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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정근두

by liefd 2024.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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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회에는 성경을 읽는 사람이 한 명 있었고, 그것을 나머지 사람들은 들었습니다. 듣는 이들과 지키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꼭 같이 그 말씀을 지켜야 할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읽을 수 없는 경우라도 듣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황제숭배의 요구 앞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약속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내용은 계시이지만 편지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라는 것은 모든 교회에 편지라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소아시아 지역에 실제로 있는 일곱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따라 편지를 썼지만 그 핵심 메세지는 온 세상과 온세대에 걸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당시의 모든 교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를 위해서 기록한 편지입니다.

 

성도들로부터 격리되어 유배된 밧모섬에서 사랑하는 교회들을 향해 마음껏 주고 싶은 축복을 이름하여 은혜와 평강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는 항상 환난 가운데 있기에 은혜와 평강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관련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그분께서 모든 역사의 주인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세상과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역사하시는 충만한 영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 박영선

 

일곡교회에 보낸 내용을 보면 주로 네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깨어 있으라, 주의하라, 회개하라, 충성하라 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신자들이 꼭 기억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하고, 주의해야 하고, 무엇이 유혹이고 시험인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세상에 무엇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틀리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붙잡은 것과 믿는 것과 알고 있는 것들을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내야만 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생각하는 것이 왜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고 있는데 어려움을 당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환난을 당연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 마가복음13, 누가복음 21장에 가봅시다. 환난을 당하는 것은 예수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참다운 신앙을 갖고 있다는 증거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로서 존재하며, 신자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신앙생활 내용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류해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교리적 진리와 순수함을 밝혀내기 위하여 힘차게 싸우다가 그만 사랑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비 걸고 싸우게 되면 떠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싸우지 않으려고 합니다. 에이 무어 교회가 여기뿐인가? 다른 데 가고 말지! 교회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 지킴이 진리와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지키기 위함인데 그 근거와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가 십자가로 대표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입니다.

 

나 혼자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옳게 만드는 데 까지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영광과 거룩의 자리에 함께 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본체입니다. 사랑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지금 부족한 것이 완성이 되기까지 내가 희생하고 내가 노력하여 그를 완성의 자리에까지 가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고전 13:1-7)

우리가 생활하면서 고쳐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상대방이 틀린 것을 확인해서 기뻐해야 되고,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 구하는 것을 기뻐해야 되는데, 우리는 상대방이 잘못한 것을 평생 떠들고 다닙니다.

 

믿음을 지켰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열심을 냈는데 사랑이 없고, 많은 봉사를 하고 희생을 했는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3대 문제는 핍박, 이단, 분열이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내 신앙인생은 이렇게 재미가 없습니까? 이렇게 가난합니까? 생각을 가진다면 사랑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능력이 없고 활력이 없는 것은 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마음 바탕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니골라당의 행위, 발람의 교훈, 이세벨의 술책은 행음하게 하고 우상제물을 먹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세상을 섬기는 것을 혼합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꾸지 않고 몇 가지 일거리를 가지고 자신을 속입니다. 하나님을 속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신앙인격이 변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아도취와 환희에 젖은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잘못 가고 있습니다. 자기도취에 빠져있고 행한 업적에 빠져서 사람들의 신앙인격과 존재,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의 바뀜이 없습니다.

 

니골라당의 행위가 만영되어 제일 답답한 곳이 신학교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배우려고 오지 않습니다. 저들은 이미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꽉 차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면허를 따로 들어옵니다.

 

이기는 자란 간단하게 조건적인 표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기는 자란 부름을 받은 또는 권면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겨야 한다는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란 듯에서 이기는 자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면제될 수 없는 영적 전투의 삶임을 의미하며, 아무리 약한 성도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는 표현은 쉽게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조건으로 쓸 수 있습니다(6:47-51).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이요, 이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간다는 정도가 아니라 믿는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본질적으로 그렇지 않은 자와 다른 어떤 자격, 어떤 신분, 어떤 지위에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신자라고 합니다. 믿는 자들이란 하나님께 속한 자들, 영생을 갖고 있는 자들, 부활생명을 갖고 있는 자들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라는 말은 이기면, 이기는 사람은, 이런 뜻이 아니라 이기도록 되어 있는 자로 우리를 옮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기면 이 상을 받고 못이기면 매 맞는다는 등식이 아니라 너희는 이기도록 되어 있는 자로서 어차피 이길 운명을 가진 자이니 그 승리를 더욱 값지고 더 부요케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일으켰고, 하늘에 앉혔다는 것은 모두 완료형입니다(2:1-7).

너희가 죄와 사망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듯이 그리고 너희가 이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생명을 살고 있는 이유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듯이 너희는 너희의 영원한 운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 우편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미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란 이기면 이것을 주고, 못 이기면 못준다는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이기도록 되어 있는 너희의 신분과 운명과 너희가 받은바 약속과 은혜를 기억하여 거기에 부합되리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4:22-24)는 것은 신분과 운명을 결정짓는 책임으로서 권면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새사람이다, 새사람다워라 하는 수준과 성화로서의 책임을 권면 받고 있는 것이다(4:22-24),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한다는 것(2:7),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11절의 표현은 마치 특수한 층에게 특수한 부류에게만 허락되는 특별한 상으로 오해되어 있습니다. 생명나무와 과실은 영생을 표현하는 상징인데, 생명수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목마른 자 누구에게나 값없이 거저 주는 선물, 속죄와 은혜를 상징합니다.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환난과 궁핍 속에 있는 서머나 교회이지만 실제로는 부유한 자라 너희가 믿음으로 그 모든 환난과 궁핍을 이기고 있어 내가 기뻐하노라고 편지를 보낸 것이다.

 

유명한 순교자 폴리갑이 A.D 155년에 총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한 시간짜리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당신은 악인을 위해 준비한 영원한 불에 들어갈 텐데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고 반문하여 총독을 아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형편을 안다. 네 처지를 안다. 네 현실의 고달픔을 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내가 왔지 않느냐. 지금도 네가 고달픈 것을 안다. 그 문제가 승리와 영광으로 끝나게 하기 위하여 내가 죽었지 않느냐. 내가 처음이고 나중이지 않느냐.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 지지 않았느냐?

 

내가 이 세상을 결국 꺾을 것인데 이 세상이 이렇게 저렇게 너희를 시험하고 협박하고 너희를 못살게 굴 것이다. 그때 너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우리의 시선이 일곱교회의 편지에 모여져야 맞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어디에서 격발이 되느냐 하면 왜 나만 이 일을 당해야 하는가? 왜 나만 이래야 되는가?를 생각합니다. 거룩하게 살면 이런 일을 당하는 거야? 그러면 쟤는 요라고 반문합니다.

 

환난과 궁핍이라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 이유없는 재난을 당하거나 어떤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선택을 한 것입니다(11:24-26).

 

예전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가 가지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져야 하고 남보다 더 잘나야 하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식의 아주 걷잡을 수 없는 욕심으로 신앙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부요함은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환난과 궁핍이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모든 부요함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당하고 있는 가장 큰 환난과 궁핍은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탄의 회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 대해 민족적 종교적 차원에서 핍박을 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도 빼앗고, 참다운 신앙의 생명과 진리되는 것도 곡해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사탄의 회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저들의 출신과 신분으로 저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 천국 문을 막아섰고, 자기들도 안들어가고 남들도 못들어가게 하는 사탄의 회가 되어 있습니다(23:13-15).

 

착한 행실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이 아니라 더더욱 높은 영적차원에서 인간이 그 어느 곳에서도 얻어낼 수 없는 해답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은혜가 선포되는 통로로서 존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큰 일을 하고, 업적을 납기고, 능력이 있는 것으로 부름을 받지 않습니다. 의와 진리와 생명을 증거하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우리의 다름,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 인해 생겨난 다른 존재로서의 인간의 부름을 받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세상의 것을 다 빼앗겨도 영원한 것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반대하여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충성하라는 것은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세는 기간이 아니고 순서입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말라. 우리 중에 몇몇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만이 환난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극복해야 하는 책임이며, 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운명이요, 책임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

사단의 위가 있다는 것은 겉모습에 있어서도 당시 버가모 도시의 사회적 풍습에서 이런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섬기는 정신이 골수까지 물들어 있는 형편에 있었던 것을 말해줍니다.

 

버가모는 명분과 형태에서는 승리했지만 실제생활에서는 실패하고 타협하면서 살고 있는 이중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당시 로마는 힘으로 나라를 유지하고 전세계에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검을 최고의 권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소개함으로써 진정한 권위와 심판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충성된 증인 안디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을 함으로써 우상숭배를 거부하였고 순교를 감수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큰 싸움에서 이긴 것 같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그 시대의 모든 우상숭배와 행음하는 일들에 대해서 거부했고 맞서 싸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큰 싸움은 이겼는데 사소한 사움에서 졌다는 것은 아마 개개인들은 신앙을 지키는 일과 그 사회에서 사는 일들에 대해서 적당히 살았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우상숭배와 기독교 신앙을 혼탁하게 하는 일이 자칭 선지자라는 직분으로 용납이 되어서 이것이 하나님의 교훈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세밀하고 크게 지적이 되어 꾸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고 발람의 교훈, 이세벨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세상의 것을 혼합하는 것을 거부했으나 그 거부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순수히 채우겠다는 적극적 차원에서의 거부이지, 둘 다 하지 않아서 혼합된 것이 에베소 교회가 받은 책망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신앙과 고백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채웠으며, 무엇이 여러분을 순종케 하고, 열심케 하고, 매달리게 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

앞에 2장에 있는 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정치적, 사회적으로 환난과 핍박을 받고, 이단의 공격을 받았지만, 3장에 나오는 세 교회는 안으로부터의 붕괴가 공통적으로 드러납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니 실상은 죽은 자인데 본인들은 살아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보기에는 신자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본인들은 신자이고, 생명을 가진 자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사데 교회는 이단에 빠질 만큼의 기독교적 열심도 없었고, 이단이나 거짓 가르침에 유혹을 받을만한 관심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세상과 악의 무리가 볼 때에는 사데 교회는 공격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별로 고난이 없는 사람들로 인해 시험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 어떻게 이해했고, 어떻게 결정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충성, 인내, 믿음, 순종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성공이나 능력 힘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위하여 빌고 세상을 위하여 빌기 이전에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서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신자된 내용에 관한 것이지 신자가 무엇을 함으로써 신자됨을 표현하며 신자된 몫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바 죽게 된 것, 원래 가졌던 우리 신앙의 진정한 것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단어는 열린 문을 두었다는 것과 네가 적은 능력을 가졌다는 두 마디입니다.

여기서 열린 문은 복음의 문이여 구원의 문입니다. 세상의 죄성과 구별되는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가지는 열린 문인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는 열린 문은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으면 사실은 열린 문이 되는 것입니다.

 

적은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그 능력이 세상의 것과 비교해서 작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적어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된 것, 믿음의 본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힘은 영혼을 살려내는 데 그 힘이 있습니다. 영혼에 속한 것들을 채워주는 데 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쓸모가 있으려면 나에게 지위를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달라 하지 말고, 여러분이 참으로 신자다운 자리에 서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 얼마든지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안하고 언제나 큰 것만을 달라고 합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에 되게 하겠다에서 기둥은 안전성과 영구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지진을 경험한 도시이기 때문에 이 표현을 써서 저들이 하나님의 백성된 운명과 궁극적으로 받을 보상의 영원한 것을 확인시켜 주는 표현으로서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는 각 교회마다 하나씩 보낸 것이 아니라 일곱 편지 모두를 각 교회가 읽게 되어 있고, 그 뒤에 있는 이야기도 각 교회가 읽게 되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

뒤의 세 교회는 내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신앙을 지켜내는 영적인 전투를 포기하고 타협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본인들이 복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통렬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려면 매일매일 영적인 고통을 느끼며, 위기를 느끼며, 어떻게 해야 될 까 자문하지 않는 날이 없어야 옳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많은 부분을 타협하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본인들이 잘못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칠 생각이 없다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차가우면 내가 잘못을 하고 있구나 내가 정상적이지 않구나 하고 깨달았을 텐데 미지근함으로 인해 본인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돌아볼 기회마자 놓치게 되었기 때문에 차던지 덥든지 하라고 꾸중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합금이 아니고 정금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어려움을 덜 받은 교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이 교회의 감독이 순교를 당한 환난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들에 비하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핍박을 덜 받은 것이 이 교회가 연단된 정금 같은 신앙을 갖지 못한 이유가 됐고, 내적으로는 저들이 스스로 신자된 삶을 자각하고 분별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싸움을 했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탓에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잘못된 것을 뽑기 위하여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난관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정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한 것을 만들이 위한 갈등과 연단을 주십니다.

 

시편 23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조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고백인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에 전반기는 사울에게 쫓겨 적국에까지 도망을 가야 하는 고달픈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반기는 전부 내적인 환난입니다.

 

내가 벌써 문 밖에 왔다. 벌써 두드리고 있다. 나를 영접할 준비를 하라. 더 이상의 지체할 여유가 없다, 내일부터라는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오늘, 지금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싸울 각오와 충성과 그리고 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는 자녀들이 왜 이러면 안돼?하면 안된다면 안돼였습니다.

 

예전에는 철학을 한다고 하면 절대 진리, 절대기준을 찾는 것이 철학의 임무였습니다. 그러다가 칸트가 나와서 철학의 문을 닫게 됩니다. 칸트가 한 일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은 초월을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헤겔은 정과 반이 합해서 새로운 합을 만들어내는 변증학, 진화론적인 철학을 창시해 냅니다.

 

키엘케고르에 이르면 절대 기준에 의한 어떤 단어도, 의미도 대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실존이라는 지경에 이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자신이 경험한 것만 있는 것이지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서구미술에서도 더 이상 제목을 붙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그린 것이냐 하는 것은 보는 사람 마음대로입니다. 음악도 같습니다. 멜로디가 주를 이루지 않고 리듬만 남습니다.

 

서구철학의 도착 지점이 절망입니다. 프랑스 영화를 보면 절망에 대해서 제일 크게 몸부림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에 실패한 이성이 만들어 낸 이상한 보너스가 있습니다. 과학문명의 발달입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은 옛날보다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공, 행복, 가치하는 것이 다 물질화 되고 말았습니다(3:17). 여러분의 모든 행복과 자랑의 근거가 물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한 번도 승리를 못한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정말 난 바보구나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 저를 한 순간도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저는 바보입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매순간 어떤 일에도 간섭해 주십시오. 저를 혼자 두지 마십시오. 이것이 신앙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49:22-26).

 

내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훌륭하게 믿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같은 것을 도우시는 하나님, 나 같은 것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으면 저는 꽝입니다. 하나님 없으면 저는 한 순간도 비텨 낼 수가 없습니다.

 

 

 

스펄젼 요한계시록,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별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 빛을 내는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들입니다. 별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별들이 다 모인다고 해도 밤을 낮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주의 종들의 빛은 너무 약해서 밤을 이길 수 없고, 어둠을 빛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별은 안내자입니다. 저 하늘에 떠있는 별들은 길이 없는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로같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말 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많은 사람들을 의로 돌아오게 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어떤 별, 곧 샛별은 낮의 선구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샛별을 보면 기뻐합니다. 낮아 아주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주님의 발소리를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사자는 복이 있습니다.

별들은 밤의 위로와 위안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의 산을 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52:7).

 

교회의 부흥은 목회자에게 많이 좌우됩니다. 여러분에게 마음이 따뜻하고, 사랑이 많으며 열심있는 복음 설교자가 있다면 오래지 않아 열심히 있고 진실하며 경건한 일꾼들이 주위에 모여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전투의 승리는 목회자들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능력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성경에만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생명을 주어 사람들 마음에 와 닿게 하시는 진리입니다.

 

설교자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디게 만들거나, 그 날을 무엇으로 덮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복음을 아주 날카롭고 예리하게 만드신 주님을 거역하는 일일 것입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 배굉호

 

특히 교회 성장 위주의 사조는 신학의 변질과 물량주의를 가져왔고, 올바른 말씀의 선포보다는 은혜 위주의 성령 운동과 은사 주의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참된 교회의 표지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합시다-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편지(요한계시록 2:1-7)

 

1. 주님의 칭찬

행위와 수고를 칭찬(2:2)

인내를 칭찬(계 2:2)

열심을 칭찬(2:3) : 게으르지 아니했다는 말은 약해지지 아니했다. 신실했다.

정통성을 칭찬(2:2) : 고상한 영적분별력

 

*에베소 교회에 들어온 악한 무리 : 거짓 사도, 자칭 사도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함 : 지금은 복음시대이므로 율법이 필요 없다. 육은 더럽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 사상,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되기 때문에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다.

 

2, 주님의 책망

처음 사랑 : 에베소 교인들이 가졌던 기독교적인 사랑, 형제에 대한 사랑(20:35, 1:15),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가졌던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

 

버렸다는 것은 생명이 없는 형식주의로 전략하여 사랑을 상실했음을 의미. 처음 사랑이 없다면 교회의 일은 생명력이 없기 때문.

 

왜 처음 사랑이 식어집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가장 큰 계명이요 율법을 이루는 것입니다(고전 13:13, 3:14).

 

3. 주님의 요구

회개하라 :죄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되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생각하라.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과거에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돌아보라.

 

들을 귀를 가지라: 영적 이해력이 있는 귀, 성령의 권면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말합니다. 교회들에게란 복수 형태는 서신의 끝머리에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문구입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편적인 교회를 향해 보내진 것을 시사합니다.

 

이기는 자가 되라: 군사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와 사단의 타협없는 대결상, 사단과 대결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와 회개한 자, 악과 싸워서 이기는 자,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 예수님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자

 

고난을 이깁시다-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요한계시록2:8-11)

 

1945년 플레센 부르크 수용소에서 히틀러의 직접 명령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던 루터교회의 목사인 디트리히 본훼퍼는 고난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배지이다고 했습니다. 이 고난은 진정한 사랑에 대한 증명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으려 합니다.

 

서머나의 배경

서머나는 당시 인구 25만의 큰도시로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도시였습니다.

 

진리를 지킵시다-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요한계시록 2:12-17)

 

성결한 삶을 삽시다-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요한계시록 2:18-29)

 

실제로 살아있는 교회-사데 교회에 보내는 편지(요한계시록 3:1-6)

 

기회를 활용합시다-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요한계시록 3:7-13)

 

열정을 가집시다-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요한계시록 3:14-22)

 

 

쾌도난마 요한계시록1, 송태근

 

요한계시록은 교회로 시작해서 교회로 끝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존재는 언제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오늘 내현실의 삶속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나는 어떻게 순종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일곱 교회는 대표성 때문이요 무한대의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모든 세대의 교회를 다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구원과 사랑을 확고하게 보증하는 말씀이 바로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이 전능한 자라고 하는 도장까지 찍어주십니다.

 

내가 환난을 겪지 않고서는 내 속사람의 용량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1:2-4).

환난의 의미를 정리하면, 먼저 소극적 의미로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우리를 거절하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극적인 의미는 우리를 온전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환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늘 처음처럼(계 2:1-7)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각 사람이지 일이 아닙니다.

지혜는 단지 일상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는 것을 넘어섭니다. 개념상의 옮음을 뛰어넘어서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2:8-11)

서머나는 몰약 또는 쓰다는 의미입니다.

죽도라 충성하면 생명의 관이 준비된다고 했습니다.

 

내 입의 검으로 싸우리라(2:12-17)

성경에서 발람은 반드시 불의한 삯과 연결되어 있는데 물질 때문에 무너진 인생을 대표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교회의 존폐가 걸린 믿음의 큰 싸움에서는 승리하였으나 물질의 문제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새벽별을 주리라(2:18-20)

두아디라 교회의 행위, 즉 사랑, 믿음(으로 행한 일들), 인내하는 (꾸준한) 섬김(봉사)에 대해서 주님이 인정하셨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직분론이 바뀌어야 합니다. 섬김의 자리로 직분을 주셨는데 이 직분이 계급이 되어 버렸습니다.

 

둘째 이원론입니다. 아주 유치하게 성속을 구별하고, 게다가 교회 안팎에서의 언행이 완전히 다릅니다.

 

셋째, 기독교를 복 받는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속사람이 얼마나 계속 그리스도의 성품에 맞는 부유한 사람으로서 너그러워지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두이디라 교회는 이세벨을 용납했습니다. 그냥 겉으로 보이는 형식적인 행동일 뿐이고 속으로만 하나님을 고백하면 된다는 식의 타협주의로 성도들을 꾀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려면 별나게 굴어야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다스리는 권세뿐 아니라 새별별을 주십니다. 유대인들의 관념으로 새벽은 모든 어둠이 걷히고 물러가는 시간입니다. 새별별은 철장의 권세를 가지시고 만국을 통치하실 역사를 회복하고 새 역사를 인도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짓평안(3:1-6)

사데는 당시 사치와 부요의 대명사였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생명이 없는 상태입니다.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네 행위를 들여다 보니 지금 껍데기만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속반 강정과 같습니다.

 

열린 문 교회(3:7-13)

빌라델비아는 형제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 도시는 로자 제국의 주요 도로가 소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길목, 즉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 지역은 어떤 장사를 해도 번창했을 뿐 아니라 포도 농사도 잘 됐습니다. 2의 아테네라는 별칭까지 붙었습니다.

 

작은 능력이란 것은 작지만 열매를 냈다는 내용의 칭찬이 아니라 빌라델비아 교회가 너무 무능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빌라델비아교회는 세 가지 우겨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경제적 체계입니다.

 

상인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생활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상인조합에 가입하면 곧장 신전에서 벌어지는 이방신들을 예배하고 그 요란한 잔치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둘째,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그들을 어렵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상당히 혼합주의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 종교를 일종의 사회 문화적 관습 정도로 이해하여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제국신민의 의례로 보았습니다.

 

셋째 불안전한 삶의 기반, 즉 자연재해의 위협이었습니다.

 

열린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는 뜻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은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를 말할 때 사용합니다.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은 지진 때문에 도시를 떠나 대피했다가 돌아와야 했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도성을 약속받은 사람이 될 새 집은 흔들리지 않는 기초 위에 세워진 영원한 도성이라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열린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그분의 자녀들, 즉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열린 문이 되어 주셨습니다.

 

부요한 자(3:145-18)

라오디게아는 인구가 많은 상업도시로서 일찍부터 금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안약제조로 유명했고, 도시 안에 유명한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는데 생활용수가 절대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북쪽으로 9킬로 떨어진 히에리폴리스에서 온천물을 가져왔고, 식수는 아주 차가운 물로 정평이 나있는 골로새에서 물을 끌어다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멘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리스도는 진실무망하시다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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