을 징계하시는 것일까요? 그는 택한 백성을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회복될 때까지 연속적으로 징계하십니다. 못된 짓하는 것도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이지만 교회 한 번도 빠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 없이 미워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더 멀리 떠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유다 백성의 생각이 이렇게 다른 이유

하나님께서는 철저한 파멸과 심판의 날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유다백성들은 부족한 것이 다 채워질 영광스런 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유다 백성들은 신앙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신앙이란 나는 자꾸 없어지고 하나님께 맞추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잘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은 전부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하나 붙드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명분으로만 세워 놓고 실제로는 자기들의 성을 계속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영역을 자꾸 넓히려 했습니다.

 

둘째로, 유다 백성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말씀 없이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내 방식대로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자기 방식대로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면 아무리 연약하고 모자라도 하나님께서 무조건 책임지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방법대로,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사람은 특별히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는 것은 그들이 정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그의 용서와 은혜를 간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과 겸손을 되찾기 원하십니다.

 

참된 회개의 요청(2:12-20)

회개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한 가지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심각한 깨달음이고, 또 한 가지는 그 잘못된 방식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는 결단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언제가 되었던지 간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비극이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절대로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요엘은 유다 백성들에게 회개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2:12).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눈으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회개란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수술하는 것입니다. 수입은 좋지만 문제가 있는 직종을 가진 사람은 그 직업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아주 보고 싶은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신앙적으로 유익하지 않을 때는 그것을 보지 않는 것이 마음을 뽑는 것입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이성교제를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정이 들고 섭섭하다 하더라도 관계를 끊고 다시 만나지 않는 것이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가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멸망이 예정되어 잇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진노를 거두십니다.

 

요엘은 214절에서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우리의 입장에서는 혹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은혜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 입장에서는 혹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반드시 은혜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회개의 실천

요엘 선지자는 215절 이하에서 회개의 실천 방법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거(2:16).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회개운동에 동참시키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유다의 죄는 전체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먼저 회개해야 할 사람은 바로 제사장들입니다(2:17). 죄를 죄라고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이 회개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다가 망하게 되었고, 주의 기업이 열국에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는 일이 생기기 전에 우리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디스림을 받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디스림을 거부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야만적인 지배를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불쌍히 여겨 진노를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하나님의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2:18). 우리가 회개의 걸음을 한 걸음만 내딛어도 하나님의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되 구하기도 전에 흡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유다를 괴롭히는 북편군대를, 메뚜기 떼를 전군은 동해(사해), 후군은 서해(지중해)로 쓸어 넣어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을 때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요엘서 강해, 레슬리 알렌

 

요엘서의 주요내용은 메뚜기 재앙이다.

 

요엘서의 저작 연대는 포로이후 시기의 초기, 경제적 정치적 상처로 가득차 있엇던 시기인 주전 6세기 말로 추정된다.

요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형벌로 말미암는 파멸을 피하도록 회개하고 기도할 것을 강청한다. 선지자는 유다가 동의한다면 메뚜기 때의 재앙은 사라지고 축복이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메시지는 여호와의 날에 관한 긍정적인 약속들로 발전한다. 전통적으로 여호와의 날은 물론 다른 열방들에 대하여 심판을 수행한 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날을 의미했다. 요엘 2:28-32은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인용함으로써 매우 잘 알려진 구절이다.

 

1:1-20 무시무시한 실상에 직면함

1절은 요엘이 하나님의 대언자라는 사실을 간단하게 알려준다.

 

2-4절에서 무시무시한 실상들이 독특하게 제시된다.

 

5-14절에서 선지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이 위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일깨우는 말을 전한다.

 

매일 드릴 희생 제사를 위한 재료들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런 후에 농부들과 포도원 일꾼들에게 도전하는 말이 나오고(11-12), 마지막으로 성전의 제사장들에게 하는 말이 나온다(13-14). 이 메시지는 제사장들에게 성회를 소집하라는 14절로 성큼 나아간다. 그것은 지금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이거나 생태학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라는 것, 공동체의 존재가 자연재해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로 말미암아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요엘이 최초로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백성들 전체의 특별한 응답을 요구한다.

 

요엘서의 핵심 어구인 여호와의 날이 이사야 13장의 인상적인 구절을 인용한 15절에 나온다. 요엘은 전반적으로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모델이다.

 

2:1-11 이것이 여호와의 날이다

이사야 13:6,8,10으로부터 가져온 인용문(각각 1, 6, 10절에 나온다)은 이 단락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사야 13장은 이스라엘의 큰 대적인 바벨론의 몰락에 관한 것으로서 이스라엘에게는 긍정적인 메시지였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멸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실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에 아모스는 인간의 죄가 잇는 곳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여호와의 날을 북왕국에게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다(5:18-20). 나중에 스바냐는 아모스의 통찰을 발전시켜 그것을 남왕국에 적용하였다.

요엘이 하는 것은 스바냐의 색실로 짠 주단에서 나온 실들(1:14-15/2:1-2)을 이사야의 13장의 소재와 섞어 짜서 무시무시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2:12-17 유일한 탈출구-기도

요엘은 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짧은 연애편지를 건내 준다(12). 요엘은 진지하게 회개할 것을 호소하는 말을 덧붙인다. 이러한 회개는 외부적으로 금식과 애곡으로 나타나야 했다. 요엘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호소한다(13).

 

하나님은 악행을 후회하거나 죄에 대한 벌로서 주는 재앙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신다. 때때로 하나님은 아버지의 자격으로 자기 백성들을 징계하셔야 하지만(12:5-11)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근본적으로 인애이며, 시편 103편은 바로 그 인애를 노래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서 전폭적인 순복이라는 반응을 기대하신다(12).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도록 압력을 넣는 수단이 아니라 청원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주권적인 자유에 순복하는 행위이다.

 

요엘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순복의 증거로서 거국적인 기도를 위하여 성전 뜰에 모이도록 청중들에게 강권한다. 그들의 대열에는 갓난아기부터 시작해서 갓 결혼한 신혼부부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위기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예와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24:5).

 

2:18-27 전회위복의 약속들

심판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번갈이 계시하는 요엘의 이중적 메시지는 유다에서 효과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당장 눈앞에 닥친 메뚜기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 떼들을 흩어 멸절시키겠다고 약속한다.

 

하나님은 악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극악한 것도 이기실 수 있다(20, 21). 25절은 요엘서의 전반부의 메시지를 요약하면서 그것을 반전시킨다(1:4, 2:11). 한 해에 거두어드릴 수확물은 잃어버렸지만 그 대신에 하나님은 이제 물질적인 축복은 내리실 것이다(19, 25). 26절 하반절과 27절 하반절에 나오는 위로의 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은 작용하고 있다(27 상반절).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는 요청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아직 실레로 일어나지 않았다. 21절과 23절의 완료시제는 예언적 완료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전 뜰을 떠나 텅빈 들판으로 돌아갈 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갈 것인지를 반문한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을 믿으며(고후 5:7), 하나님이 아직 행하지 않으신 것을 기뻐하라고 요구받는다(5:2).

 

2:28-32 계시와 구원의 약속

하나님의 긍정적인 메시지는 19-27절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영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27절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의 임재의 또 다른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여호와의 날의 심판적 요소는 이미 지나갔으며 오직 그 긍정적 요소의 실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열방들에게 심판은 아직 도래할 것이었다.

 

예레미야 31:34은 요엘서의 동일한 선상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영적인 은사들이 부어질 것을 말한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이 구절들이 성령을 보내심과 그에 따른 이상한 언어적 현상, 첫 번째 수난일에 하늘이 어두워진 이변을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설명했다. 베드로는 유대인 청중들에게 주이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받으라고 권했다(2:14-24, 33, 38-40).

 

요엘 2:28절에서 만만은 유대 민족의 모든 성원들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2:5-11절에서 그것은 베드로위 개종에 의하여 유대인이 되엇던 이방인들을 포함하게 됩니다. 나중에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 즉 유대인과 아방인을 포괄한다고 말했다(10:12,13). 사도행전에서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도래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것은 곧 도래할 것이다.

 

3:1-21 하나님 백성의 다른 점

구약신학에서 여호와의 날은 많은 측면들을 갖고 있다. 그 가장 강렬한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롯한 불의한 세계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특징은 일부분에 속했고, 그 날의 완전한 형태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심판에 뒤이어 행해지는 구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두 번째 요소가 이사야 2:2-4, 45:20-23과 스바냐 3:16-17과 같은 구절들에 등장한다.

 

요엘서, 노우호 목사

요엘이라는 말은 여호와는 엘로힘이다.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단어가 길어지게 되면 앞이 ''로 되든지 ''로 되든지 하고 단어가 짧을 경우에는 앞이 ''가 되지요 예를 들어서 요압, 요엘, 요셉, 요게벳 이런 이름들은 모두 앞에 '여호' 혹은 '야훼'대신에 앞에 접두어 형태로 ''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것을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요엘 선지자에 대하여는 우리가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자체에 기록이 없고 요엘 자신도 자신의 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어느 왕 때 하나님이 말씀이 누구에게 임하였다고 책의 첫머리에 보통 시대를 밝히는 경우가 많은데 요엘서는 그냥 시작하면서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라는 기록이 없어서 많은 학자들이 요엘의 활동시대를 알아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오늘날까지 어느 시대인지 확실히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연대가 불투명한 선지자군요. 그래도 메시지는 아주 분명하고 명료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엘서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4절에 보면 팟종이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결국 다 먹었죠? 실제로 이런 곤충들이 그냥 글자대로 해충에 의한 재앙이냐 실제로 이런 해충들이 농산물을 모두 갉아 먹어서 농사를 헛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으로 그 뒤에 내용이 갉아먹은 후의 결과로 곡식이 모두 말라버렸고 포도주가 끊어진 장면을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거시적인 눈으로 넓게 본다면 유대나라를 괴롭혔던 바벨론과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 이 네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탈 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양쪽 모두 팽팽하게 주장을 합니다만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 즉, 이스라엘의 범죄와 유다의 패역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징계가 임할 때는 물질적인 부분들 즉, 곡식이나 경제에 타격을 주는 경우인데 이것은 1차적 징계로서 가벼운 징계입니다. 이런 징계를 당하게 될 경우,  두 가지 자세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는 정말 잘못한 것을 깨닫고 크게 뉘우쳐 회개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 만약 애통하는 마음으로 눈물로 자복하고 통회하고 돌아오면 때린 분이 오히려 얼마 후에 마음 아파하는 것도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징계를 받을 때 반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을 나가게 되지요? 징계를 사랑으로 보지 않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반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징계를 받고 있을 때 중재 역할을 하실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다가가서 네가 잘못 했잖아! 아빠가 오늘 화가 많이 나셨나 보다. 네가 잘못을 생각해보고 빨리 가서 아버지께 잘못을 용서를 빌어라. 이렇게 등을 떠밀어 아버지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도록 아들을 권면하는 어머니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요엘 선지자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위기를 하나님과 유다나라 사람들과의 영적인 분위기를 빨리 파악해야만 이 성경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도 단어와 글자에 메이지 말고 전체적인 큰 흐름과 또 하나님과 당시 이스라엘사람들과의 관계와 분위기를 파악함으로서 큰 안목으로 성경을 이해 할 수 있겠습니다.

 

대체적으로 예언자들이 외치는 것을 보면 죄를 책망합니다. 예언자가 나타나서 외치는 내용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이 왜? 언약을 멸시하고 저버리고 배반하는가? 이렇게 책망하는 것이 예언자(선지자)의 제1기능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 나타나서 죄를 지적하는 것인데 죄를 지적하는 것은 받는 사람 입장에서 기분이 좋을 수가 없지요. 아무리 잘못을 했다고 해도 책망을 받으면 기분이 나쁘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많은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이고, 톱으로 켜서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면서 괴롭혔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큰 패역한 행위죠 잘못한 것만 해도 두려운 일인데 그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낸 선지자를 죽인 것은 하나님께 대역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보내기 전에 여러 예언자를 보내고 또 보내고 했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메뚜기가 먹어 버리고 황충이 먹고 늣이 먹고 팟종이 먹고 온 산야에 푸른 것이 아무것도 없을 만큼 모든 목초를 껍질까지 모두 갉아 먹어버렸다면 정말 두려운 일이죠. 그래서 회개하기를 바라는데 회개는 하지 않고 자세가 아주 뻣뻣하게 목이 곧게 패역한 자세를 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엘 선지자가 요엘(여호와는 엘로힘이다.) 여호와는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을 때 너희가 맞서거나 반항하면 너희만 죽을 뿐이지 하나님께서 한번 노하시게 되면 크게 두려운 일이다. 이것은 작은 징계에 불과하지만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가까이 왔은즉 뻣뻣하게 반항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이제라도 온 전국에 거룩한 금식일을 선포하고 범국민적인 회개의 운동을 하자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요엘서에 여러 번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랑도 신부도 골방에서 나오고 남녀노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려 회개하고 자복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또다시 긍휼한 마음이 일어나시면서 다시 이 땅에 비를 주시고 곡식을 영글게 하시는 복을 주실 뿐 아니라 그런 후에 정말 진정한 회개다운 회개가 있을 경우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이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넓으세요. 그렇게 노하셔도 회개를 하면 그 노를 거두시려는 것을 보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식이니까 우리에게도 자녀가 있지만 자녀가 아무리 잘못을 하고 미워도 자식은 어찌할 수 없잖아요? 하나님께서도 꼭 같은 것입니다. 창세 이후로 인간이 범죄 한 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심판하셨다면 그야말로 우리는 존재할 수 없지요. 세상에 아무도 생존 할 수 없을텐데 미워도 고와도 자식은 어쩔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피조물이므로 왠만하면 참으시고 노하셨다가도 참으시고 진노하시다가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노하셨다가 회개하려고 하는 어떤 눈치만 보여도 끌어안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아합 같은 못된 사람이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마음이 연연해져서 걸음을 천천히 하고 맥이 탁 풀어지면서 돌이키는 마음이 있으니까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너무 했기 때문에 즉, 모세부터 말라기 선지자까지 기간이 약 1000년이 되는데 우리나라의 강원도만큼 되는 작은 이스라엘 나라가 예언자를 보내면 때려죽이고 돌로 치고 1000년 동안 하나님 속을 썩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단숨에 성경을 읽게 되면 하나님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봐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요엘 선지자를 보내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뉘우치고 통회하고 거룩한 금식일을 선포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회개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를 베푸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고 있는 책이 요엘서입니다. 요엘을 통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중징계를 받을 때 인간이 취할 자세는 진지하게 회개하는 일입니다

 

구약 요엘, 김희보

 

온 이스라엘은 돌아오라(2:12-17)

온 이스라엘을 향한 선지자의 간절한 회개의 권면이다. 여호와의 날은 심히 두렵고 그 앞에 능히 설 자가 없지만 그래도 아직 때는 남아있다고 선지자는 말했다. 이제라도 돌이키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은 반드시 용서하신다고 말했다(12-14).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회개해야 할 것을 권면했다(15-17).

 

그러나 너희는 이제라도, 기회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현재의 회개는 과거의 청산이요 미래의 출발이다. 여호와의 날의 준비는 오직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선지자가 보고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라는 것이었다.

마음을 찢으라는 것은 마음의 죽은 땅을 기경하라(10:12, 4:3). 마음에 할레를 받으라(10:16, 4:4, 2:29)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마음의 가죽을 벤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51:17).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 비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너희 하나님이라는 말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언제나 받아 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이다.

 

뜻을 돌이켜라는 말의 어원의 뜻은 그들의 죄악을 보고 탄식하시며,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슬프게 생각한다는 모든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죄악을 벌하시기 전에 먼저 슬퍼하시며 탄식하신다. 그처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셨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마음을 찢으며 애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사. 혹시라는 단어는 원문에 없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용서하실 것인즉 낙심해서는 안된다는 표현을 강조한 것이다. 5:15절에는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을 본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이제 그들과 같이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을 베푸시며 그 뒤에 복을 끼쳐 소제와 전제를 옛날같이 다시 드리게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소제와 전제가 끊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다는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1:9, 13). 그러나 마음을 찢고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용납하시거 저들에게 복을 주어 재물을 풍성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2:15-17

앞 절에서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며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한 말씀과 연결된다.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성회에 모이되 모든 백성, 모든 계층의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한 마음 한 뜻, 한 몸이 되어 모두 모여 나올 것을 명령했다. 특별히 제사장들은 그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해야 할 것을 명령했다. 여호와의 날의 환난을 위해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먼저 제사장들의 회개와 중보의 간구이다(17).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죄를 보고 자기의 죄로 회개하며 용서를 간구해야 했다. 제사장들이 낭실과 단 사이에서, 즉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울며 기도해야 했다. 누구보다도 먼저 제사장들이 울어야 했다. 범죄한 백성들 앞에서 필요한 것은 제사장들의 회개의 눈물이었다.

울며 이르기를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제사장들이 간구할 것은 오직 하나님이 긍휼뿐이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이 긍휼 때문이다.

 

다음은 하나님이 언약을 위한 간구이다.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하여 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소서.” 이방의 지배를 받지 않게 하시고, 이방의 조롱거리가 되지 말게 하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기도이다. 이방인들로 하여금 우리로 인하여 욕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중보의 역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성취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담대히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벧전2:5, 9). 우리는 가정의 제사장(고전7:14), 나라와 민족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할 사명이 있다.

 

하나님의 긍휼과 약속

2:18-20은 제사장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긍휼이 어떻게 그들에게 임하고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기록되어 있다.

 

그때에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하심을 입게 된 것이다. 그때에 여호와께서는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중심이 뜨거우시다는 표현은 큰 열심과 강한 질투를 말한다. 여기서 질투는 남의 행복과 업적을 질투하는 그러한 불의한 심사와는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자기에게로 돌아와야 할 영광이 다른 우상에게 돌아가게 될 때에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혹은 자기 백성이 이방에게 압제를 당하거나 유린당할 때에 나타나는 의분을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땅을 위하여 의분을 나타내며 질투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거룩한 언약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다. 비록 그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 원수들의 학대를 당했다 하더라도 이제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학대한 원수들에게 의분과 진노를 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이스라엘의 참 소망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과의 언약에 있고, 하나님의 선택에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그처럼 중심이 뜨거워졌다는 말은 자기 땅에서 받아야 할 영광을 원수들에게 넘겨질 때 그것을 질투하신다는 말씀이요, 또 자기 땅을 위하여 열심을 다하신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자기 땅이라고 한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요,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는 축복의 땅을 의미한다(11:12).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그들의 축복을 잃어버렸으나, 그들의 회개는 마침내 축복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인데, 하나님의 열심히 그것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결과는 재난이 지나가고 하나님이 복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다.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이 말씀은 1:10의 메뚜기의 재난을 연상케 한다. 거기에는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여기서는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은 영적 육적 모든 축복을 상징한다. 지난 날의 밭은 황무했으나 이제는 풍성하게 되리라. 토지가 처량했으나 이제는 기름지게 되리라.

 

지난 날에는 소제물과 전제물이 없으므로 제사장들이 슬퍼했으나, 이제는 풍성한 곡식과 새포도주와 가름을 인하여 온 백성이 흡족하여 하리라. 백성들의 회개와 중보의 기도는 지난 날의 무서운 재난의 날들을 기쁨의 날로 변화시키는 말인데 이는 여호와의 긍휼을 다시 받게 된 때문이다(1;17). 내가 다시는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하신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요, 이에 앞서 적군들은 멀리 몰아내버릴 것이다.

 

2:20 내가 북편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며...이스라엘의 원수, 북방에서부터 침략해 올 앗수르와 바벨론이 어떻게 망할 것을, 메뚜기 떼들의 멸망을 통해 보여준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수들을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크게 범죄하므로 그들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징계의 도구가 되었던 원수들을 하나님께서 큰 징벌로 다스리게 될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악한 마음으로 힘을 내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더했기 때문이다(1:14).

 

메마은 땅이란 물 기운이 전혀 없는 사막을, 적막한 땅이란 심한 두려움과 고독으로 인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환경을 의미한다. 쫓아낸다는 것은 피할 길이 전혀 없다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징벌을 의미한다.

 

아라비아 사막에서부터 강한 동풍으로 몰아내어 전군은 동해는 사해를(34:3, 47:18), 후군은 서해는 지중해를 가리킨다. 물론 북방의 원수들인 앗수르와 바벨론 군대들을 사해와 지중애에 몰아넣어 수장한 일은 없다. 이는 원수들의 완전한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17:14, 37:36). 이같이 원수들이 진멸한 것은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2:21 땅이여 두려워말고 기뻐하라, 즐거워하라(의의 교사를 주시리라는 약속)

 

땅이 진동하여 떨어야 할 여호와의 날은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날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큰 일이란 먼저는 의의 교사로 임하실 메시야의 탄생이요, 그 후에는 만인에게 부어질 성령의 강림이시다(28).

 

2:22 들짐승아 두려워말지어다 들의 풀이 삭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도다

 

앞에서는 들짐승들이 꼴이 없어 탄식하며 헐떡거렸으나 이제는 그 들짐슬도로 인해 두려울 것이 없다. 지난날에는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했으나 이제는 들의 풀이 싹이 나며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앞에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말갛게 벗겨져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으나(1:7), 이제는 그것들이 다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본절은 2:28절과 더불어 요엘서의 두 개의 큰 약속이다. 228절이 오순절 성령감림의 약속이라면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약속이다.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먼저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후에 성령을 보내시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같이 큰 일을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라,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먼저 은혜의 비를 내리시겠다고 하셨다. 그가 너희에게 교사를 주시고(NIV).

 

오실 그리스도는 의의 교사, 자기의 백성을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오시는 교사, 다니엘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의가 드러나리라(9:24), 이사야 선지자도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담당케 하시리라(53:11).

 

2:24 마당에는 밀기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은혜의 시작이요 완성입니다. 그 결과로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실 때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네 토지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리라(7:13, 11:14)고 하셨다. 사실 밀은 보리보다 값진 것으로 모든 곡식을 대표하는 최고급의 곡물이다. 단순히 물질적 축복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오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받은 신령한 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25 내가 전에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횟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하여 나의 보낸 큰 군대, 이제 겸손히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그 갑절로 갚아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것을 여러 해로 계산하여 배나 갚아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함을 받게 될 때는 그 모든 죄로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4:2). 우리가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고 잃어버린 것이 많다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그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그 잃었던 것을 도로 찾을 뿐 아니라 새러운 복을 배나 더 받게 될 것이다.

 

2: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만족할 것이요)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먹어도 만족함이 없고 배부르지 않으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징계의 한 방법이다(26:26, 4:10, 6:14, 1:6). 죄인들은 먹고 배부르면 그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13:6, 8:12-14). 사람이 먹고 배불러 마음에 만족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벌써 큰 복을 받은 증거다. 육신이 복을 받고 영혼이 만족해 한다는 것은 큰 은혜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놀라운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셨고, 마침내 의의 교사가 되는 메시야를 보내어 주시고 드디어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찬송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이 계속 순종하면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26:12, 11:8, 30:22). 이제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의의 교사를 보내어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를 베풀고, 그후에 성령을 베풀어 네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렇게 놀라운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는가? 이러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친히 계셔서 그들의 돕는 자가 되고 구원자가 되시리란 말씀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히브리어 원문은 임마누엘이다. 이것은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약속이요,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인정했지만, 그 밖에도 여러 신들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유일신이 아니라 혼합종교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2:28-32 성령 강림의 약속

 

2:28이하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진리의 눈이 열려 이상을 보게 되고(28-29), 또 심판의 날, 즉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그들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보여 준다(32)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후에란 그리스도의 초림이 있은 후를 의미한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초림이후를 말세로 표현하고 있다. 오순절의 성령감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만민이란 모든 육체, 즉 남녀의 구별없는 모든 자녀들, 연령과 계급에 관게 없는 늙은이와 젊은이들들과 남종과 여종들, 모든 나라와 종족을 초월하여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자들(2:39)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리라 하셨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부어주신다는 것은 풍성하고도 충만한 성령의 교통을 의미한다.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이 말은 예언할 것이며(2:17), 누구나 다 은혜를 받아 여호와를 알게 되고(31:34), 직접 여호와의 말씀을 통하여 교훈을 받고(54:13),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잇게 됨을 말한다.

 

2:29-30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남종과 여종들에게까지라고 말함으로써 남종과 여종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성령은 그 누구에게나 어떠한 차별도 없이 주어지리라는 말씀이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남종과 여종은 이방인 출신들이다. 아직 신분의 변화는 그들에게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같이 부어짐으로 차별없는 큰 축복에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놀라운 약속은 오순절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참 해방과 기쁨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했다.

 

30절에 내가 이적을 하늘과 당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기둥이라.

 

이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에서의 체험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남종과 여종들에게 성령이 부어지리라고 하는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새로운 출애굽을 의미하며, 신약교회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피와 불과 연기가 택한 자녀들에게는 구원의 날을 의미하나 불신세계에서는 무서운 심판을 의미한다. 심판의 두려운 날은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으나(16:8), 그 심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21:25-26, 21:9-11).

 

2:31-32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서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으로 누구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10:13).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자는 예루살렘의 교회로 볼 수 있다.

 

남은 자 중에 여호와의 부름을 입은 자는 완악한 유대인 둘 중에 남은 자가 있어 마침내 그리스도 교회의 성도가 되어 드디어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 없이 다 같은 구원에 이르게 됨을 의미한다.

온 이스라엘이란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의 형통의 자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3장 여호와의 날의 큰 심판, 큰 은총

3장은 여호와의 날을 중심으로 전후 두 부분으로 갈라진다. 첫 부분(3:1-15)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항하던 이방 원수들의 심판이요, 둘째 부분(3:16-21)은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회복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에 베풀어지는 큰 은총이 예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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