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떤 교수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영혼을 잃을 거이고,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애쓰면 생각을 잃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 1 부 성부 하나님
제 1 장 하나님의 위대하심, 브라이언 채플
결국에는 모든 것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 곧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과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제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정명으로 맞서기 위한 훈련, 이 들을 절대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결국에는 우리 인생의 이야기가 잘 될거라고 완전히 믿지만 동시에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아무리 가혹한 상황에 직면할지라도 직면해 이겨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주의 소망은 인본주의적인 희망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인본주의의 희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거룩한 소망, 곧 인간의 능력이나 결심이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서 비롯되는 소망이다.
아브라함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사라는 임신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무능력함을 직시해야 했다. 아브라함이 가혹한 현실을 믿지 않았다는 말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그는 하나님의 인격을 믿었다. “나는 왜 계속 믿는가? 나는 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상황이 도와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에 대한 약속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 상황을 돌아볼 때 하나님을 신뢰할만한 이유가 전혀 발견되지 않지만 나는 그분의 인격을 믿기에 그분을 신뢰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상황에 의존해 하나님을 신뢰하려고 하면 깊은 절망을 맛볼 수밖에 없다.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상황을 보았더라면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위대하심을 믿을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믿음의 근거는 상황이 아니다. 내 믿음은 하나님의 인격에 근거한다. 그것이 내가 모든 것을 견디는 이유다.
그런 소망을 지탱해 주는 믿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선하실 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상황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여도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확신에 근거한다. 바울의 말대로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롬 4:20).
아브라함은 무엇을 확신했는가?
그의 선함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확신했다. 자기 자신의 위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자신에게 희망을 걸지 않았다. 이것이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으로 옷 입는다는 진리다. 그에게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뿐이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의 결말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는 데 그쳐서는 곤란하다.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섭리를 믿어야 한다.
나는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고 말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네 죄가 용서받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약속을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내 믿음이 불완전해도 믿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른 것이 모두 나를 버리고 그 무엇에도 희망을 이길 수 없을 때 나는 그리스도를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만을 의지한다.
2장 하나님의 거룩하심, 리처드 필립스
우리는 거룩함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속하지만, 그분의 거룩하심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뷴의 창조하신 피조물과는 엄격하게 구별되는데 그분의 절대적 초월성을 가리킨다.
스프로올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초월하신다는 의식을 가리킨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지고하고 절대적인 위대성을 의미한다. 초월성이란 하나님의 지고한 위업과 지극히 높으심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사무엘하 6장에 기록된 사건이란 다름 아닌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일이었다. 언약궤는 그룹 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뷸리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출애굽 기간 동안 모세가 언약궤가 출발하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외치고, 하루가 지나 언약궤가 움직임을 멈추면 ”여호와여 돌아오소서.“라고 외쳤던 것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윗은 시편 24편에서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기로 작정하셨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기 위한 수단을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상징물로 삼아 자신의 존재와 속성을 드러내셨다.
언약궤는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상징하는가?
첫째, 언약궤는 하나님의 통치권, 곧 그분의 주권적인 왕권을 나타낸다.
칼빈은 ”언약궤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기 원하심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둘째, 언약궤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싱징한다.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안약궤 앞에 서서 회목제로 희생된 제물의 피를 그 뚜껑 위에 뿌렸다. 백성들은 그런 행위를 통해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알았다.
셋째, 언약궤는 하나님의 계시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언약의 계명이 적힌 석판이그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출 25:16, 신 10:1-5).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려면 그분이 언약궤를 통해 나타나신 것들을 알아야만 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백성의 통치자요 화해자요 계시자이셨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삶과 예배의 중심이었다.
블레셋 족속이 침략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언약궤를 앞세웠다. 그들은 “언약궤를 가져오자 우리는 힘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이곳에 모셔와 우리의 목적을 위해 활용하자”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블레섹 족속은 언약궤를 다곤 신당에 가져다 두었다. 그러자 심각한 사태가 빚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을 끊어버리심으로 이스라엘이 패배한 이유가 블레셋 족속이 강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약대상 13장 3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울 왕 당시 언약궤를 보지 못했다고 진술한다. 통일 왕국의 왕이 되어 보좌에 오른 다윗은 참돤 믿음을 회복시키기 원했다.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 제도와 언약적인 삶을 회복하기를 바랐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함께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지극히 존귀하고 거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참된 예배를 강조하고 중요시하는 것은 곧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결코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지루해지기는커녕 큰 경외심을 느낀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절대 실망스럽지 않다. 블래키는 이렇게 말했다. “다윗과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행복을 느꼈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얻어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 모든 사람의 특징이다.
새수례를 사용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 귀한 물건을 옮기려 했던 의도를 드러낸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무지로 인해 초래되는 위험
민수기 4장 5-15절에 따르면 언약궤는 고핫 자손의 레위 지파 사람들만이 운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언약궤를 다루는 일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 언약궤를 운반하려면 일단 염소 가즉(해달의 가죽)으로 그것을 덮어야 했다. 그 이유는 언약궤를 볼 수 있는 권한이 없는데 그것을 보는 경,우 죽음의 형벌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웃사의 사건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그 일이 전혀 생소하게 느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백성이 스스로를 더럽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예배의 기본 요소에 무지한 것이 그런 실패의 원인이 아니었겠는가?
블레셋 족속은 언약궤를 없애려고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운반했다. 다윗이 언약궤가 안치된 아비나답의 집에 도착해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언약궤를 운반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그들은 “언약궤가 처음 우리에게 올 때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 왔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다윗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례는 세상의 관습이 아무리 좋게 보여도 그것으로부터 예배에 관한 개념을 이끌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경고한다.
웃사의 죽음은 결코 사소한 실수갸 아니었다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였다고 말씀한다. 웃사가 죽은 장소는 베레사 웃사라 일컬어졌다(삼하 6:8).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진노는 항상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성경은 웃사의 죽음을 대하는 다윗의 태도를 솔직하게 기록한다. 다윗은 하나님이 웃사를 치신 것을 분하게 여겼다. 디윗의 분노는 부분적으로 언약궤를 운반하는 행렬이 도중에 중단된 것에 대한 당혹감의 표출이었다. 웃사가 거룩한 언약궤를 만진 것이 영웅적인 허신의 행위가 아니라 고만하고 주제넘은 죄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반란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웃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놀라는 이유는 정의와 은혜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면 우리는 크게 분노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항상 은혜를 빚지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삶을 위한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곧 우리의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계획하셨다.
그분이 이곳 세상에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이유는 하늘나라에 적합하게 만드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고, 우리를 훈육하고 징계하신다고 해서 그분이 우리를 더 이상 긍휼히 않으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대할까? 잘못을 저질러 놓고 다윗이 분노를 드러낸 것은 잘못이었다. 웃사의 죽음에 대한 그의 두 번재 반응도 잘못이기는 마찬가지였다(삼하 6:9-10).
하나님이 그렇게 거룩하시다면 어느 누가 감히 그분을 대할까? 다윗은 결과적으로 이렇게 말한 셈이다. “언야궤를 멀리하자. 죄를 엄히 다스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보다는 그분의 참된 계시를 외면하는 편이 더 낫겠다.”
3장 하나님의 진리, 케빈 드영
진리는 기독교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에서 진리가 복음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11-14절).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진리에 관한 세 가지 오해가 있다
오해 1: 진지함이 진리의 척도다
바울이 빌립보서 1장 15-18절에서 말한 내용은 진리에 과한 요즘 문화의 개념을 거꾸로 뒤집는다. 우리 자신과 문화가 중요시하는 것은 ‘그는 참으로 진지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더러 진지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진리를 말하고 복음이 전파되니 그것으로 나는 기쁘다’라고 말했다.
오해 2: 겸손은 확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말을 자신있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권위자인 것처럼 말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성령께서는 회의주의자가 아니시다. 그분이 우리의 마음에 기록한 것은 의심이나 견해가 아닌 확신이다. 이 확신은 감각이나 삶 자체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하다고 말했다.” 겸손은 확신없는 태도를 수반하지 않는다.
오해 3: 우리가 가진 것은 해석뿐이다
성경 말씀은 백성들이 반응하며 회개하고 순종해야 할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십자가 사건과 구원을 받는 방법에 관한 교리를 우리에게 명료하게 주어졌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조명하시고 성경 말씀을 이해하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원하시는 목적을 이루신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진리
그 진리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을 알라기를 원하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신다.
윌리엄 틴테일은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밀씀하신다.”
우리 시대를 잘 묘사한 말이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찾는다. 문제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히 3:15, 요 10:27).
문제는 우리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 있는 쟈는 들으지어다(마 11:15)라고 말씀하신다.
4장 하나님의 진노, 리차드 필립스
히브리서 저자의 관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박해를 당했던 시기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유대인들이 불신앙으로 돌아서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고의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27절)고 경고했다. 이 가르침은 지옥의 실재 및 그 본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옥의 실재
우리는 대개 선을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안겨주는 것은 무엇이든 가장 큰 선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큰 선이다. 지옥의 형벌을 가하시는 그분의 진노하심을 비롯해 그분의 완전한 속성이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이다.
영혼멸절론자들은 대개 지옥과 연관된 불이 고통을 가할 뿐 아니라 대상을 소멸시켜 완전히 없앤다고 말한다. 이들은 빌립보서 3장 19절이나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 등 멸망의 주제를 다루는 성경 구절을 그 증거로 다루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
히브리서 10장은 하나님의 심판을 확실하게 증언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사랑의 하나님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그 대답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분의 의로움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 악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을 내포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접해보면, 그 사랑이 악하고 파괴적이고 더러운 것들을 단호히 거부함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객관적이고 도덕적인 아게 대한 필요하고도 저의로운 반응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다. 심판과 진노를 부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죄를 징벌하신다는 개념을 반대하는 것과 같다.
히브리서 10장 26절에 짐짓 죄를 짓는 것, 고의로 죄는 짓는 것은 베드로전서 5장 2절에 억지로 하지 말고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죄로 인해 고민하거나 영적인 삶을 방해하는 끈질긴 죄에 시달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구절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명령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악한 마음으로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가리킨다(잠 2:13-15).
레옴 모리스는 이 말씀을 아래와 같이 주석했다. 히브리서 저자가 배교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자들에게 관해 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했다.
구원이 행위에 근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행위와 변화는 조건이 아닌 결과로서 구원에 반드시 필요하다. 구원은 필연적으로 삶의 거룩한 변화를 수반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적인 감정론에 보면 지난 날에 뜨거웠던 감정이 구원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오직 실천하는 믿음과 성경적인 열매만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성경적인 확신의 근거(변화된 삶의 열매)는 무시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열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
타락자는 회개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믿음을 저버린 배교자들이 있다.
히브리서 10장에 나타난 배교자들은 악하게도 세 가지를 거부한다(29절).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거부하고(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속죄의 피를 거부하고(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셋째는 복음을 허락하신 성령을 거부한다(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이 가운데 세 번째는 마태복음 12장 32절에 언급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거부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 기도를 드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이렇게 주석했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인 죽음을 겁내는 사람의 두려움이 아니었다. 이것은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느끼셨던 두려움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셨고,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단절되는 진노의 고통을 감당하셨다. 그분이 희생하신 덕분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그 진노를 감당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제임스 패코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육체적인 고통도 지극히 컸지만 가장 크게 느끼신 고통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었다. 이 일곱 시간에 걸친 경험이었지만 그 고통은 영워한 고통, 곧 매순간이 영원 그자체일 정도로 큰 고통이었다.
십자가는 죄의 현실은 물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를 분명히 보여 준다. 그 밖에도 십자가는 ”어떻게 진노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한다. 성경에 따르명 십자가는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깊고, 넓고, 큰가를 잘 보여 준다.
5장 히나님의 사랑, 브라이언 채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그분과 일체가 되었으니 이제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 목적은 삶과 행위와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사망 진단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롬 6:2).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은혜가 역사하는 까닭에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사망진단서는 무엇일까? 바로 세례다. 3절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함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한다.
세례는 세상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사실과 그분과의 연합을 통해 과거의 우리가 모두 죽었다고 선언하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과거의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죄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죄책과 정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의 죄로 인해 정죄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옛본성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괴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획득했고 하나님께 예수님만큼 보배로운 존재가 되었다.
새로운 소명
의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댜(롬 6:12, 13).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으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는 도구와 무기를 하나님이 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청교도들이 말한 믿음의 길이란 성경을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그 말씀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하나니의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소유할 꿈조차 꾸지 못할 능력이 부여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죄를 능히 거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해서 살아가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
존 오웬은 죄의 본질은 사랑의 결핍이라고 했다. 죄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우리가 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죄의 권능이 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면 그 마음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보다 더 큰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는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 그분에 대한 사람이 물밀 듯 이;일어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면 그분의 계명을 키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노예가 되지 말라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이렇게 말햇다. ”너희에게 새로운 소명이 주어졌다. 그 소명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살며 그분 앞에서 명예롭게 살기 원하는 동기가 주어졌다. 또한 우리를 대신해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그분을 사랑할 수 잇다. 여기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동기를 한 가지 더 찾는다면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형제의 소명은 형제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지를 아는 것이요,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기억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시는 분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오“라고 말했다.
2부 성자 하나님
6장 성자의 영광, D.A. 카슨
일반적으로 많은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마리아와 관계를 맺어 예수님을 낳았고, 삼위일체는 하나님과 마리아와 예수님으로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이란 비유적 표현이 분명하게 사용된 곳은 출애굽기 4장 22-23절이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내 장아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이스라엘은 집단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 갸념이 호세아 선지라를 통해 예수님과 결부되었다(호 11:1).
다윗 왕도 때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다(시편 2편, 삼하 7:14). 선한 천사아 악한 천사에게도 하나니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적용되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분 앞에 나왓고, 사탕도 그 가운데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니님의 아들로 불렸다. 요한복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묘사하나. 바울 서신은 예수님을 아들로, 우리를 입양된 아들로 묘사한다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못 사건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성자께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셨다. 특히 성부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니 성자께서도 안식일에 일하신다(요 5:16-18).
2세기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39개의 범주로 나눠 법률화했다. 안식일에 금지된 것은 특별히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깨에 짐을 질고 날라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집 안에서는 물건을 날라도 괜찮지만 한 지에서 다른 집으로 물건을 날라서는 안되었다. 그것은 금지된 일에 해당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성자께서는 성부에게 하시는 일을 행하실 권리를 가지셨다고 주장하셨다. 특히 성부처럼 성자께서도 안식일에 일을 하신다고 말이다.
유대인들이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요 5:18)는 말로 예수님을 비난한 것과 예수님이 의도하신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자께서는 성부께 순종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니이 둘이라고 주장하기는 커녕 비록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과 모든 면에서 동등하시지만, 성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하시는 것만을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부에 대한 순종 모두를 강력하게 증언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1-2, 8:58, 14:9/ 5:30, 8:29, 14:31).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니다. 너희는 아브라함의 조상이라고 내세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요점은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도 동일한 논증을 펼쳤다. 누가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인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닌 나들이다. 혈통이 아닌 행동이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에 근거한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예수님은 하나님의 행위와 자신의 행위가 서로 일치한다고 주장하시면서 기능적인 순종의 ᅟᅪᆫ계를 명시하셨다.
이런 사실로부터 특별히 중요한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성자께서는 순종을 통해 성부를 항상 나타내는 방식으로 행동하신다. 성부께서 명령하고 행하시는 일을 성자께서 순종하심으로 그대로 행하신다. 둘째, 성자를 통해 나타난 성부의 자기 계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성자를 향한 성부의 사랑에 먼저 초점을 맞춘다.
성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성자에게도 그 속에 생명이 있도록 허락되었다(요 5:26). 성부께서 성자에게 모든 것을 보이시고, 성자께서 성부가 명령하신 일을 모두 완전하게 행하시는 이유는 서부와 성자께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아들 되심의 본질이다. 성자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일뿐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다고 주장하셨다.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무엘하 7장에서는 왕을 가리킨다. 또한 문맥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나 예수님(단 7:3을 가리킬 수가 있다. 인자는 또한 인간과 동일한 이미로 사용된다(시 8:4).
성부께서 하지 않으시는 일이 한 가지가 있다. 그분의 인간의 경험을 공유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성자에게 심판을 일임하였으며, 성자께서 심판을 독자적으로 베풀지 않으신다.
제 7장 성육신 하신 말씀, 조엘 비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말씀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으로서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다(요 8:58).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말씀, 곧 영원히 스스로 있는 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스런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성부와 성령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다. 18절은 아버지 품속, 성부와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신다고 묘사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그 말씀메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고 그 말씀의 음성 듣기를 기뻐하신다.
우리의 구워이 아무리 귀해도 하나님의 가장 큰 동기는 아니다. 그분의 가장 큰 동기는 성자의 영광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온전한 신적 말씀이시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육신이 된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증언한다. 요한복음 1장 6절을 비롯해, 12, 13, 18절의 하나님은 헬라어 정관사가 없는 형태로 사용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하신다(요 14:9, 사 9:6, 10:20, 21).
믿음이란 예수님을 의지하고 , 신뢰하고, 경배하고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치고, 그분께 나를 온전히 맡기고, 그분을 나의 전부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유한자인 인간의 몸과 영혼을 입으신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온전한 신성을 취하셨다는 뜻이다. 바울은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그리스도의 육신은 그분의 살과 피를 의미했다(요 6:51-56). 요한은 요한일서 4장 3절과 요한이서 1장 7절에서 이단 사상을 논박했다.
복음은 단지 정신적 개념이 아닌 사실과 사물을 다루는 객괸적 실체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믿음의 성장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예수님은 ”나는 너를 구원하고, 너희의 육체를 영광스럽게 만들어 영원히 영공 중에서 육체와 영혼으로 나를 경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을 취하셨다
성경에서 육신이라 단어는 인간의 사고 방식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육신은 인간의 사고 방식을 가리킨다(요 8:15). 또한 육신은 성경에서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가리키기도 한다(요 1:13).
그리스도는 인간의 죽음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들을 자신의 죽음으로 화목하게 하도록 육신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목적은 세상을 위해 자기 살을 내주어 생명을 주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두 가지 일을 행하셨다. 먼저 그분은 우리의 죄 갓ㅂ을 치르셔야 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에 수동적인 순종을 하셔야 했다(갈 3:13).
또한 그분은 우리를 위해 율법을 온전히 이루셔야 했다. 그분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라하는 적극적인 순종을 실천하셨다(롬 5:19, 갈 4:4).
주님을 영원히 믿고 섬겨라
선생님, 노예를 사기 위해 그 어떤 사람이 디불한 돈 보다 더 맣이 지불하지 않았나요? 단지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사신 것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그렇소"라고대답했다. 그녀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올려다 보면 한 자기 청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노예가 되어 영원히 선생님을 섬기면 안될까요?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이도 그런 태도를 취해야 한다.
8장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이안 더귀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무롤 주려 함이라(막 10:45). 마가복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이 신약 성경에서 자신을 가리키는 칭호로 가장 자주 언급하신 것은 인자였디. 인자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유한한 인간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차이를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0장에 사용된 인자라는 용어는 예수님이 청중에게 다니엘서 7장의 영광스런 환상을 상기시켜 주었다(단 7:13, 140. 구약 성경에서 하느릐 구름을 타는 것으로 묘사된 존재는 오직 하나님 뿐이다(사 68:4, 사 19: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영광과 겸손이 모두 나타났다. 그분은 참 인간이요 참 하나님이시다.
종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인자일 뿐 아니라 또한 종이었다. 다니엘서 7장을 통해 기대되는 거과는 달리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이사야 52장 마지막 부분에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 올 고이라고 예언했다. 이사야 55장은 그의 패배와 고통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핵심은 자기 목숨을 대속눌로 내주는 것이었다. 대속이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지한다. 구약성경애 나온 가장 장엄하고 놀라운 다속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속박의 땅인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이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한때는 죄의 노예였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34).
\하나님은 친히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다(죽음과 지옥).
완전하고 거룩한 삶
하나님은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법률적 대가(완전한 거룩함)을 지불하셨다. 하나님의 기준은 단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전함이다. 하나님 앞에 서려면 온전히 거룩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다.
그리스도와 연합해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의 신분으로 그분의 가족에 속하는 순간, 우리의 죄과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분의 온전한 의는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한 변화
많은 시련과 유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심히 부패했다는 것을 더욱더 확실히 깨우쳐 주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것이 곧 성화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욕망과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사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속량하셨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하려 하여 우리를 어둠의 속박에서 건져내셨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유혹에 직면했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율법에 따라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어."라고 말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여전히 스스로 정죄하는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은혜는 작은 물방울이 아니라 장엄하고 거센 강물과도 같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의 죄도 모두 씻을 만큼 풍성한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은혜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 모두의 죄를 깨끗이 씻고도 남는다.
9장 그리스도의 십자가 : 조엘 비키
그리스도께서는 처음 세 시 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극심환 육체적 고통을 겪으셨고, 마지막 세 시간 돟안에는 내면의 고통을 감당하셨다. 어둠이 갈보라에 임한 이유는 중앙에 있는 십자가 위에 그분이 매달리셨기 때문이다. 구세주께서 그 세 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영혼으로 간내하신 고통은 우리의 모든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매딜리신지 거의 여섯 시간이 지난 후에 주어진 가장 극심한 고통은 성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신 고통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극심함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부르집음은 그분의 신성을 저금도 훼손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렇게 외치기 이전이나 그렇게 외치는 동안이나 그렇게 외친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한 인격 안에 두 개의 본성을 지닌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이유
하나님이 예수님을 상하게 하실 이유, 예수님이 그런 일을 담당하셔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로 죄인을 대신해 죄인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죄를 징벌해야 하는 공의의 원칙에 따라 그분을 처리하셔야 했다. 죄에 대한 심판이었다. 성자께서는 직접 죄를 짓지는 않으셨지만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진 탓에 죄에 대한 형벌을 당하셔야 했다(고후 5:21)_
그리스도의 고난의 배후에 있는 사랑
첫째, 그리스도의 버리심은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드러낸다. 토마스 왓슨은 “성육하신 하나님은 다름 아닌 육신을 입으신 사랑이시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으신 상태에서 울부짖으신 사실 양주고 하기신 주님이 제인들을 위해 기꺼이 그런 시련을 감수하셨다는 사실이 보다 그 그분의 사랑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
둘째, 그리스도의 버리심은 성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주 하나님은 독생자를 심판하셨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외면하신 이유는 그분에게서 죄를 발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그분의 계획과 뜻에 따른 것이었다 마침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에 의해 죄인이 되셨다 마침표 한인 하나님이 버림받으신 예수님이 버림받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버리심은 성령의 놀라운 사랑을 드러낸다. 성부께서는 성전의 휘장을 찢으셨고(막 15:38), 성자께서는 자신의 육체의 휘장을 찢으셨으며(막15:37), 성령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휘장을 찢으셨다(막 15:39). 성령께서는 백부장의 눈을 가린 비늘을 벗기고 그의 마음에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의 참된 신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군중 사이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도다”(막 15:39) 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성령께서는 여전히 휘장을 찢는 사역을 행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내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할 수 있게 하신다.
10장 부활하신 구세주 : D.A 카슨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부활 기사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것이 사도의 의심에서부터 시작한다니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이 죽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이 부활하실 거라고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거듭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그런 일 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메시아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정복자인 왕의 관점에서 생각했다.
절망한 회의주의자의 부르짖음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메시야는 고난 당하는 종이나 죽음이나 부활과 같은 주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크기 메시아는 오직 정복자인 왕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메시아가 수치와 불명예를 안고 십자가에서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처형되다니?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다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메시아는 결코 죽지 않는. 그런 메시아는 승리하며 민족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다른 제자들에게 도마에게 찾아와 주를 보았다고 말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애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4-25).이것이 그가 절망한 회의주의자로서 그렇게 외쳤던 이유였다.
깜짝 놀란 회의주의자의 찬양
도마가 실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네 손가락을 이곳에 넣어 보라. 내 손을 보라. 네 손으로 옆구리를 만져보라. ?는 말씀을 들었을 때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생각한 뒤였기 때문에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첫째,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이다.
둘째 바울은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증인들이 모두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바울은 여기에 또 한 가지를 덧붙여 “너희의 믿음도 헛되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5:17)
’
3부 성령 하나님]
11장 생수의 강 : D.A. 카슨
요한복음 7장은 물과 생명을 연관시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본문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물을 연관시킨다.
생수의 강과 관련된 배경
요한복음 7장 37절은 “명절 끝날”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2절이 밝히는대로 이 명절은 초막절, 또는 장막절을 가리킨다. 초막절에는 예루살렘 시민 대다수가 텐트와 비슷한 작은 초막을 짓고 광야에서 방랑생활을 했던 것을 기념했다.
초막절은 7일 동안의 절기였다. 7일째 되는 날에는 대제사장이 손잡이가 달린 황금 주전자에 실로암 연못 물을 가득 채운 후 행렬을 지어 성전으로 가져갔다. 행렬이 성전 안뜰 남쪽에 있는 수문에 근접하면 기쁨의 나팔 소리가 세 번 울려 퍼지고, 제사장들은 그 문을 지나 손잡이가 달린 주전자를 들고 제단을 에워싼다. 순례자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성가대는 할렐루야(시편 113-118편)을 노래한다. 성가대가 마지막 시편(118편)을 노래하면 순례자들 중에 모든 남자는 버드나무와 도금양 나뭇가지를 한 손에 쥐고 흔든다. 오른손으로는 ‘롤라’를 흔들고 왼손으로는 추수를 기념하기 위한 감귤 열매를 쥐고 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왜냐하면 그분이 비와 양식을 주고 굶지 않게 하시고 갖가지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막절은 순례자 삶은 물론 수술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모든 사람은 매우 큰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3번 외쳤다. 아침 그런 다음에는 아침 희생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 물을 바쳤다 포도주와 함께 물을 하나님 앞에 부어드렸다. 초막절에 물을 붓는 이 의식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을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온 대지를 적시는 것을 상징했다. 구약성경에 몇 곳에 따르면 그곳은 메시의 시대에 대한 기대를 의미했다(사 12:3, 58:11; 겔 47:1-9, 36:23-27)
12장 성령의 시대 : 마이클 호튼
성전, 증인, 영광으로 나타나신 성령
성령께서는 성전이고, 증인이고, 영광이시다. 구속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창조의 본래 목적을 돌아보면 중앙 성소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때까지 , 곧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언약의 약속에 충실할 때까지 그분의 임재가 마치 동심원처럼 퍼져 나감을 알 수 있다.
성령 강림에 대한 예고
성부께서는 성자만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시고, 성자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예정이었다. 이사야서 61장 1, 2절에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할 것이라는 유명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성령 충만한 증인
증인은 성령의 능력 주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셨다.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 것이요”(눅 3:16)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한 증인이시다. 히브리서 1장 3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도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하신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에게 임하신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내면에 거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신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 자들은 산 돌이 되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이룬다. 그때가 되면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임하시고, 세상에는 땅끝까지 이르게 될 성전이 건설될 것이다.
오순절에 시작된 성령의 시대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에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하달하셨다. 그리고 나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이루어졌다. 오순절에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오순절에는 성령의 강림을 통해 온 민족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의 복음 안에서 연합했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의 언어로 그 복음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제자들이 각기 자신의 언어로 복음 전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오른편에 오르셨다. 베드로는 요엘서 2장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했다. 성령께서 모든 육체 위에 임하셨다. 베드로는 우리도 거기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13장 성령으로 거듭남 : 필립 라이콘
필립 리는 [개신교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논박]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전적 칼빈주의(개혁주의 신학)는 그리스도인의 구원 확신이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만 보장된다고 주장했지만 오늘날에는 거듭남이라는 개인적인 경험 안에서만 구원의 확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크나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칼빈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회심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천박한 교황주의(행위구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난미 안에서의 새 출생은 좀 더 새롭고 바람직한 자아로 거듭나려는 노력과는 장반대된다. 그런데 거듭났다 하면서 자아를 높이는 신자들은 새 출생을 그런 식으로 간주한다.
거듭남이 우리의 결정이나 행함에 근거한다면 우리의 믿음과 확신은 항상 우리의 영적 경험이라는 불안전한 토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새 출생이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시역에 의한 결과라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경험은 모두 성령의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성경이 가르치는 거듭남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은혜로 허락하시는 것이다.
중생, 구원의 필수요건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요건(새출생)이 결여되었다고 경고하셨다. 니고데모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종교인, 심지어는 교회에 다나는 신자들에게까지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가정에서 자랐고, 어떤 교회에 다니고 있고, 머리가 얼마나 명석하고, 어떤 교리를 신봉하고,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의미는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막ㄹ씀하셨을까? 위로부터 나야한다고 말씀하셨을까? 아마 두 가지 의미를 다 염두에 두신 듯하다. 즉 위로부터 다신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문제 :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자연인은 중생하지 못한 상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자연인은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 머무른다. 니고데모가 이를 보여주는 완벽한 본보기다. 그는 성경에 정통했지만 영생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상태였다.
니고데모에게 필요했던 것, 곧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아닌 영적 새 생명이다. 전적 타락에서의 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위대한 스코틀랜드 신학자 토마스 보스턴은 이 전적인 변화를 솜씨있는 의사의 행위에 빗대어 표현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졌다. 영혼의 기능이 모두…..뒤죽박죽으로 변했다. 그러나 주님은 중생을 통해 어긋난 관점을 다시 옳게 맞추신다”. 이것이 성령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고 믿고, 뜻하고 살 수 있는 영적 새 사람을 창조하신다.
중생은 가능한가?
새 출생은 구원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것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던진 두번째 물음이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바로 구원에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예수님은 새 출생을 묘사하실 때 수동태 동사를 사용하심으로 이 사실을 강조하셨다. 물리적인 출생이 부모에 으ㅟ;해 이루어지는 듯 영적 출생도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 니고데모가 새 출생을 의심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5, 6). 거듭남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D.A 카슨은 물과 성령을 하나의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과 생명을 주는 성령은 따로 분리된 두 개의 표현이 아니라 죄인의 영적 정화를 묘사하는 하나의 표현이다. 싱클레어 퍼거슨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새생명을 주심과 동시에 마음을 정화시킨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물 곧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처럼 물과 성령은 생명을 주고 마음을 정화하는 성령의 사역을 가리킨다.
물과 성령의 관계를 이와 비슷하게 묘사한 내용이 디도서 3장 4-6절에서 발견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사.”
14장 생명의 성령으로 사는 삶 : 하이웰 존스
이번 장의 제목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8장 1-27절과 관계가 있다. 로마서 8장 2절만 보아도 생명이 성령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더욱이 11절은 생명을 성령의 사역과 연관시켜 말한다.
거룩하고, 죽지 않고, 승리하는 성령으로 사는 삶
성령으로 사는 삶은 거룩한 삶이다. 성령으로 사는 삶은 종교적으로 사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거룩한 삶, 곧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고 교제를 나누는 삶이다.
성령의 삶은 거룩한 삶일 뿐 아니라 죽지 않는 삶이다. 로마서 8장 10절은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몸은 죄로 말아암아 죽은 것에서 이 죄는 아담의 죄를 가리킨다. 또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이라에서 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킨다.
11절은 이렇게 덧붙인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 안에 거하는 생명은 죽지 않는다. 그것은 부활의 생명이요 불멸의 생명이다. 그 이유는 둘째 아담, 곧 마지막 아담께서 생명을 주는 영, 살리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생명의 성령으로 사는 삶은 거룩하고, 죽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승리한다.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이제 우리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되었고, 성령께서 우리를 불의의 길이 아닌 의의 길로 인도하사 우리 안에 율법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것이 승리하는 삶이다. 우리는 의무를 행하지만 우리 자신의 힘으로 행하지 않는다.
자유와 인도하심이 있는 성령으로 사는 삶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생각하나니(5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은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이 둘은 서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전자에서 후자로 옮겨가는 것은 곧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통해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부께서 성령을 통해 속죄의 축복과 효력을 우리의 영혼에 적용하신다. 2절은 이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일컫는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거룩함과 확신과 기도
성령께서는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성령깨서는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도록 인도하시고(거룩함), 구원을 더욱 굳게 확신하도록 인도하시고(확신), 기도로 더 많은 위로를 얻도록 (기도) 인도하신다.
15장 보혜사 성령 : R.C.스프로울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니나”.
또 다른 보혜사란 말은 최소한 그 이전에 이미 보혜사가 존재했다는 의믜를 내포한다. 보혜사는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어떤 종류의 보혜사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의 삶 속에서 조언이나 충고를 제시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하실 분을 보내시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의 대언자, 우리의 변호인
파라클레토스, 즉 다른 보혜사란 우리 곁으로 부름 받은자, 대언자를 지칭한다. 또한 변호인을 가리킨다. 단순한 변호인이 아니라 가족 변호인, 곧 지속적으로 보수를 받으면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곁에서 도와 주는 사람을 뜻했다.
교회가 믿지 않았던 가르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더 낫다. 그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더 나은 이유는 그분이 가시는 곳 때문이다. 그분은 만왕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세상을 떠나셨다. 예수님이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하늘에 오르시어 그곳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하며 하늘의 성소에서 매일 중보기도를 드리시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성령께서 하실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8-11). 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을 우리의 마음에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사역을 수행하는 것일 수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죄를 깨우쳐 주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는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6:8). 성령께서는 죄로 인해 무능력해진 죄인의 상태를 깨우쳐 주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 온전히 충족한 효력을 발휘함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성령을 너희 곁으로 보내 너희를 깨우쳐 주시고, 또한 사람들에게 의를, 곧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깨우칠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님께서 자신이 떠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 자신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죄와 의와 심판을 깨우쳐 주실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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