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본문의 앞 단락에서 소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입니다. 저자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기는 AD 60년대인데, 네로 황제가 극악하게 기독교를 핍박하던 때입니다. 그 때로부터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250년이 걸렸습니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믿음을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오래 참고 믿음을 지키느냐 아니면 소망을 포기하고 믿음을 버릴 것이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았던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권면합니다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예를 들어주고, 또 그것이 가능한 이유와 근거를 제공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말 자체에는 그 약속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금방 이루어질 것 같으면 굳이 약속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원래 약속이라는 것이 나중에 이행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약속이 믿을 만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으면 그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하는 시점에서 보았을 때 그 약속이 지켜지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약속의 당사자는 그 약속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약속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약속의 이행이 어려워 보이지만,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표시로 맹세를 합니다. 약속 자체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그 의지를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데, 맹세가 효력이 있는 이유는 약속을 하는 사람이나 약속의 내용보다 더 큰 것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즉 맹세는 약속에 대한 보증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는데 그 약속이 상당히 믿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하시는데
자기보다 큰 자를 의지해서 맹세를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큰 이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가장 큰 자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다 보니 하나님이 자기 이름으로 맹세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그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케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늙도록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젊어서도 못 낳은 자식을 늙어서 낳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렇게 약속을 하셨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른 약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수 있겠지만, 이 약속만큼은 시간이 지나는 만큼 그 가능성은 작아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아내 사라나 몸이 하루 다르게 늙어가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오래 참아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민수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마음이 변하고 약속을 어기는 것은 인간이나 하는 일이지,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시면 굳이 맹세까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기보다 큰 이가 없기 때문에 맹세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자기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시면서 약속을 보증하셨습니다. 14절에 보면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이렇게 같은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약속을 확실히 하겠다는 의미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기다리다 지쳐서 소망을 잃어버리고 믿음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지요.
18절에서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이라고 말하는데,
이 두 가지란 약속과 맹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거짓말은 하나님의 속성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고 불의가 없으십니다.
배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귀를 가리켜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하셨습니다.
거짓말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하게 했던 장본인이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었지요.
이처럼 행위는 속성에서 나옵니다. 사탄에게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자기 것으로 말합니다.
즉 나오는 말이 모두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되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신 말씀은 신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을 가장 확실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죄악된 인간들이 자기가 처한 곤란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즉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인간의 소행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세 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되겠지요. 여기서는 그런 경우는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면 그것은 가장 확실한 약속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으시고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다 맹세까지 하신 이유는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하여금 큰 안위를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핍박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핍박은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언제 붙잡혀가서 모진 고초와 죽음을 당해야 할지 모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장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위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피하여 간다는 것은 피난간다, 또는 대피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가진 소망을 깨뜨리는 곳입니다. 우리 원수 마귀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의 소망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소망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대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소망을 잃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까 피난을 가야 할 만큼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이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튼튼한 것입니다. 닻은 큰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닻을 내려놓지 않으면 배가 물결에 이리저리 밀려다니게 되겠지만, 닻을 내려놓으면 배를 단단히 고정시켜 줍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든든히 붙잡고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이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고 믿음 안에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영혼의 닻처럼 튼튼하고 견고한 결과로 휘장 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이 소망인지,
소망을 가진 우리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문법적으로는 소망이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인데, 의미상으로 보면 소망을 가진 우리가 그 소망과 함께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이 되겠지요.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시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20절에서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가셨다는 것은 선구자, 또는 선발대라는 뜻입니다. 선구자는 먼저 가서 길을 개척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휘장 안으로 하나님 앞에 먼저 가셔서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누구나 아무 때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소망, 즉 하나님의 약속은 종말론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니까 핍박 가운데 있는 로마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은 변할 수 없고 거짓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으며, 또한 오래 참음으로 그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아야 한다고 얘기를 하는데, 결국은 그 소망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사실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것이라고 함으로써, 멜기세덱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오늘 이 로마의 성도들처럼 극한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지만, 때때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근심과 고통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얼마나 위로와 평안을 얻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척도가
될 것입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멀리만 느껴지고 우리에게 닥친 고난은 발등에 떨어진 것처럼 급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먹이 아니라 법에 의지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야 발등에 떨어진 고난도 견뎌내고 오래 참음으로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자의 최후의 선택이 아니라, 가장 크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방법입니다. 이 시간에 특별히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과 슬픔을 당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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