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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신명기, 언약을 위한 책, 박영선

by liefd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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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 문제를,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백성임을 깊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목적하심에 대해 믿음과 책임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부 됨에 대하여(19:3-9)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주라는 것은 당시 고대사회의 나쁜 풍습인 남존 여비사상 혹은 일부다처제와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 여자가 인격적으로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던 시대에 여자가 희생되고 버림받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신명기 241-4, 결혼은 무슨 이유나 조건이나 핑계가 될 수 없이 하나님이 정하신 인격과 한 인격의 고귀한 결함이요, 그것을 대신할 다른 관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서 제일 멋있게 생각하는 것은 호박꽃입니다. 그것은 누가 손보지 않아도 큰 호박을 열매로 맺기 때문입니다.

모든 동화는 어디서 끝납니까? 왕자와 공주가 결혼하는 데서 끝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를 안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대하여(24:5)

 

미국은 신앙 또는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자기 나라를 떠나서 자유와 평등, 독립심을 가진 사람끼리 만든 나라입니다. 자유와 독립의 제 1기초 단위인 가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미국의 기본자세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았는데 결혼 생활에 방해받는 일이 있으면 다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회에서 기본적인 성격과 복된 내용이 있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어디서나 다 일하는 신앙, 열심히 하는 신앙입니다. 전도하고 봉사하고 구제하는 신앙이지 이 신앙과 인격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고귀하고 영원한 나라에 속한 관계성을 펼칠 줄 모릅니다.

 

자기가 가진 신앙이란 관계성에서 싱대방에게 어떻게 유익이 되고 , 배려가 되고, 서로에게 공통된 보물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하고 모두가 어디까지 하셨죠, 난 여기까지 했는데...그렇게 경쟁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성질대로 하면 남녀가 일 주일을 같이 살 수 없습니다. 누가 그 거지 같은 성격을 참는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괜찮은 남자, 괜찮은 여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집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되는 것,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는 것 이것이 필수과목입니다. 선택과목은 성가대 봉사, 집사, 장로입니다.

 

남자는 돈을 벌어 온 것으로 자기 책임을 다했다고 하지 말고 신앙적인 차원에서 가정을 지키고, 인도하고, 전진해 나가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한국교회의 신앙생활을 자세히 보면 밤낮 외서 치성을 드리고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와서 배우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어서 돌아가면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 헌금 냈다. 성가대 했다. 예배 참석했다. 그래서 내 할 일 다 했다입니다. 교회는 나오는데 가정이나, 개인 신앙 인격을 보면 예수 믿은 표가 안납니다.

 

이웃에 대하여(24:6-7)

 

6절은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의 물건을 볼모로 잡아서 그의 생명이 위협받을 정도까지 핍박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고, 7절은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그 인권을 존중하는 것을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기하게도 봄에 날씨가 좋으면 그 해의 농사가 망친다고 합니다. 크기만 하고 속이 안찼다가 조금만 기상이 나빠지면 그냥 맥없이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봄에 비가 안 와서 가물었다든가 아니면 너무 와서 병충해가 심하면 크지는 않아도 단단하게 큰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인도하시는 과정 속에서 그가 무능해 보이고 열등해 보이고 쓸모없어 보이는 길을 걷게 하시는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쉽게 손가락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이 사람 때문에 내가 크고 나 때문에 이 사람이 크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이해관계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어떤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이 나에게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보상합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잘한 것, 이웃에게 잘한 것은 하나님께 계산됩니다. 예수 믿는 것도 자꾸 이해관계로 써먹으려고 합니다. 이해관계를 떠나 인격과 인격의 마땅한 대우를 해주십시오.

 

나병에 대한 규례(13:1-4, 12:1-10, 24)

 

당시에 나병은 불치병입니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입니다. 불치의 병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 이것이 나병에 들려있는 현상입니다.

 

구약 시대에 종은 하나님이 분명하게 부르십니다. 계시를 받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표로 기적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체계적으로 배웠는가 하는 것이 구별하는 일차적인 방법입니다. 무엇을 자꾸 확인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언제나 말씀에 근거해서 확인해야지, 느낌으로 확인하는 것은 아주 잘못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대단한 곳입니다. 설교 하나로 크는 것이 아닙니다. 지지고 볶는 가운데 교회에서 크는 것입니다.

사람은 군대에서 크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크고 이웃과 동네에서 싸우면서 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전당물에 대하여(24:10-15)

 

가진 자의 책임이 무엇인가 할 때 본문 말씀에서는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너는 가져서 꾸어주고, 상대방은 안 가져서 꾸어야 하는 것 때문에 상대방의 인격을 짓밟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성공이나 능력이나 어떤 재주나 그 무엇으로도 우리가 얻은 구원과 영생하는 복된 운명 때문에 감사하도록 되어 있지, 그것으로 누구를 위압하거나,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것으로 써 먹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과 함께 모든 사람과 어떤 규칙과 법칙이라는 기준 위에서 이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기초 없이는 우리는 사랑이나 긍휼이나 자비나 희생이나 봉사나 하는 자리로 못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악함과 우리가 하는 일이 보상받지 못한다고 해서 지면 안됩니다. 상대방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세상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며, 그 보상을 내가 긍휼과 자비를 베푼 대상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라(24:16, 18:1-2)

 

사람 한 명 한 명은 각자 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요 하나님과 일대일의 대상입니다.

삼 사대까지 죄를 묻는다는 것은 죄가 가지는 영향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잘못을 자녀에게 묻는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라(24:17-22)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셔서 우리 아니면 그 일이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눌 수 있고 도와줄 수 있다면 그것은 짐이 아니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에 부름받고 있는 고귀한 특권인 줄 이해하는 그런 깨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신앙을 가질 때에 제일 실수하는 것이 잘했나, 못했나 로만 가는 것입니다. 늘 머릿 숙에 있는 신앙의 점검은 지난 주에 기도도 못하고, 성경도 못읽고, 전도도 못하고...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점검하지 말고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접근하고 거기에 동참하여 여러분의 주어진 삶 속에서 이웃 앞에서 여러분의 존배의 가치가 자비와 사랑과 긍휼로 갔는가라고 자꾸 물어야 합니다(15:1-6).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첫째가 되고 내가 둘째가 되는 것이 사랑이지, 내가 첫째가 되고 상대방이 둘째가 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공동체에 속하라(25:1-3)

 

우리가 신명기에서 보는 규칙은 잘못을 찾아 심판하는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를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즉 죄를 억제하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공동체를 보전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한국교회의 큰 결함은 열심히 있고 명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다 된 것에 대해서 혜택만 받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혜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입 바른 소리하고 숨어버리면 안됩니다.

 

복 주시려고 부르신 신자의 인생(25:4, 고전 9:7-12)

 

부부 됨의 본질은 책임입니다(5:22, 25).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많은 짐을 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가 소속된 모든 곳에서 지고 있는 모든 짐이 우리에게 유익임을 아는 시각에서 자신의 직무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묶어다 놓은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인생살이, 그 속에서 내가 맡은 어떤 짐. 책임있는 자리 이 모두가 우리의 복을 위하여 준비된 자리입니다.

 

기업 무를 책임이 있는 신자(25:5-10)

 

모두 서로 복을 따먹고 가려고 아우성이고 경쟁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각자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 부름 받고 약속받은 영광의 자리에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 책임을 지고, 그 짐을 나누는, 기업을 무를 줄 아는 실력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신을 안 신는 것은 보통 종의 신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신을 벗기고 침을 뱉는다는 것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복 주심과 약속하신 것에 동참할 실력이 없는 종 같은 자, 노예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시는 일에 우리를 가축처럼 키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를 그 내용과 목적에 공감하도록 하십니다. 동참하게 해서 능 동역자로 쓰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반적인 이해관계가 아닙니다. 사랑의 관계요, 믿음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공부를 잘 하고 능력있기 이전에 인간다운 소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배려하는 마음이고 아량입니다.

서양 격언에 모든 아름다움은 앞 이빨에 있다.“

 

연습하고 노력해야 하는 신앙생활(25:11-12)

 

한 남자의 아내가 자기 남편을 구하려고 상대방의 급소를 잡아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는 목적이 아무리 고귀하고 중요하더라도 아무거나 수단으로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키시는 모든 일은 그것을 이루는 것에만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일을 행하는 중에 우리 자신이 완성되고, 유익하게 되고 자라나게 하기 위해 일을 시킨다고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 정확한 성경적 이해입니다.

 

전도하면 사람을 얼마나 많이 데려오느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도를 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속사람이 크고 희망이 강해지는 이익이 우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육체를 쫓는 것은 무엇으로 압니까? 육체의 일로 나타납니다. 성령을 좇는 것도 성령의 열매로 압니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법이 선해야 합니다(2:1-5). 하나님에게만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이 가지는 품성, 윤리, 예의 범절보다 더 잘 해야 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모든 결과는 그에 상응하는 과정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들인 노력에 비해 더 큰 결과를 바라는 것을 사행심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라. 분별하라, 선택하라, 결정하라, 책임지라, 연습하라,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공의를 행하라(25:13-16)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8:4-6) 월삭 때문에 장사도 못하고 안식일 때문에 장사를 못해서 큰 일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내가 손해봤다고 하는 것입니다.

공의란 내가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뇌물을 받지 말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어떤 조건입니다.

 

아멜렉을 물리치라(25:17-19)

 

아멜렉을 대적하라는 것은 가나안에 사는 백성다운 삶의 도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맨 처음 만나는 적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육체입니다. 이것이 아말렉입니다.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왕권을 박탈당하게 되고 결국은 아멜렉 청년 손에서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격적 항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맺어야 할 열매(26:1-11)

 

하나님이 나를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 하나님이 나를 약속의 땅 인도하여 들어섰다는 표가 이 수확물이라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우리의 옛사람이요, 성경식 표현으로 말하면 육체라고 했습니다. 육체는 죄와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따르고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즉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옛사람과 세상을 벗어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의 충만한 목표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도의 회개내용은 전부 죄를 지었다는 것뿐입니다. 또는 어떤 특별한 일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정직하고 성실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랑과 긍휼과 배려와 아량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으로 증명되어야 하는가 하면, 여러분의 입장에서 남다름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은 수확이 있어야 합니다(6:15).

 

천국과 구제의 의미(26:12-15)

 

제 삼년 심일조는 구제용입니다. 구제함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고 복을 받아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것을 그렇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남을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임을 알고 있는 표라고 했습니다.

 

십일조와 구제는 하나님만이 내 편이시며, 하나님만이 나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구제하며 십일조를 드립니다.

 

하나님만이 내 주인이시오, 내게 복을 주시는 유일한 주님임을 아는 신실한 신앙의 자세, 그 진심이 헌금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내가 필요한 것을 공급받고 또 그것으로만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언약의 대상인 우리(26:16-19)

 

구약과 신약의 주제가 약속인데 약속한다는 것은 인격적 차원에서 일이 수행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원통하다든가 불만이라든가 시험에 걸리는 것은 언제입니까? 그것은 우리로 말미암는 것이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잠잠하여 들으라(11:26-32, 27:1-10)

 

신명기 12장에서 26장까지의 말씀은 약속의 땅,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가장 큰 오해는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니까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너희가 예뻐서, 너희가 잘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 열조와 약속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이 땅에 들어오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주장대로 살 때에는 하나님을 격노하게 한 것밖에는 만들어 낸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고, 저 사람과 달리 여기에 왔으니 내 요구도 채워주십시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큰 오해와 실패의 내용입니다.

 

살아내야 하는 가나안에서의 삶(27:1-10)

 

요단에 들어서는 초입인 길갈이나 여리고에 돌비를 세우고 제단을 쌓아야 하지만, 세겜에 올라와서 율법을 기록한 기념비와 돌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냐면 이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룬 것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12:5-7, 33:18-20, 27:6-7).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은 이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신앙 고백이고, 그 고백을 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기쁘게 나타내신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구원을 확신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가를 깨닫고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어떤 책임이 있는지를 자각하는 데에 뜻이 있지 구원의 확신이 내용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것은 나를 확인하여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분별과 결정을 위한 확인이지, 책임도 없고 앞으로 나갈 방향이나 결정도 없이 확인하나 또는 감동 하나가 내용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27:11-15)

 

정실부인에게서 난 여섯 지파는 그리심산에 서서 축복을 선포합니다, 두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네 지파, 여섯 지파는 예발산에 서서 저주를 선포합니다.

 

에발산에서 선포한 저주(27:15-20)

 

내가 정직했으니까 보상해 주십시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열 두 가지의 맹세는 지켜내면 복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허락된 신분이 져야 하는 책임(28:1-14)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에게 순종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것이 왜 복입니까? 그것이 결과를 향하는 가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복 주시기 위한 간섭(28:1-14)

 

요셉은 고통 속에서 인생이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인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 지를 배웁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진 복에 대한 개념은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큼 열심을 부렸는데 왜 나에게 고통이 순간이 그치질 않습니까? 평생 원수 관계를 유지해야 서로 간에 복입니다. 도움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짐만 더 가지고 오는 것이 부부입니다. 여기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불평하는 가장 큰 두 가지 이유는 고통이 있다는 것과 훨씬 중요한 문제인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끝내 돌이키게 하실 하나님 1(28:15-40)

 

복이라는 것은 고통이나 갈등, , 이런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고귀한 수준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축복의 약속보다 저주의 약속이 더 많은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리로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보괸 길로 가지 않은 자의 생애 속에서 제일 많이 하는 것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좌절의 순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돌보심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일 큰 신앙적인 약점이 무엇입니까? 본인의 신앙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그분 앞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한 몇 가지 종교적인 형태로 신앙을 때워버린다는 것입니다.

 

끝내 돌이키게 하실 하나님 2(28:47-68)

 

왜 이렇게 길게 말씀하시느냐 하면 모두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에 포로가 되는 벌을 최후의 벌로 정해놓은 이유가 있습니다(9).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이 벌을 받아서 오게 된 것입니다.

 

어디에 강조점이 있는 가 하면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약속한 바로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이요, 그 일이 이루어지게 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이고, 범죄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그대로 된 것입니다.

 

안식일 또는 안식년을 통해서 무엇을 기억합니까? 이 황무한 땅을 보면서, 내가 시작했더. 그들은 자신을 구워할 능력이 없다를 하나님이 기억하시겠다는 것입니다(5:12-15) 희년은 인간의 실패나 어떤 곤경이나 절망이나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고치시고 싸매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25:8-15).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29:1-9)

 

모세가 이렇게 반복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4). 신명기 4장에서 확인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가?하는 문제였습니다. 문제에 봉착하여 절망에 빠지고 해결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해결해 달라고 찾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과연 내인생의 존재의 의미요, 목표요, 내용인가를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0장에서 하나님은 힘과 두려움으로 우리를 누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삶 속에서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언약을 맺고 이루시는 하나님(29:10-17)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하나님은 원래 우리와 계약을 맺을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홀로 자족하신 분이시오,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원래 약속은 쌍방간에 합의를 보는 것입니다.

 

전부 모여선 개인 한명 한명과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언약 관계를 맺으신다는 말입니다.

 

축대 쌓기(29:18-23)

 

함께 지어져간다는 표현은 축대를 쌓는다는 뜻입니다. 좋은 교회란 자기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자기가 원하는 교회가 다 해주는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날도둑입니다.

 

좋은 교회란 서로가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각자 자기 책임과 자기 몫을 하는 교회를 말합니다(4:1-6).

 

순종하고 섬기며 지켜라(29:22-29)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자꾸 규칙과 법처럼 다룹니다. 주일을 어겼다. 거짓말을 했다, 성경을 안봤다, 이렇게 가면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다만 있지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나는 뭐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는 뒷전으로 갑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30:1-10)

 

저주의 약속 중에 마지막 저주였던 이방민족에게 사로잡히는 벌을 받았을 때에 이제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입니다. 돌이키는 것,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음으로써 벌을 받고 있는 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 단계입니다.

 

회개합니다라는 말 속에는 본인이 깨우쳐서 돌이키는 결단과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쫓아 보내서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과장이지, 그저 화를 내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게 사는 우리를 벌 주어 재미를 느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저주의 약속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내가 있는 한, 그 사회와 시대를 가나안으로 만들어주시고 내가 하나님을 외면하면 몇 번이고 바벨론에 붙잡혀 간 것과 방불한 상황을 만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놓아버리는 순간 세상은 즉시 우리를 점령하고 우리에게 명령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삶의 횐경이나 조건을 회복하는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진심을 회복하는 일인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랑과 행복과 승리가 없다면 여러분의 진심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겨라(30:11-2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첫 번째 표는 무엇입니까?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네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네 마음을 나에게 바쳐라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일 잘 하는 교회를 만들었을 뿐이지, 인격적 차원, 성품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차원으로 변화되는 일에는 너무 소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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