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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사는 가?(막 14:49),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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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책에 보면 하늘에서 쫓겨난 미하일 천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번째 질문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두번째 질문에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세번째 질문이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였습니다. 

 

미하일은 첫번째 질문,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헐벗은 천사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준 시몬 부부의 모습에서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사람에게는 삶의 시간을 정할 능력이랄까, 결정권이 주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에게는 결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 지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세번째 질문,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에는 엄마 잃은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방앗갓 부부의 모습을 통해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답을 제시합니다.

 

12월달 설교 주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에는 죽음의 공포에 매여 살아가는 인생을 놓아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행하실 때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과 부딪히면서 불편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것을 행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의 시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 높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율법을 깨뜨리려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태복음 5장 17절에서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모세 오경을, 선지자는 선지서를 가리킵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란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서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선지자는 그 구원의 요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은 율법의 조항에 매여 율법의 정신을 간과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0절에서 예수님은 율법과 신지자의 대강령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37,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이와 같이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조항에 매여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죽이는 일을 하면서도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는 안식일을 깨뜨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거치시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이 잠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 허는지에 대해 묻고 있지만 그들은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탄식하고 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손을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조치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헤롯당과 공모하여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잡아 죽일까 의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조항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요 살리는데 있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명기 6정 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미 모든 규럐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 21절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흭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 옛 사람이란 당시에 율법을 해석했던 랍비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화를 내고 욕을 한다고 해서 심판받아 지옥불에 들어간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 24절에 보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얘물을 제단에 드리려하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배를 드리려 갔다가 형제들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가 용서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게 되면 그것은 살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살인이란 행동으로 나타난 범죄 행위를 의미했다면 예수님에게서 살인은 마음으로 노하거나 욕을 하는 것까지 살인으로 간주합니다. 심지어 요한일서 3장 15절에 보면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것은 외형적인 것 뿐만 아니라 내면을 정결케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내면적인 미움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성경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 14장 48, 49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예수님께서 왜 나를 잡는데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 체포하지 않고 왜 이렇게 밤에 무장을 하고 왔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위하여 능력을 사용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구원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마 26:52-54). 

 

예수님께서 자신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눅 22:52).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사 53:12). 

 

본문 49절입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게 함이니라.” 마태복음 26장 56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가롯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십자가에 넘겨진 사건은 우연이 아니라 성경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지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 가롯 유다에게 배신을 당할 때에도 성경을 이루게 함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50).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내보내십니다요한복음 18장 4, 7절에서 자기를 체포하러 온 무리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나사렛 예수라고 그들은 말합니다내가 나사렛 예수다나를 잡아 가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는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눅 18:9). 예수님은 아무리 위급하고 실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을 확인한 로마 군병이 뼈를 꺾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20장 32-34절에 의하면 당시에 로마군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좌우편의 강도들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십자가형이 잔인한 것은 빨리 죽지 않고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는 죄수의 경우에는 로마 군병들이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죄수는 다리로 몸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의 사인은 결국 질식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군인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허리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물과 피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미 운명했다는 뜻입니다. 죽은 몸에서는 피와 함께 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로마 군병들이 뼈를 꺾지 않았습니다. 본문 36절입니

“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시편 34편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도 그것이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함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성경을 이루어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2023년 표어는 행복이 가득한 교회입니다. 성경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은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일이 닥칩니다. 그럴 때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염려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성경은 그렇지만 우리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행동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는 성공하거나 축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자녀를 양육할 때 우리는 다섯 가지의 큰 유익을 얻게 된다는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어려서부터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침으로 그 아이는 믿음을 갖게 되고 결국 구원받게 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처럼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아이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첫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성경을 통해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임을 교훈으로 얻게 됩니다. 

 

이처럼 부모가 자녀에게 성경을 통해 교훈을 주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부모는 성경을 통해 아이의 죄 된 행위를 책망하고 아이는 고침을 받게 됩니다.

 

네 번째, 바로 이 책망의 과정을 통해 부모는 말씀으로 아이를 바르게 양육할 수 있습니다.

 

 즉, 아이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고백함으로 죄 된 삶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다섯 번째로 부모는 성경을 가르침으로 아이가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즉, 믿음과 삶이 하나 되는 참 된 믿음의 소유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이가 성경을 통해 어려서부터 성품과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면 다른 어떤 아이들보다도 학교공부에서도 큰 성과를 보이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공부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이미 깨닫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이루어 가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면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최고의 전인 교육은 성경을 알아가고 성경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비로서 가능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성경을 써 먹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성경을 알아가는 단계에서 끝나지 말고 내 삶에서 성경을 이루어내기를 소원합니다.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게 주신 말씀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이 그래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성경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예람맨은 성경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예수님을 닮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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