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그의 추적자, 남정웅
믿음은 하나의 관계의 시작이며, 그 이니셔티브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영광중에 그에게 나타나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그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확실한 증거와 함께 그의 과거를 청산하고 떠나온 길이지만 믿음으로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늘상 불완전하고 미완성적이며 불경건한 삶을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그 주변에서 생기는 온갖 사건들을 거치면서 결국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경험을 쌓게 되고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이해하는 믿음의 아비로 성장해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기까지 그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지키시며 키우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그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달아나고 하나님은 그의 뒤를 추적하는 관계 속에서 그는 마침내 믿음의 최고봉인 모리아 산정을 향하는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믿음이란 우리 자신의 것을 얻고자 시도하는 모험이나 적극성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넘치는 사랑의 손길 앞에 감동받아 녹고 깨어져서 그 분 앞에 엎드리는 항복의 상태요 그 방향에서 사는 삶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깨끗하고 숭고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바라시는 그 하나님의 언약 관계 속에서 사는 삶입니다.
믿음의 교차로(창 12:1-5)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여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아브라함을 그 머리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은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가지고 믿음의 표본으로 등장시켜 놓고 있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과 아브라함의 자손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므로 전에 상상치 못했던 땅 가나안을 향해 그의 인생을 출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란 땅이라고 하는 도시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하란은 지리상 교차로입니다. 동쪽으로는 앗수르의 니느웨가 있습니다. 서쪽으로 내려가면 헷족속의 압렙포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됩니다. 이 하란 땅은 사면팔방으로 통하는 무역로의 교체지점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우르보다 훨씬 번창한 곳이며, 살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본문 11장 32절에 보면 데라는 205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란 땅은 그래서 떠나왔던 곳을 향하여 다시 되돌아가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 땅을 목표지점으로 해서 전진하든지 어떤 결단을 내려야하는 분기점입니다. 이 양자택일의 분기점인 하란에서 그 아비 데라는 죽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가 되는 때였습니다. 12년 동안 머물러왔던 세월이 거기에서 멈춰버렸습니다. 맨 처음 떠날 때 마음먹었던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환상도 기대도 끔도 이제 다 지쳐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상실한 꿈속에 이미 그 땅 하란은 아브라함의 정착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매여있지 않는 순간은 곧 사단에게 매여있는 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5절에 보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밀고 끌고 힘들게 설득해소 그를 항복시켜 가나안까지 오게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왔다는 뜻입니다.
빼앗길 수 없는 소유-믿음(창 12:10-20)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자로 출발해서 그의 인생을 하나님에 의하여 떠밀려가는 모습을 창세기 12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뜻으로 난 땅이요 아브라함의 계획으로 난 곳이 아닙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가나안 당까지 왔지만,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아브라함입니다. 중간 지점에서 아비 데라가 죽었습니다. 아직도 낯 설은 땅에서 생사에 대한 긴장과 불안이 엄습해 오고 있는 처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달려온 길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기근이 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 중에서도 하나님이 그를 보호해 주실 것을 믿어야 했지만 그 수준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기근이란 이유로 애굽으로 발길을 옮기게 됩니다.
그런데 아내 사래가 너무 예쁘게 생겼기 때문에 애굽의 바로가 아내 사래를 빼앗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겐 일단 목숨을 구하고 보자는 심산이었고, 이렇게 될 바엔 부자가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바로가 아브라함을 불러서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였느냐고 따집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을 배우고 잇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바로 왕 마저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가? 그래서 나중에 아브라함은 다섯 고을의 연합군과 싸우러 나가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 부르시는 곳에서 네 자신을 달라. 너의 독자 이삭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해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수준에 있느냐에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긴 것만큼 요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감당할 만큼입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관심과 손길 때문에 우리는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한 두 번 실패하고 좌절한 것 때문에 인생을 포기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 폭을 넓혀가는 좋은 찬스입니다.
3. 롯이 떠난 후에(창 13:14-18)
이제 아브라함은 애굽을 떠나서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지경에 벧엘이라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조카 롯과 함께 길을 떠나온지 수년이 흘렀을 것입니다. 이제 자기들의 소유가 많아졌습니다. 조카 롯의 목자와 아브라함의 목자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서로 다투게 말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애굽으로 내려간 불신앙의 길에서 이토록 아브라함의 생애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고령의 70세인 아브라함에게 롯은 큰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지해왔단 인간적인 방편이었습니다. 이제 롯과 헤어진다는 것은 아브라함은 홀로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그 애굽의 부끄러운 곳에서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는 그 불충한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인자하심과 긍휼에 풍성하신 손길을 느꼈습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그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인내를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그가 의지했던 인간적인 도움을 다 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그의 선택기준이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고도의 신뢰를 가지고 모든 환경을 초월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뒤에 14일이면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만 하나님은 40년이라는 광야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자 40년이라는 긴 광야의 고달픈 삶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보다 더 긴급하게 가져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요, 영생이며, 그 나라의 상급입니다.
4. 아브라함의 의(창 15:1-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318명으로 대규모 연합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승리 뒤에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의 행위 뒤에는 언제나 의심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처음부터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도 생활도 아니었던 전혀 생소한 것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신앙인으로서 달래는 불안을 하나님이 어떻게 달래십니까?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 아브라함의 문제는 환경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것입니다. 두려움의 뿌리는 죽음입니다. 성경으로 돌아오면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의 상태요, 그 상태를 바로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는 인생은 영원한 두려움과 불안과 허물과 절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다메섹 연합군을 이기게 한 자가 바로 나 여호와 하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너의 방패였노라고 하십니다.
약속과 믿음에서, 조상국
1.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창 11:27-12:9)
하나님께서 셈을 축복하셔서 친히 셈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셈을 통하여 야벳도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신 이 선언(창9:26-27)은 아브람에게 주신 축복 창세기 12장의 축복을 반영한다. 아브람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조상인 아담과 노아와 셈에게 주셨던 것으로서 이제 더욱 좁혀져 아브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과 더불어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던 갈대아 우르는 아브람 시대에 전형적으로 자연종교가 번성한 지역이었다(수 24:2). 하나님은 저주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축복하실 수 없었다. 그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를 이끌어 내셔서 축복하셨다.
하나님의 축복은 아브람의 순종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간다. 아브람은 오직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에 대한 집념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여 떠났다(히 11:8). 다른 현실적인 계산은 아브람의 결단에 중요하지 않았다. 아브람은 초기에 약속의 땅에 비로소 도착하였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약속된 장소였으나 이미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나안 땅에서, 세겜 땅 모레에서, 또 벧엘 동편 산에서, 그리고 남방으로 떠돌았다. 그러나 다시 하란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가 순종하여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그가 바른 영역에 들어왔음을 확인시켜 주셨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그곳에서 단을 쌓았다. 아브람의 축복 사건은 성경 여러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축복이 단지 아브람 개인의 영화를 위한 약속이기보다는 그 안에서 축복을 나누게 될 아브람의 후손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3;7-8절에서 바울은 아브람과 같이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아브람의 아들들이라고 지적함으써 아브람에게 선언된 축복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축복이라고 언급하였다.
아브람에게 주신 이 축복의 선언은 신약적 맥락에서 복음을 뜻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8에서 아브람에게 주신 이 축복의 약속이 바로 복음이라고 말했다.
2. 약속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창 12:8-13:4)
하나님이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 세 가지 약속을 제시하셨다. 그에게 영원한 유업이 될 새로운 땅을 주시겠다는 것, 자녀가 없었던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룰 자손을 주겠다는 것, 그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브람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정착하여 얼마간 거처하다가 점차 남방으로 이동하면서 살았다. 지시된 땅에 왔지만 땅을 약속으로 받았을 뿐 그곳에서 나그네였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찾아왔다. 자연적인 비와 이슬에 의존한 농경사회에서 가뭄으로 더 이상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멀리 떨어져있지만 물이 풍부한 지역이었던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애굽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거하라고 약속한 땅이 아니었다. 만일 아브람이 애굽에 정착한다면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땅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애굽 땅으로 떠난 것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집념에 있어서 후퇴를 뜻한다.
아브람은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갔다. 비록 풍족한 물과 풍요는 있었으나 보호나 약속이 없는 위험한 땅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람은 곧 가뭄보다 더 큰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면 아브람의 선택에 드러난 불신앙적인 행동, 곧 아브람이 약속의 땅을 잠시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그를 버렸는가? 사래는 바로의 후궁이 되어 버린듯하고, 사래 없이 아브람도 이제 애굽을 떠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는가.그러면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의 성취를 위해 능력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바로와 바로의 집에 아브람과 사래 때문에 큰 재앙, 곧 심각한 질병을 유발시켰다. 바로는 결국 아브람에게 추방명령을 내렸다. 그는 왔던 경로를 따라 애굽에서, 남방 곧 네게브로 그리고 다시 네게브에서 여기저기를 이동하다가 결국 벧엘과 아이 사이, 이전에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그 약속이 땅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창 13:4).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던 아브람과 사래의 대처방법이 오히려 그들을 덫에 빠져 더 얽히게 만들었다.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그의 거짓말과 불신앙 때문에 빠진 수치 중에도 아브람은 사래 때문에 많은 재물을 얻었다. 수치 중에도 재물을 얻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축복의 약속은 신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맥락에서 첫째, 아브람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의 성취가 방해받지 않았다. 둘째, 아브람과 사래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 덫에 빠져 더욱 얽혀들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그 덫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정직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붙잡는 것이다.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이것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3. 선택(창 13:5-18)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아브람의 소유는 갈수록 늘어갔다.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의 근거에서 아브람의 그늘에 있던 조카 롯도 그 풍요를 함께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유가 늘어나면서 이전에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였다.
아브람은 롯을 마치 아들처럼 생각하면서 그의 후견인이 되어 그를 양육학도 보호해 왔던 것 같다. 롯은 아브람의 막내 동생의 아들이었다. 아브람의 막내 동생이었던 하란은 롯을 낳은 후 본래 그들이 살던 하란에서 자기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롯을 자신의 아들처럼 데리고 살았다.
그러나 그 풍요가 아브람의 사람들과 롯의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목축을 통하여 생활하던 그들에게 점차 양떼와 소떼가 늘어나면서 벧엘과 아이 사이의 땅이 줄 수 있는 목초지와 샘으로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그네로 살면서 원주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어느 정도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안전의 요구보다 소유로 인한 갈등이 더욱 신화되어 특별한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브람은 롯의 후견인으로 그에게 자신의 한 부분을 떼어 줌으로 명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브람은 롯에게 원하는 지역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관대한 제의는 아브람이 마치 롯을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기는 애정을 표현한다. 롯은 아브람의 제의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롯의 선택은 창 13:10의 애굽 땅과 같았더란 말에서 그 내면적 의미가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애굽을 선택한 것이었다. 롯은 선택을 위한 고려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고려되지 않았다. 롯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영역을 선택하여 그곳에 거주하면서 자연적인 풍요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람이 무엇을 선택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브람의 선택의 내면적 동기는 롯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주된 동기는 바로 하나님 약속에 대한 집년일 것임에 분명하다. 롯이 떠난 이후 아브람이 섭섭했다면 롯의 이기적인 결정 때문이기보다는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왔던 조카 롯과 떨어져 생활하게 된 것 때문일 것이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 마치 외동딸을 시집보낸 아버지처럼 호전해 하는 아브람에게 그의 선택이 하나님이 약속에 의한 것이 분명하므로 하나님께서 머넞 나타나셔서 아브람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격려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의 세 가지 축복 가운데 두 번째인 땅에 대하여 이번보다 더 분명하게 세심하게 확인하셨다(창 12:7/13:14-15, 17). 롯이 떠난 후 아브람은 자신의 자손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확신을 가지도록 요구받고 있다(창 13:16).
거주지를 선택하여 헤어진 후 아브람의 행동은 롯의 행동과 극한 대조를 이룬다. 창 13:12-13에서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는 말로 정리되는데 아브람은 창 13:18에서 아브람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오늘의 맥락에서 아브람의 산택은 하나님의 약속의 관점에서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관대함이나, 특히 유산이나 재물 문제에 있어 그리스도인이 가족 친지에 대하여 행해야 할 관대한 태도에 대한 지침 제시 그 이상의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애굽과 소돔의 선택이 옛사람으로서의 이 세상 삶의 원리라면, 약속의 땅에 대한 집념은 바로 믿음의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미래에 대하여 책임져 주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구원과 축복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생각, 그리서 그 신앙 때문에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조차도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4.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창 14:1-15:1)
롯은 영적인 차원에서 약속의 영역 밖으로 나갔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보호와 축복의 영역으로부터 떠나 있는 것이다. 롯은 세상의 안정과 풍요를 추구하는데 눈이 멀어, 자신이 서 있는 장소가 심판의 장소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이 주변 지역 전체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엘람 왕 그돌아오멜은 소돔 왕으로 조공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소돔 왕은 주변 4군데 지역의 오아들과 의기투합하여 그동안 종주권 행사를 해왔던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게 이제 더 이상 조공을 줄 수 없다고 하면서 대항하였다. 이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은 그와 동행한 세 나라 왕의 군대와 함께 출정하였다.
그돌라오멜은 마침내 싯딤 골짜기에서 소돔 동맹군과 결정적인 교전을 벌었다. 소돔 왕과 그의 동맹국 왕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적 조건에서 엘람 왕 연합군과 싸웠음에도 패하여 많은 군사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약탈당하였다. 롯과 롯의 가족과 롯의 재산도 예외일 수 없었다. 롯은 영원히 보장되는 안정과 풍요를 찾아 소돔에 정착했으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만약 아브람의 구출 작전이 없었다면 그는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롯은 완전히 수동적으로 아브람과 연관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다.
아브람의 가속들 호위대 318명과 오합지졸 민병대는 밤중에 기습 공격하여 약탈당한 모든 재물과 사람들을 되찾았다. 아브람의 기적과 승리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승리였다. 아브람이 대승을 거두고 돌아올 때에 하나님의 제사장인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하하기 위해 나왔다. 히 7:1-4에서 멜기세덱은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되고 있다. 멜기세덱의 등장 자체가 이 전쟁의 승리를 안겨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삶, 박영선
성경의 초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되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판과 멸망을 좌초한 인간의 운명을 바꿔 구원과 복과 승리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을 나타내시고자 아브라함을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창12:5-9에 간단하게 묘사되는데 세 지명이 특별히 선택된 것을 알 수 있다. 세겜(창12:6)과 벧엘(창12:8), 남방(창12:9, 남쪽이 아니라 지명 이름, 창23:19에는 헤브론).
야곱이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파난 갔다가 고향으로 귀향하는 여정에서 다시 중복되어 나타납니다(창 33:18-20, 창35:14-15, 창35:27). 이러한 이유는 야곱의 생애와 여정이 이미 아브라함 안에서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기사에서도 다시 반복됩니다(수 7:2, 수 8:9, 수8:30). 에발산은 세겜 땅에 있는 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신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충만하심으로 부름을 받는 구원인 것입니다.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골 2:8-1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법과 책임이 요구되는 율법 체재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복주심의 능력이라는 놀라운 영적질서와 원리와 기반과 약속 속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귀중한 자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는 어떤 근거나 믿음이라는 것까지도 원인이 되어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유이시고 원인이 되셔서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롬 4:20-22).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믿음의 법칙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일들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두 가지 걸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은혜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무책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존심입니다.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것을 못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일만 이루어 주시면 남은 생애를 주를 위하여 바치겠습니다 라는 발언은 가장 경계해야 할 발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너희를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서 구원한 것은 너희가 구원의 원인과 결과를 이룰 힘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설명을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구원을 얻기 위한 원인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 은혜의 자리로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이유와 원인가 근거가 되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원인을 만들거나 책임을 지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반응하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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