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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구원의 서정(5)

by liefd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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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상태가 좋지 않아도 상관없다, 2:16)

칭의(justification): 인간에 관한 신적 선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의롭다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3:24). 구원의 과정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므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은혜의 행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자의 자격으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전가(imputation): 자신의 허물이나 책임 등을 남에게 덮어 씌움. 신학적으로는 의도적으로, 개인의 의로움이나 죄과 인간적인 책무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용하지 않는 단어, 칭의

칭의라는 말은 일상에서 좀처럼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종종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칭의 교리를 교회가 서거나 넘어지게 하는 신조 라고 표현했습니다.   

인정받다, 충분하다

칭의란 인정받다, 충분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 인정받기 위한 노력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점수가 커트라인을 넘겼습니다. 그러면 합격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것이 칭의의 상태입니다. 대기업 면접을 보았는데 총점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러면 입사할 자격이 있는 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고 누리는 데에 충분한 자격이 주어지는 상태가 칭의의 상태입니다. 요약하자면 칭의란 하나님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근거로 내가 하나님 앞에 충분하다고 선언하시는 일입니다.

상태가 아니라 선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 A 열심히 공부해서 점수가 안정권이었습니다. 친구 B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점수가 아슬아슬했습니다. 그런데 시험 당일 점수가 좋지 않던 친구 B 합격선을 훨씬 넘었고, 평소에 하던 친구 A 컨디션이 좋지 않아 실수를 하는 바람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합격자 발표가 끝나고 친구 A 출제자에게 전화를 했다고 합시다. 사실 저는 친구보다 훨씬 공부를 잘하고, 평소 성적도 나왔습니다. 친구는 운이 좋아서 시험을 것이지, 평소 실력은 형편없습니다! 라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출제자는 평소에 당신이 시험을 얼마나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이번 시험에서 점을 받았는가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칭의는 현재 상태가 아니라 자격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지식이 부족해도, 정당하게 합격하면 공무원이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삶에는 나의 감정이나, 나의 지식의 수준이나, 나의 현재 상태가 아니라, 규범적이고 법정적으로 주어진 신분이 인생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양세형이 일할 있었던 이유 

개그맨 양세형은 고등학생 때부터 데학로에서 개그맨 활동을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법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당시 양세형은 미성년자이다 보니 근로기준법에 저촉되는 일이 생깁니다. 우리나라는 미성년자가 10시가 넘어서는 근무하지 못하게 규제합니다.

 

그러나 양세형은 아무 문제없이 개그맨 활동을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양세형이 법을 위반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세형은 소속사와 다른 계약을 맺었습니다. 근로계약 아니라 전속계약 맺은 것입니다. 전속계약은 상대방을 근로자 아니라 비지너스 파트너 여깁니다.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대등한 관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약의 내용에 따라 얼마든지 일을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이것이 법정적인 선언의 위력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영적인 미성년자들입니다. 그것을 죄인으로 바꾸어 보면 이해가 쉬어집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속계약이라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나의 순종으로 여겨 주시는 전속계약이 쳬결되었다면, 나는 죄인인 상태에도 불구하고 법정적인 칭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욱체가 없느니라.”

칭의를 이해하는 핵심 1. 변화가 아니라 선언

  칭의를 이야기할 때마다 성도들은 죄책감과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죄를 짓고, 자신이 생각할 때도 마음에 드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있겠느냐?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면 죄책감이 커집니다. 마찬가지로 칭의는 상태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근거로 선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전속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내가 미성년자인 것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고 해서 상태가 갑자기 선하게 바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법정적인 선언은 중요합니다. 나의 상태와 관계없이 나의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머레이는 [구속]이라는 책에서 칭의 교리에 대한 오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칭의가 사람을 실제로 거룩하게 하거나 의롭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상을 통해서도 있습니다. 무죄가 선고된다고 사람이 선하게 되거나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판사가 피고의 무죄를 선언한다고 해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의롭다 말은 의롭다는 선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롭게 된다 거나 거룩하게 된다 거나 선하게 만든다는 의미는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정죄로 사람이 악해지는 것이 아니듯, 칭의로 사람이 선해지거나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칭의를 이해하는 핵심 2. 칭의와 성화의 선후 관계

내가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 나에게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칭의와 성화의 선후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성화된 다름에 나의 상태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여기신다면, 성화 다음에 칭의가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칭의의 근거는 나의 행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성화되기 이전에 예수님의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시고, 감사와 감격으로서 내가 성화되어 가는 것이라면, 칭의 다음에 성화가 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요? 전자일까요, 아니면 후자일까요? 후자가 맞습니다. 순서를 평생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성화를 통해서 칭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게 칭의가 먼저 주어지고, 성화를 향해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칭의는 그래서 언제나 성화 앞에 옵니다.

규정적인 언어와 연결시키지 않는다

칭의는 삶을 살펴보고 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충분하고 받을 만한 인생이라고 여긴다면, 즉시 변화되어야 삶의 습관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보면서 규정적인 언어, 판단적인 언어와 연결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상태가 힘든 것이지, 절대 망한 것이 아닙니다. 시험에서 떨어진 것이지, 인생이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언어 속에는 우리의 부정적인 상태를 근거하여 우리의 삶을 판단하는 언어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상태와 관계없이 주어졌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나의 부정적인 지금 상황에 관계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새로운 일이 일어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성화보다 칭의가 앞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상태를 근거로 삶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 이것이 칭의를 믿는 사람의 바른 태도입니다.

칭의가 주는 가지 유익

칭의라는 법정적인 선언이 내게 주는 가지 현실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사함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 됨입니다.

칭의를 믿는 자의 유익 1. 사함

사함은 칭의가 주는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유익입니다. 죄사함이란 죄가 용서받는 ,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기에 나는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되고, 예수님이 죽으셨기에 내가 죽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 21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가 당해야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벌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이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누가 대신 당해준다는 말인가? 우리는 앞으로도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주님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때문에 당해야 형벌을 모두 가져가셨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맞이했다면, 삶에서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을 인생에 펼치지 않으십니다.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둘이서 이유 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함께 폭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경찰서에 가는 것을 막아 주시고, 믿지 않는 사람만 경찰서에 가게 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형벌을 당하셔도, 땅에서 죄의 형벌은 동일하게 펼쳐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나 믿지 않으나 동일하게 형벌을 당하는데, 예수님이 형벌을 대신 당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형벌로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이 이미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에 주님이 나를 버리신 증거가 아니라, 나를 단련하시고 거룩하게 인도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길임을 믿을 있습니다.

 

17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스위스 개혁신학자 프란시스 투래틴은 사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함은 부패성이나 더러움의 실질적인 제거가 아니라 죄책을 사법적으로 사해주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함에 의해 실제적인 죄책 또는 형벌의 의무가 제가 되지만, 잠재적인 죄책, 또는 내재적인 부패로부터 흘러나오는 죄의 본질적인 권능은 즉시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죄들이 절대적으로 제거돠었다는 것이 아니라 형벌에 부쳐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형벌을 위해서 미래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확신이 바로 사함을 믿는 자가 속에서 누리는 유익입니다. 젊었을 방탕했던 것을 하나님이 지금 심판하신다고 느끼십니까? 예전에 범한 죗값을 치르면서 여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느끼십니까? 형벌이 예수님께 쏟아졌음을 아직 믿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죄를 범할지라도, 남들이 당신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고 있다고 말할지라도 속지 말라, 하나님은 내가 받은 벌을 받게 하시려고 남은 인생을 살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복구 없는 승리

형벌이 없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이렇게 표현할 있습니다. 과거를 복구하는데 인생을 쓰지 않게 됩니다. 사람마다 과거, 내가 저지른 , 내가 잘못된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동을 복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20 중반이 넘어서도 계속 수능 시험을 때에 틀렸던 문제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꼬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서 자라나서 오로지 생각만 하면서 살아왔다고 합니다. 어떤 자매는 예쁘다는 말을 듣지 몫하고 자라나서 직장에 들어가 돈을 벌기 시작하자 성형 중독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에 이루지 못했거나 실패했던 것을 기준으로 스스로의 삶이 충분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칭의라는 법정적인 판단을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이미 가져 가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이 받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복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나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여정은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삶을 만들어 가시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과거를 복구하려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사함 받은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부채를 상환하는

사람이 5억원의 집을 사고 싶은데 수중에 돈이 2억원 밖에 없어서 3억원을 대출받았습니다. 사람은 매월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원리금과 이자를 상황해야 것입니다. 이것이 빚을 갚는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내가 5억원의 집이 올라서 7억원이 되어서 어떤 사람이 집을 사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7억원에 짐을 팔아서 남은 3억원을 바로 상환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산 인플레이션을 통한 투자의 기본 원리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과거를 고치기 위해 빚을 상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학력, 외모, 가난, 지난 시간의 낭비 때문에 후회하지 마십시오. 빚을 상환하지 않는 방법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함을 받는 자의 삶입니다. 내가 자꾸 과거를 복구하려고 하는가? 내가 자꾸 값을 치르려 하는가?

칭의를 믿는 자의 유익 2. 양자

양자 된다는 것은 입양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칭의를 통한 적극적인 의미의 유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형벌을 가져가시는 사함의 이외에, 다른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받을 있을까요? 칭의라는 교리 속에 전가라는 의미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전가라는 말은 그렇게 간주하다. 떠안다라는 뜻입니다. 죄가 예수님의 죄인 것처럼 전가됩니다. 예수님이 떠안으십니다. 이것이 첫번째 전가입니다. 한번의 전가가 이루어집니다. 삶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모두 전가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이시기에, 나도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받습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셨기에, 나도 이미 순종한 사람처럼 대우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가가 일어난다는 해서 "이중 전가"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나를 대우하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러한 판단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대하시는 동일한 방식으로 오늘 나를 대하고 계십니다.나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함을 통하여 형벌을 위해 미래를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나은 확신이 가능합니다. 이제 속에는 오히려 나의 미래 복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음도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 감당해야 현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자녀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지금 누군가와 갈등이 있습니까? 과거에 내가 잘못한 때문에 꼬인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일을 바라보실 과거에 대한 처벌로 일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모든 순간을 사용하고 계심을 확신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칭의의 확신

칭의에 대해 아무리 알고 있어도, 스스로의 삶을 바라보면 한없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즘 나를 싫어하시는 같습니다. 때때로 찾아오는 이런 영적인 무너짐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시 칭의의 위력을 체험할 있을까요? 자꾸만 나의 상태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서 나의 합당함을 평가하려는 유혹이 들때마다, 하나님이 실제로 아들이셨던 분을 대우하시는 방식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실제 아들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죄가 없으셨는데도, 죄의 형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순종하고 행하셨는데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때마다 되새겨야 합니다. 아하, 내가 받을 벌과 저주가 이미 십자가에 있구나! 아하 내가 당해야 삶의 고난이 이미 십자가에 있구나! 그런데 예수님이 받으셔야 순종한 삶의 대가는 누가 가져간 거지?

 

 

바로 순종의 대가가 삶에 지금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고난과 실패로 얼룩진 모습 때문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십자가는 결코 좋아 보이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죽음을 넘어 부활과 영생의 문을 열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나도 확신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형벌을 대신 당하신 것이 맞다면, 내가 지금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어내실 위대한 여정임을 믿을 있습니다. 나에게 새롭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자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대우임을 언제나 신뢰하리라. 신자는 확신으로 삽니다.

순서를 평생 기억하십시오. 나의 성화를 통해서 칭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게 칭의가 먼저 주어지고, 성화를 향해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칭의는 그래서 언제나 성화 앞에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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