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책에 보면 인생을 사계절로 나눈다면, 40대는 늦여름이 끝나고 초가을쯤 열매를 맺어야 할 때라고 봄다. 지식과 경험을 쌓은 20대, 일과 인간관계에 집중해 치열하게 산 30대를 거쳐, 40대는 인생의 수많은 시험을 치르고 자리 잡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 뿌듯함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40대는 성공의 기쁨만큼 개인에서, 사회에서, 인생에서 실패의 아픔도 많이 겪는 시기입니다. 여전히 직장 일과 집안일, 자녀의 육아와 교육 등 바쁜 생활에 치이느라 자신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으며,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느끼고, 죽음에 따른 상실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수용소 주치의의 말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빅터 플랭크의 죽음의 수용소]. 12월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습니다. 2023년 마지막 한 달을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이 세상을 살다가 언젠가 죽게 됩니다. 그것은 정해 놓은 이치입니다.
1.죽음에 대한 공포는 왜 생기는 걸까요?
히브리서 2장 15절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람은 누구나 죽기를 무서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에 가면 영결식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영원히 끝났다는 뜻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영결식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발인예식, 혹은 천국 환송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죽음이 왜 왔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생노병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을 말합니다. 이러한 고통이 왜 왔는지 아십니까?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그를 에덴 동산에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얼마든지 따 막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막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15-17). 그런데 그 후에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아담에게 주어 그를 먹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9절 하반절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로마서 6절 23절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결과로 죽음이 찾아온 곳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찾아오는 불안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왜 생기는 걸까요?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위의 식구들이나 친지들에게서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는 순간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본래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삶에 아쉬워하게 되고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갈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람들에게는 언젠가는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예감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성경이 확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전에 어렸을 때 태엽을 감으면 시계가 가는 그런 기억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태엽을 많이 감으면 시계가 오래 가고, 태엽을 적게 가면 시계가 금방 가다가 멈춥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요?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의 태엽을 많이 감아 놓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의 태엽이 적게 감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인생의 태엽이 돌아가면서 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겸손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1년에 두 번 건강 검진받을 때입니다. 만약 나에게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할까? 우리 사랑하는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건강검진 결과가 안 좋아서 바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다가 건강검진 결과가 좋으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하느랴 열심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2.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직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자에게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며,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며 축복과 안식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인(惡人)의 영혼도 죽음 이후에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주님 앞으로부터 쫓겨나 고통과 후회 가운데 지내며 심판의 부활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 고통은 영원한 고통 또는 영원한 멸망인 지옥으로 이어집니다(마 25:46, 막 9:43,48; 살후 1:9: 계 20:10).
마귀에게 속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죄인들이 살아서 영원한 고통을 당할 장소가 지옥입니다(마 25:41) 지옥은 불과 유황이 타는 고통의 장소인데(요한계시록 20:15) 그 고통은 끝이 없기에 이곳에 던져지는 죄인의 운명을 둘째 사망이라 부릅니다. 지옥에서는 회개할 수 없으니(마 12:32) 용서가 없고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영원 상태에 처해집니다. 지옥은 원래 범죄한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을 형벌하기 위한 장소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곳입니(마 25:41).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단을 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하였을까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39절입니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 하기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사단은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뿐입니다. 마귀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본래부터 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반항할 때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자가 마귀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여 사람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사단의 노예 상태에 있게 합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짓는 죄를 이용하여 사망의 권세를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와 사망과 사단이라는 폭군 때문에 인간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마으이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의 권세를 멸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종 노릇하는 우리를 놓아주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심으로 사망의 공포에 사로잡혀 종 노릇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고린도전서 15장 52절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때 살아있는 성도들도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인류를 사망의 권세로 몰아간 것은 죄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죽음은 우리를 계속해서 위협하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로마서 5장 21절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권세를 어떻게 멸하셨을까요? '사망으로 말미암아'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더 이상 죽는 것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죄로 인해 죽어야 마땅하지만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의 형벌을 당하심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의 삯으로 사망이 찾아왔기 때문에 죽기를 무서워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으며,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존 칼빈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당하심으로 죽음에서 두려운 요소를 제하심으로써 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여전히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 앞서 가신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에서 고요함과 평온함을 유지하자”고 했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어느 그리스도인 자매의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 손에 닿을만큼 가까이 있습니다. 내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한참 전부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일상생활, 물징ㄹ, 미래, 타인에 대한 인식 등은 매우 천천히 무너져내리고 희미해지더니 사라졌습니다. 그의 눈에서 나는 그가 이미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후 그는 문을 통과했고, 우리를 뒤에 남겼습니다. 그것은 내게 죽을 수밖에 없는 내 운명을 뼈저리게 인식시켜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란 마지막 정류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로 “본향”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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