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손을 씻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엡 2:10)
성화: 죄악 된 옛 본성을 벗고 죄와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하게 되어 가는 것, 즉 죄 사함을 얻고 구원받은 인간(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 한 자)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는 칭의에 뒤따라서 성도의 마음과 삶 속에서 지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즉 거룩함 가운데서 자라는 과정으로, 개인의 성품과 삶 가운데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하고 싶지만 하기 싫은
성화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삶이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화가 잘 안되는 것 같다는 고민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성화되고 싶은 것은 맞지만, 더 이상 죄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습니다.
성화가 좋은 소식이라면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면 성화도 좋은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화하면 부담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의 책임과 죄의 오염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정의가 중요합니다. 성화는 죄를 씻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화란 무엇일까요? 성화란 죄의 오염을 씻는 과정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에 맞는 형벌이 따릅니다. 도둑질을 하면 벌금을 내거나 징역을 살기도 하고, 살인을 하면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이 죄의 형벌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시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죄의 형벌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죄의 오염은 남아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아빠가 다섯 살 짜리 자녀에게 사줬습니다. 손에 묻히지 말고 조심스럽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손과 얼굴에 아이스크림을 잔뜩 묻히며 놀았습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아빠가 “안 돼! 그만해! 라고 소리쳤습니다. 자녀는 깜짝 놀라서 아빠가 자신을 나무라거나 벌을 주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오늘 하루 TV를 보지 못하게 한다 거나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하는 형벌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아이에게 벌을 주지 않고 타일렀습니다. “아빠는 네가 아이스크림을 아무 데나 묻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빠가 용서해 줄 테니 앞으로는 그러면 안돼, 알았지?”라고 다독였습니다. 이 아빠가 방금 어떻게 한 것일까요? 죄의 책임, 죄의 형벌을 제거해 준 것입니다.
하지만 아빠는 “혼내지 않을 건데, 얼른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고 세수 좀 하고 오자! 라고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아빠는 왜 씻으라고 했을까요? 씻고 오라는 것은 죄의 형벌이 아니라, 죄의 오염을 제거해 주기 위함입니다. 자녀가 아빠가 용서해 줬다는 확신만 가지고, 씻지 않은 손으로 하루 종일 생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뮤무엇을 만져도 찐득찐득한 느낌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오염된 손으로 다른 음식을 집어먹으면, 맛도 이상하고 배도 아플 것입니다. 형벌은 없지만, 오염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빠가 씻고 오라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행복을 위함 입니다. 씻으면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씻지 않은 상태에 그대로 있으면 자녀가 오해를 하기 시작합니다. “왜 무엇을 먹어도 배가 아프고, 무엇을 만져도 찐득찐득하지? 아! 아빠가 나에게 벌을 내렸는가 봐. 아빠가 내 손에 이상한 것을 묻혀 놓았나 봐. 아빠가 역시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에게 벌을 내린 게 분명해!”이 모든 것은 오염된 손을 씻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입니다. 아빠가 손을 씻으라고 한 것은 내 삶에 행복과 상쾌함을 주기 위한 아빠의 사랑이지, 절대 강요나 억지 혹은 형벌이 아닙니다.
성화를 이해하는 핵심 1. 죄의 책임과 죄의 오염
성화를 억지와 부담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성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았는데, 성화가 억압과 답답함으로 느껴진다면, 아직 구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벌어들이는 소득에 감사와 만족이 전혀 없습니다. 더 벌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돈을 벌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는 걸까요? 내가 요즘 예배에 몇 번 빠져서 하나님이 내 삶을 막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하나님이 내게 죄의 형벌을 내리신다는 사고 방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 상황을 왜곡해서 바라보게 만드는 내 안의 죄의 오염이 문제입니다. 오염된 마음이 성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상황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엔서니 후크마는 죄의 책임(죄책)과 죄의 오염은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선언적 행위인 칭의에서 우리 죄의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바탕으로 제거됩니다. 그러나 오염은 죄의 결과이며, 그 다음에 다른 죄를 낳는 우리 본성의 부패를 의미합니다…성화 가운데서 죄의 오염은 제거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
좋은 일을 막는 오염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이야기했습니다. 구원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뜻하신 좋은 일이 가득하고, 좋은 일을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화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일,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실제적인 오염을 제거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가장 피부에 와 닿고 신나는 일입니다. 즐겁게 손을 씻을수록 점점 삶이 상쾌하고 신선함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오염을 씻을 때에는 씻는 방식도 중요합니다. 그릇에 고기를 굽고 난 후에 기름이 묻었다면, 주방용 세제를 사용해야 합니다. 화장실에 곰팡이가 피었다면 락스를 사용해야 합니다. 성화의 방식이 다르면, 오염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손을 무엇으로 씻어야 할지는 자녀의 부모가 제일 잘 압니다. 깨끗이 씻으려면 나의 생각이 아니라 부모가 제안하는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성화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그 마음의 회복이 먼저입니다.
월터 마샬은 [성화의 신비]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사랑스러워야 성화도 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신을 대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스러운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분에 대한 생각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고 싶어하는 한 형제가 찾아와서 그 자매에게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형제는 다양한 SNS에서 여러 가지 고백하는 방법을 찾아보았다고 했습니다. 밖에서 촛불로 길을 만들고 이벤트를 한 후에 좋아한다고 고백하며 선물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그 자매는 소소한 관심, 그리고 진솔한 마음의 표현을 훨씬 더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망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다행히 그 형제는 사랑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을 택해서 교제에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신뢰하고 따라야 합니다.
싱글레어 퍼거슨은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탁월하게 설명합니다.
“계명은 철로와 같습니다. 성령이 마음 속에 부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이는 삶은 이 철로 위를 달립니다. 사랑이 엔진에 동력을 제공하고, 율법은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둘은 상호 의존적입니다. 사랑이 율법과 별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올바로 사랑할 눈은 율법에서 빌려야 합니다.
성화를 이해하는 핵심 2. 그리스도와의 연합
신자라면 누구나 “나는 과연 성화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성화는 결코 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이 성화가 가능하도록 능력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능력의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연합의 교리를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3, 4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성경은 우리의 모든 성화 과정이 비인격적이거나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나는 유기적인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예수님께 붙어 있는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는 교회의 지체, 몸의 각부분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 16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핵심을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게 하셔서 예수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모든 선한 것, 거룩한 것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영향을 받도록,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담과의 연합
반대의 상태가 아담과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기 이전에 첫 사람, 아담과 연합해 있었습니다. 아담을 통해 우리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나는 아담을 본 적도 없고 아담을 따라 가려고 한 적도 없지만, 나도 모르게 죄악을 향해 가고 죄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것이 연합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의 모습은 아담과 연합된 모습입니다.
그 반대의 경험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경험입니다. 내가 억지로 애를 쓰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말씀에 이끌리게 되고,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되기 시작합니다. 비록 부족한 것이 많이 잇지만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하나 둘씩 생각과 행동이 변화되고, 중독의 습관이 고쳐지고,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죄악을 벗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연합을 인식하게 시작할 때부터
싱클레어 퍼거슨은 [거룩의 길]이란 책에서 자신이 회심하게 된 순간을 기록했는데, 그 모든 변화의 결정적인 순간이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했음을 깨달은 때였다고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면서 나는 삶에 대한 내 관점이 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에게 내주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집까지 깡충깡충 뛰어서 갔습니다. 이는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으로 손꼽힙니다. 그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 예수께서 내주하러 와 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이 진리가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다 스며들려면 평생이 걸립니다. 하지만 먼저 이 진리의 사실성을 깨닫지 않으면 그 과정은 절대 시작되지 않습니다. “
구체적인 행동을 당장 변화시키려고 서두르지 말고, 먼저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오셨음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내가 예수님과 연합해 있음을 고백하고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방 안에 모기가 있다
한 가족이 더운 여름날 문을 열어 놓고 한창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방 안에 모기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각족들의 마음과 행동이 일시에 변화됩니다. 혹시나 모기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닌지 소리에 예민해지며, 잠을 포기하고 불을 켜고 모기를 찾기도 합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중요한 분이시고, 내 안에 인식되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인식할 때부터, 모든 삶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내 안에 계신 주님과 관계된 것으로 보일 때부터, 성화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